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 아일랜드에서 섬여우를 만나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벤츄라(Ventura). LA에서 두 시간쯤 달리면 도착하는 조용한 해안 도시에서 배를 타면, 채널 아일랜드 국립공원(Channel Islands National Park)에 닿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벤츄라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정작 그곳에 살면서는 한 번도 채널 아일랜드를 찾아간 적이 없었다.
‘채널 아일랜드’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해협의 섬들’을 의미한다. 이 국립공원은 산타크루즈, 산미겔, 산타로사, 아나카파, 그리고 산타바버라, 다섯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배가 가장 자주 다니는 산타크루즈 섬(Santa Cruz Island)으로 가기 위해 새벽같이 벤츄라 항으로 가서 아침 8시에 배에 올랐다.
채널 아일랜드에는 화장실 외에 어떠한 편의시설도 없다. 마실 물은 물론, 하루 동안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챙겨가야 한다. 우리는 당일치기 일정으로 오후 4시 배를 타고 돌아올 예정이었기에, 도시락과 여벌 옷, 그리고 카약 투어에 필요한 물품들을 배낭에 넣어 배에 올랐다.
운이 좋았던 걸까. 섬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하게도 돌고래 떼와 혹등고래를 만났다. 30마리도 넘는 돌고래들이 무리를 지어 바다를 가르는 장면은, 살아오면서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파란 수면 위로 커다란 혹등고래의 등이 유연하게 솟아오르고, 고요한 순간—흰 숨결이 공중에 피어오를 땐 마치 지구가 천천히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자연은 언제나 경이롭지만,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한 시간 반정도, 돌고래들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고 배를 타고 가 산타크루즈 섬에 도착했다. 항구에서 비교적 짧은 거리에도 임에도 불구하고, 채널 아일랜드 국립공원은 완전히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느낌이다. 가게도, 마트도, 와이파이도 없다. 고요하고, 원시적이며, 마치 사람이 자연에 익숙해지기 전의 시간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
우리는 미리 채널아일랜드에서 카약을 타고 섬 일부를 둘러보는 투어를 신청했다. 정박지 바로 옆에서 가이드를 만나, 곧장 해안선을 따라 카약을 타고 나섰다. 산타크루즈 섬은 다양한 크기의 해안 동굴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 카약을 타고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가며 섬의 또 다른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바다는 말도 안 되게 맑았고, 수면 아래에서는 햇살을 받은 해초들이 푸르른 빛을 은은하게 발하고 있었다. 국립공원으로서 철저히 보호되고 있는 이 섬의 자연을 마주하며, 그 모든 순간에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이 아름다운 채널 아일랜드엔 이곳에만 사는 독특한 동물이 있다. 바로 섬여우, 아일랜드 폭스(Urocyon littoralis). 캘리포니아 해안의 채널 제도에만 서식하는 고유종으로, 몸무게는 겨우 1.8kg 남짓. 실제로 보면 어른 고양이보다도 작고, 해가 잘 드는 잔디밭에서 느긋하게 낮잠을 즐기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그러나 그 작고 조용한 생명은, 동시에 섬의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작은 여우가 식물의 씨앗을 옮기고 퍼뜨리며 생태계의 순환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그런 여우들도 한때 멸종 위기를 맞이한 적이 있다. 1990년대 후반, 황금독수리가 섬에 정착하면서 여우의 개체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본래 어류를 주로 먹는 대머리수리가 줄어들고, 야생 돼지 같은 육상 먹이원이 늘어나자, 황금독수리가 섬으로 유입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산타크루즈 섬의 여우는 2,000마리에서 100마리 이하로, 이웃한 섬들에서는 겨우 15마리만 남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한다.
2004년부터 여우 보존을 위한 체계적인 복원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황금독수리를 포획해 내륙으로 옮기고, 야생 돼지 개체 수를 줄이며, 여우에게는 백신 접종과 사육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사육 프로그램을 통해 늘어난 개체들을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렇게 12년간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이어진 노력 끝에 2016년, 채널 아일랜드 여우는 멸종 위기 종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그 작은 여우가 다시 섬의 햇살 아래를 자유롭게 거닐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를 생각하면 놀라움과 경외심이 동시에 밀려온다. 위기는 순식간에 찾아오지만, 회복은 언제나 더디고 고된 법이다. 12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 복원과정에 수 많은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쌓여왔을 것이다.
복원팀은 여우의 생존율과 개체 수를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50년 동안 멸종 확률을 예측하는 모델을 만들었다. 그 예측치가 정해진 기준 아래로 안정되었을 때, 그들은 여우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매우 정교하고, 조심스럽고, 무엇보다도 끈질기게 이어진 과학적 여정이었다.
그래서일까. 채널 아일랜드를 걸으며 왜 이곳엔 상점도, 신호도, 인터넷도 없는지 알 수 있었다. 바람과 풀, 그리고 고요함 속에서 자연은 다시 제 균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여우들이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작은 여우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손길이 쌓여 있었는지를.
채널 아일랜드 여우 복원의 성공 이후, 이 복원 기준은 미국 내 다른 멸종 위기종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레이산 알바트로스(Laysan Albatross)와 캘리포니아 콘도르(California Condor)처럼 또 다른 생명들이 이 기준 덕분에 새로운 가능성을 얻고 있다. 한 종의 회복이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연쇄일까.
섬에서 쉬고 있는 여우들을 여유롭게 구경 한 후 돌아오는 배 안에서, 나는 여우들의 평화로운 뒷모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세상엔 보이지 않지만, 묵묵히 쌓이는 노력들이 있다. 언뜻 보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어떤 이들은 조용히, 그러나 정성스럽게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채널 아일랜드 여우의 회복은 그 증거였다.
그리고 나 역시 내 삶의 작은 일들을 더 정성스럽게 쌓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일의 노력이 모여, 언젠가 더 깊고 단단한 나를 만들 수 있기를.
더 좋은 글을 쓰고, 더 나은 인공지능 모델을 만들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