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사버데를 마음에 새기며
최근 이 주에 걸쳐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다. 새 집은 우리가 살던 렌트 아파트에서 차로 10분 남짓 거리여서, 짐의 대부분은 투싼에 가득 싣고 왕복하며 옮겼다. 침대와 매트리스, 소파처럼 투싼으로는 옮기기 어려운 짐은 주말에 반나절 동안 유홀(U-haul) 트럭을 빌려 옮겼다. 다행히 거리도 가까워 며칠에 나눠 천천히 옮길 수 있었고, 둘이서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이번이 결혼 후 일곱 번째, 미국에서는 다섯 번째 이사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넘어올 때 화물 배송 서비스를 이용한 것을 제외하면, 이곳에서는 항상 둘이서만 이사를 해왔다. 처음에는 짐이 많지 않아 호기롭게 시작했고, 이제는 이사에 익숙해져 자연스럽게 역할을 나누며 해내고 있다. 한국의 아파트처럼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려야 하는 구조가 아니라는 점도 이곳에서의 셀프 이사를 수월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벌써 미국 생활도 7년째. 그만큼 짐도 제법 늘었다. 고양이 짜장이의 캣폴과 캣타워만 해도 가구가 네 개가 넘으니, 짐을 바라보면 ‘우리도 이제 꽤나 맥시멀리스트가 되었구나’ 싶은 마음이 든다. 라스베가스를 떠날 때는, 꼭 짐을 많이 정리하고 가야지—다짐해 본다.
왜 이렇게 이사를 자주 하냐고, 한 곳에서 정착하지 못하느냐는 핀잔을 많이 들어서 인지, 이제는 그런 말에 이사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다행히도 이런 삶의 방식이 잘 맞는 남편을 만나, 감사하게도 다양한 동네에서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누리고 있다.
처음 미국에 올 때만 해도 이렇게 자주 이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자리를 잡으면 한 곳에 오래 정착해 머물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LA에서 학교를 그만두고, 사람들이 살기 좋다고 말하던 얼바인 근처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아파트에 살다가, 정착을 꿈꾸며 방 3개, 화장실 3개의 타운하우스를 구입했다. 오래된 집이었지만, 작은 백야드와 커다란 나무들, 넓게 트인 창밖 풍경 덕분에 특히 짜장이가 묘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백야드 담장을 타고 오가는 청설모들 덕분에 옆집 강아지들도, 우리 고양씨도 창밖을 떠날 줄 몰랐다.
그 집에 살며 우리는 집안 모든 벽에 페인트칠을 하고, 주방을 철거하고, 바닥 타일도 직접 붙였다. 집을 사느라 한국에서 일하며 모은 돈과 미국에서 벌어 모은 돈을 몽땅 쏟아부었기에, 가능한 일은 모두 우리가 직접 했다. 방수 문제 때문에 손대지 못했던 화장실은 1년을 기다리며 돈을 모아 끝에, 동네에서 알게 된 한국인 사장님께 저렴하게 맡길 수 있었다.
지금은 다른 이의 소유가 되었지만, 그 집은 여전히 우리의 미국 내 첫 집으로 기억된다. 초록이 무성하던 나무들, 짜장이가 청설모를 따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그 집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아이를 낳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만약 우리 삶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 역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순간부터, 그 집은 삶을 ‘계획하던 집’이 아닌, 우리를 눌러 앉히는 ‘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으로 지내던 가을의 끝자락, 우리는 콜로라도의 메사버데 국립공원(Mesa Verde National Park)을 다녀왔다.
메사버데에 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건,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사진 속에서 처럼 미국 콜로라도 남서부, 바위산과 평원이 만나는 고원 지대에 위치한 메사버데 국립공원에는 푸에블로 선조(Ancestral Puebloans)라 불리는 원주민들이 살아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절벽에 진흙으로 쌓아 올린 집을 보는 순간 그곳을 꼭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메사버데’는 스페인어로 ‘초록의 탁자’라는 뜻이다. 멀리서 보면 나무와 풀이 덮인 고원이 마치 푸른 탁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 가파르게 깎인 절벽의 움푹 팬 부분에 푸에블로 선조들은 집을 지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흙과 돌을 쌓아 만든 작은 방들과 창고, 사당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의 집은 돌과 진흙으로 쌓아 올린 단순한 구조였지만, 수백 년을 견뎌낸 생명의 흔적이었다. 그 집들의 흔적은 절벽 바로 아래에서 봐도, 건너편 절벽에서 바라봐도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다.
푸에블로 선조들은 서기 550년경부터 이 지역에 살기 시작했고, 1100년~1300년 사이에 이 절벽 거주지 시대(Cliff Dwelling Period)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의 대표 유적지인 클리프 팰리스(Cliff Palace), 발코니 하우스(Balcony House), 스프루스 트리 하우스(Spruce Tree House)가 메사버데 국립공원 안에 모여 있다. 그들이 절벽 속 집을 짓던 1200년대, 지구 반대편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150개가 넘는 방과 20여 개의 키바(Kiva)로 구성된 절벽 도시, 클리프 팰리스였다. 우리는 미리 예약한 투어 티켓을 들고 파크레인저의 안내를 받아 사다리를 타고 절벽 안으로 내려갔다. 거대한 원형의 키바는 종교의식을 위한 공간이자, 겨울의 찬 바람을 피해 사람들이 둘러앉아 불을 지피던 따뜻한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더 인상 깊었던 건, 집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다. 푸에블로 선조들에게 집은 하나의 점이자, 순환의 일부였다. 계절과 자연, 동물의 움직임에 따라 집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에게 집은 ‘소유’의 개념이 아닌 ‘관계’였고, ‘정착’보다는 ‘이어짐’이었다. 푸에블로 선조들에게 집은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영적인 공간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집을 떠나는 건 그 집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기억과 연결된 공간을 보존하고 떠나는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이 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시 빌려 쓰는 것이다."라는 그들의 믿음은, 그들이 집을 떠나면서도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품게 했을 것이다.
1300년대 무렵, 그들은 이곳을 떠났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지만, 어떤 이유든 그들에게 집은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닌, 놓아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문득 우리의 상황을 떠올렸다. 집값이 오르며 집이 점점 ‘거주지’가 아닌 ‘투자 자산’이 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집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렌트를 주기에도 수익보다 대출 이자가 더 높았고, 집을 팔자니, 올라갈 가격이 아쉬웠다. 집이 우리를 붙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묶인 돈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집이라면 그게 얼마나 미련한 짐인가 싶었다.
메사버데의 절벽 속 집들을 돌아보며, 나는 문득 그들이 그곳을 ‘떠날 수 있는 집’으로 여겼다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푸에블로 선조들에게 집이란 소유가 아니라 관계였고, 장소라기보다는 순환하는 삶의 한 점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들은 떠났고,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의 경우, 집을 팔고 떠난다면 집 가격이 더 올라갈 테니 다시 돌아오는 게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또 돌아오지 않으면 어떠한가, 우리에게 또 잘 맞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곳으로 계속 가보는 것도 방법이 아닐까,
당시 모기지의 무게의 압박 속에서 우리는 결국 우리는 익숙한 공간을 떠나기로 했다. 더 나은 삶이라기보다는, 더 가벼운 삶을 향해 나아가기로.
그 결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직접 칠한 집안 곳곳, 해가 들어오는 방향, 짜장이가 햇볕을 즐기던 마루, 주말마다 찾던 커피숍까지 — 집이라는 공간에는 너무 많은 기억이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사버데의 절벽 아래, 수백 년 전 누군가가 지었다가 버린 그 집을 보며 나는 다시 생각했다. 집은 우리 삶의 일부일 뿐, 삶 그 자체는 아니다. 떠나는 것이 잘못된 게 아니고, 떠날 수 있다는 건 자유라는 것이다.
그날 이후로 ‘집’이라는 말은 내게 좀 더 유연한 단어가 되었다. 단단한 벽보다 마음속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든, 아니면 전혀 새로운 곳이든—중요한 건, 그곳에 함께하는 남편과 짜장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에게 집이란, 남편과 고양씨가 있는 그곳.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