찰나를 모아가야 한다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은 이 지구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신비로운 장소를 만나게 된다. 미국 유타주에 위치한 아치스 국립공원(Arches National Park)이 내게는 그런 곳이다.
2년 전, 유타의 프로보(Provo) 공항에 비행기로 내려 아치스와 캐니언랜즈(Canyonlands National Park), 메사 버데(Mesa Verde National Park) 국립공원을 다녀왔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이후로 아치스를 다시 찾고 싶어졌다. 이번에는 오직 아치스 국립공원만을 위한 2박의 여정을 차로 떠나보기로 했다.
집에서 아치스까지는 약 7시간 거리. 자정쯤 캠핑 장비를 싣고 길을 나섰다.
가는 길에 애리조나와 유타의 경계쯤에서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며 길을 가로막았다.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그때, 새벽 3시, 눈을 헤치며 달리는 제설차 한 대가 앞을 지나갔다. 그 차를 따라 천천히 눈 덮인 도로를 지나쳤다. 제설차가 아니었더라면, 그 폭풍 같은 눈 속에서 우리는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무사히 지나온 것이 그저 고맙고 다행이었다. 그렇게 밤을 새워 남편과 번갈아 운전하며, 마침내 아치스 국립공원 바로 앞의 마을, 모압(Moab)에 도착했다.
아치스 국립공원 안에서는 인터넷이 거의 터지지 않기 때문에, 모압에 있는 '모압 다이너'에서 아침을 간단히 먹으며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했다. (가성비 좋고 푸근한 식당이니 추천하고 싶다.)
우리는 공원 안에 위치한 데블스 가든 캠프그라운드(Devils Garden Campground)에 2박을 예약해 두었기에, 첫날엔 캠핑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여러 트레일을 들렀다. 그리고 캠프를 세팅한 후, 바로 옆의 데블스 가든 트레일을 따라 샌드듄 아치(Sand Dune Arch) 등 가까운 곳부터 둘러보았다.
밑에 지도에 함께 보기 좋은 구역들을 표기했다. 지도에 표시된 트레일 중, 특히 윈도우 아치(Windows)는 더블 아치(Double Arch)와 매우 가까이 위치해 있고, 트레일도 짧아 가볍게 둘러보기 좋다.
자연은 시간에 따라 천천히, 그리고 끊임없이 변한다. 그 안에서 아치들은 유독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아치스 국립공원의 아치들은 대부분 수천 년에서 수백만 년에 걸쳐 생성되며, 붕괴되는 데에도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대부분 사암으로 이루어진 이 아치들은 바람과 비, 눈에 의해 조금씩 침식되고 풍화되며 형태를 갖춘다. 아치의 그 시작은 아주 작디작은 균열이었다고 한다. 미세한 틈 사이로 스며든 비와 바람이 세월을 품고 자국을 남긴다. 시간이 지나 그 틈은 점차 넓어지고, 마침내 아치의 형태를 완성한다.
아치의 미세한 균열이 시작점이라니, 작은 상처도 작은 생각도 점점 커져서 이렇게 거대하고 아름다운 아치처럼, 아름다운 인생이 되려나, 균열의 시작점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닿았다. 요즘 나 역시, 작게 생겨난 커리어에 대한 의심을 점점 키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하는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꼭 이 일을 계속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릿속을 맴돈다. 결정하지 못하고 흘러가는 생각들. 언젠가 이 의심이 너무 커져서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면, 결국은 새로운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마치 균열이 커져 아치를 만들고, 언젠가는 무너지는 것처럼. 다만, 아치가 붕괴하기까지 수천 년이 걸리는 것처럼, 나의 결정도 너무 오래 걸리진 않기를 바라본다.
아치의 생애 중 ‘전성기’라 부를 수 있는 순간은, 아마도 가장 크고 웅장한 곡선을 이루고 있을 때일 것이다. 더블 아치(Double Arch)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저절로 "우와"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더블아치는 아치 안으로 타고 올라가 볼 수 있는데, 두 개의 아치가 이어진 아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치 너머의 세상이 액자처럼 펼쳐진다. 불과 몇 발자국 전만 해도 전혀 보이지 않던 풍경이, 아치 안으로 들어선 순간 완전히 다른 시야로 다가온다. 이 얼마나 신기하고 경이로운 변화인지.
그 외에도 아치스 국립공원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델리케이트 아치(Delicate Arch)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약 1시간 정도 오르면 도착할 수 있는 이 아치는 유타주 차량 번호판에도 자주 등장하는 상징 같은 존재다. 우리는 오후 4시쯤 트레일을 시작해, 해가 지는 순간에 맞춰 도착했다. 이토록 섬세하고 독특한 곡선의 아치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리고 어떻게 처음 발견되었을까. 생각할수록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이 웅장한 아치들도 언젠가는 무너진다. 시간이 더 흐르고, 바람과 비, 중력의 영향을 받다 보면 결국은 땅으로 돌아간다. 공원 안에는 이미 붕괴된 아치의 흔적들도 남아 있다.
실제로 아치스 국립공원에는 상대적으로 최근인 2008년에 무너진 월 스트리트 아치(Wall Arch)와, 붕괴로 향하고 있는 거대한 랜드스케이프 아치(Landscape Arch)가 있다. 랜드스케이프 아치의 경우, 1991년 큰 조각이 떨어져 나갔으며, 언제 완전히 무너질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오후 늦게 해 지는 시간에 맞춰서 캠프장 바로 옆 트레일을 따라 랜드스케이프 아치로 걸어갔다.
해 지는 시간에 맞춰서 출발했지만, 해는 이미 산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어스름한 빛 속에 마주한 그 거대한 아치.
그 순간,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울렁거렸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점점 얇아져 가는 그 아치를 바라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아슬아슬함이 느껴졌다.
수천 년을 품고 선 아치 앞에 서 있었지만, 나는 그저 한순간의, 찰나의 시간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이 아치가 무너져 땅으로 돌아가기까지 또 수천 년과 수만 년이 흐를 수 있는데도, 나는 이 아치가 마냥 곧 무너질 것 같은 아쉬움을 느낀다. 이 시간이 지나는 것이 너무 아쉽다. 멈춰진 듯한 풍경 속에서 나는 시간의 흐름을 더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아치의 생애는 눈에 보일 만큼 분명하다.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그것이 커다란 구멍으로 변해가며, 조각들이 떨어져 나가고, 끝내는 붕괴 한다. 그 모든 과정은 수만 년에 걸쳐 이뤄지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그 각각의 순간들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아치의 전 주기를 살아내지도 못하면서, 나는 그 긴 생의 여정들을, 단지 찰나처럼 느끼며 바라볼 수밖에 없다.
자연 앞에 서면, 우리가 얼마나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인지 실감하게 된다.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흐르고 나는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늘 아쉬움을 토로한다. 아치는 자신의 속도로 생성되고, 또 사라진다. 그 앞에서 각자의 속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동동거리는 나에게는, 여전히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문득, 기억도 참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치스에서의 이틀은 나름 꽉 찬 일정이었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또렷이 남은 것은 고작 몇 분도 채 되지 않을 찰나들뿐이다.
랜드스케이프 아치를 처음 마주했을 때,
델리케이트 아치의 석양을 바라보던 순간,
윈도우 아치 뒤로 별이 쏟아지던 그 밤.
그 찰나들이 모여, 아치스 국립공원을 특별한 장소로 남겨놓는다.
찰나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그럼에도 이토록 아치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 짧은 순간들 속에서 살아있음을 진하게 느꼈기 때문 아닐까. 그래서 오늘도 찰나를 모아가야겠다, 그 찰나들로 삶을 채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