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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태형 Apr 30. 2017

그녀들의 도화지가 제일 비쌌다.

우사단길의 타투샵. 인디타투를 만나다.

옛 어느 날, 잔치에서 어떤 부인이 국을 쏟아 치마가 얼룩졌다.

신사임당은 얼룩 위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그렸고, 동네의 어떤 여인도 그 치마를 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얼마 전, 어떤 여인은 아버지에게 간 이식 수술을 하여 명치에서 허리까지 내려오는 흉터를 가지게 되었다.

한 타투이스트가 여인의 흉터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흉터는 드림캐쳐의 줄기가 되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고, 아름다운 몸을 되찾은 여인은 이내 웃을 수 있었다.


타투를 통해 오롯이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그녀들. 이야기의 주인공, 우사단길의 "인디타투"를 만나고 왔다.

<왼쪽부터 타투이스트 최예지, 최윤조. 쌍둥이이다. 손등의 문신으로 구별하면 쉽다>

"어떻게 타투를 시작하게 되었나"

예지) 스물 세 살 때 언니 몸을 봤는데 타투가 있었다. 그때 타투가 예쁘게 보이지 않아서, '내가 더 예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렇게 타투를 배우게 되었고, 지금 7년째 버티는 중이다.  

<타투이스트 최예지>

너무 즉흥적인 것 같아 이해가 잘 되지 않으시겠지만, 쌍둥이는 그렇다. 미세한 감정의 결부터 생각까지, 닮고 싶지 않아도 너무 닮은 모습에 놀랄 때도 있다. "너희는 쌍둥이니까 아마 같을 거야"라는 말이 싫어 초등학교 뒤로는 학교도 일부러 따로 갈 만큼 독립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둘 다 타투를 하고 있다.

피가 같으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게 영감을 더 많이 받고, 그 영감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다.


<타투이스트 최윤조>

윤조) 나도 그렇다. 동생을 따라 타투를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는 무대미술 쪽에 4년간 있었는데, 먼저 타투를 시작한 동생 덕분에 방향이 전환되었다.  


동생이 내 대학 후배이다. 공부를 시작하고, 동생에게도 같은 공부를 해보는 것을 권유했었다. 이렇게 처음엔 동생에게 새로운 방향이나 길을 제시해줬었는데, 이제는 동생에게 많이 배운다.

같지만 다르고, 또 다르지만 같다. 쌍둥이는 이렇게 상호보완적으로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 같다.

내 작품의 영감은 대부분 동생에게서 온다. 동생은 정말 자유롭고 매력적인 사람이다.


"쌍둥이 타투이스트라는 점이 특이하다. 자주 싸우진 않나?"  

윤조) 싸울 때 가위 들고 싸운다. 문 잠그고 살려달라고 하고..

어렸을 땐 얘 때문에 맞고 다닌 적이 있다. 사고는 얘가 치는데 나인 줄 알고 달려와서 때리더라.

예지) 바지 안 빌려줬더니 바지를 가위로 자르더라. 다른 의미로 참 대단한 것 같다.

싸운 이야기 하면 5시간도 모자란데, 그러면 오늘 인터뷰를 못하니 여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우사) 그럼 최근엔 언제 싸웠나

윤조) 최대한 안 싸우는 방법을 택한다. 말을 안 한다던지, 따로 산다던지,

예지) 나 오늘 너네 집에서 잘 거야

윤조) ...


"타투의 매력에 대해서 말해달라"


예지) 감동스럽고 잊지 못할 작업이 하나 있는데, 아버지께 간이식 수술을 한 여자분이 계셨다. 명치부터 허리까지 이어지는 심한 흉터가 생겼는데, 그 상처가 심해서 제거할 수 없는 흉터였다.

여자의 몸으로써 긴 흉터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속상한 일이다. 몇 년 동안 거울은 쳐다도 안 봤다고 한다.

소통 과정을 통해 그분이 받았던 고통을 공유했다. 그 고통을 오롯이 느끼게 되었을 때, 나는 하나의 타투를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간이식 수술자국을 문신으로 커버업>

내면의 상처가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일까,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잘 이겨내 주셨다.

타투를 받기전에 계속된 악몽에 시달렸었는데, 타투가 완성되고 난 후에 악몽을 꾸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누군가의 아픔과 상처를 아름다움으로 승화했다는 점에서 희열을 느꼈다. 괜스레 눈물이 나는 그런 작업이었다.


이태원으로 오기 전 우리 작업실은 안산에 있었는데, 한 번은 그런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몇 년 전 안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정말 슬픈 일이 있었는데..

우사) 세월호인가?

예지) 그렇다.

유가족분들이 오셔서 가족끼리 타투를 받으셨다.

안산을 넘어서 전국, 세계가 아파했던 사건이 아니었는가. 나도 그 사건에 대해서 비통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세월호 노란 리본 타투>

유가족 분들이 오셨을 때, 모두 무료로 해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타투이스트로써 할 수 있는 최고의 애도이자 기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가족 분들 모두 한사코 꼭 주셔야겠다고 하셔서, 용돈으로 받았다.

아이 이름과 "미안하다 막내 딸, 곧 만나자." 레터링을 하면서 울컥했었는데, 유가족분들은 되려 밝고,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셔서 기억에 남는다.

다음엔 유가족분들이 포도박스와 선물을 챙겨서 놀러 오셨다. 직업으로써 느끼는 행복감과 성취감을 진하게 느꼈었다.

많은 사람들이 타투를 받는다. 검사나 의사, 60대 작가님 등등,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타투를 받으신다.

타투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평생 타투를 보며 잊고 싶지 않은 기억, 추억을 새기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한 인생의 기억과 추억을 다룬다는 것은 참 의미 있는 일이다. 이로 인해 나 자신이 특별해진다.

그래서 돈을 벌어도 헤프게 쓰지 않고, 모아서 더 좋은 잉크와 머신을 산다던가, 외국에 나가서 더 많이 배워오는데 쓴다.


윤조) 나는 동생과 조금 다르다.

동생은 기념과 의미에 초점을 맞췄다면, 내 타투는 대상의 표현에 있다.

나는 무대 미술을 오래 했다. 거의 4년을 했는데, 사회생활을 해 나가며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직업 중에 하나였다.

무대미술은 하나의 공간에 기억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대상을 공간화시킨다고 했을 때 추억이나 흔적을 새기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출에 의한 연상 기법에도 깊은 관련이 있다.

처음에는 타투를 하면서도 무대미술을 완전히 놓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타투와 무대미술이 연관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상을 이해하고 작업을 통해 대상이 생각나게 하는 것. 비슷한 맥락을 발견하고 나니 서로 다른 장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되려 두 장르의 이해를 도왔다.  

<타투이스트 윤조는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는 문신사이다>

우리는 한 장르를 고집하지 않는다. 타투를 받는 사람과 소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론 예술적인 방향으로 타투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는 본질을 조금 더 생각해봤다. 자신의 몸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타투를 한다는 데에는, 분명 이유 있지 않을까? 그 염원과 의지를 최대한 잘 그려내는 것. 공감 능력이 타투이스트의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면 이야기를 최대한 많이 하고, 그 생각과 작은 느낌까지도 공감하여 표현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장르만 고집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장르, 다양한 시도를 한다. 사람은 다 다르지 않은가? 사람마다 그려내고 싶은 것이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 장르만 고집하지 않고, 여러 장르를 작업하다 보면 어떠한 고객이 왔을 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공감하여 그려내는데 용이하다. 확장성이 있다.


나는 타투가 좋다. 작업은 즐겁지만, 모든 과정이 즐겁지는 않다.

타투를 받는 사람도, 타투를 하는 사람도 아프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다. 하지만 그 끝에서 느낄 수 있는 내적 만족감이 있다.

이겨냈다. 그려냈다. 하나의 타투가 완성될 쯤이면, 어느새 받는 사람과 하는 사람의 유대가 형성되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자신들의 타투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나" 

<타투이스트 최예지>

예지) 흔히 야쿠자 문신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레즈미"라는 장르를 주력으로 작업한다.

이레즈미에 대해서는 편견이 많다. 흔히 조폭이나 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위협감을 주기 위해서 타투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레즈미는 부적, 수호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방관 등 몸을 자주 쓰고 위험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외부로부터 위협을 보호하기 위한 의미로 이레즈미를 받는다. 몸 전체를 두르는 이레즈미는, 인내심을 가지고 몸에 새기는 갑옷이다.

문신의 성격상 조폭이나 야쿠자도 문신을 많이 받게 되었는데, 보이는 부분이 그러하다 보니 야쿠자 문신이라고 알려지고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 같다.

이레즈미는 일본의 전통 풍속화인 "유키요에"를 기본으로 한다. 유키요에는 고흐나 모네의 그림에도 등장하며, 모네는 유키요에를 수집하며 영감을 얻었다고도 한다.

유키요에의 도깨비 "한야"를 좋아하는데, 한야는 내면의 악을 억누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재 하나하나의 의미가 깊고, 내면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레즈미 호랑이 문신 : 타투이스트 최예지 작품>

이레즈미는 작업 기간이 정말 길다. 1년에 많으면 3번, 혹은 하나도 완성하지 못할 때도 있다.

체력적으로 정말 힘든 작업이다. 받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힘들다. 넓은 면적에 오랜 시간 문신을 받는 것이, 정말 아프다. 아픔을 참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도 많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성취감도 크다. 이레즈미 문신이 완성되면 자신을 이겨냈다는 희열을 느낀다. 인내. 이레즈미는 내면과의 싸움이다.

도깨비 한야는, 사실 타투가 그려지면서 생긴 인내심으로 자신의 악을 억누르는 힘을 길러주는 역할을 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이레즈미 타투를 작업할 때는, 수행하는 느낌을 받는다.  

<예지& 윤조 콜라보 : 뉴 재패니스 이레즈미>

한국 역사에서도 문신이 있었지만, 문신보다는 죄인에게 새겨지는 낙인의 느낌이 더 강하기 때문에 편견이 깨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다.

동양의 대표적인 문신이 이레즈미이지만, 전통적인 이레즈미는 무게감이 있고, 일본풍이 바로 느껴질 정도로 개성이 강하다.

현대의 흐름에 따라 "뉴 재패니즈"라는 장르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것에 벗어나서 디자인적인 면을 조금 더 추구하는 장르이다.


내가 바라보는 작업은 전통적인 이레즈미와 뉴 재패니즈가 적절히 믹스된 작업물이다.

의미는 담되, 고객들이 원하는 스타일을 세련되게 담아낼 수 있도록 새로운 공부와 도안 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서 밸런스가 맞춰진 이레즈미 또한 대중화될 수 있다고 믿고 있고, 실제로 그러한 사례가 요즘 많이 보인다.


<타투이스트 최윤조>

윤조) 나는 예지와 다르게 이레즈미 작업은 전혀 하지 않는다. 내 타투는 무대미술의 영감을 많이 받았다.

무대 미술은 다양한 방법의 예술을 포괄적으로 가지고 있다. 무대 미술을 할 때에 제작부터 철거, 세트 작업까지 했었는데 매력을 많이 느꼈다.

일단 재료의 한계가 없다. 상황에 따라 쓰레기도 재료가 되고, 하이퍼 리얼리즘 같은 리얼리티를 흉내내기 위해서 사용되는 재료도 한계가 없다.

사회생활 초년에 이러한 작업들이 기본이 되어서, 타투에서도 조금 도전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내 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장르에 집중하기보다는, 언어적, 인문학적으로 접근을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슬피우는 꽃 : 타투이스트 최윤조 작품>

아까도 말했지만 내 작업의 영감은 대부분 예지에게서 얻는다. 예지는 자유롭지만 슬픈 감정에서부터 본인이 표현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을 표현한 작업물이다. "슬피 우는 꽃"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슬퍼서 우는 꽃'과 '피우는 꽃'의 의미를 담고 있다. 동생은 아름다운 꽃이다. 슬픈 꽃 같다. 슬퍼야지 피는 꽃 같다. 그래서 슬피 우는 꽃이라 했다.

<수믄달 : 타투이스트 최윤조>

예지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에게 새겨준 타투이다. 이 친구는 부끄러움이 많았는데, 숫기가 없어 숨어버린 달이 생각났다.

또 달은 밀물과 썰물의 주체 아닌가, 달이 되어 밀물과 썰물의 수문을 열었으면, 부끄러워 하지만 주체적으로 자신의 길을 잘 열어나갔으면 하는 마음에서 "숨은 달" 그리고 "수문달" 중의적인 표현으로 "수믄달"이라고 표현했다.  

<살아숨쉬다 : 한글 트라이벌, 타투이스트 최윤조 작품>

얼핏 보면 비둘기같이 생긴 이 타투의 이름은 "살아 숨 쉬다"이다.

트라이벌이라는 장르가 있는데, 마오리의 뾰족하면서도 강한 전통 타투 기법이다. 한글로 트라이벌의 강인한 느낌을 내고 싶었다. 참고로 최초의 한글 트라이벌 작품이다.

최근에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다. 타투를 할 때는 전사 작업이라 하여 밑그림을 먹지에 찍어서 그리는데,

먹을 갈아 실제 몸 위에 드로잉을 하고, 전사 작업 없이 그대로 새기는 작업이다. 이 방식은 먹 뿌리기 기법도 그대로 연출이 된다.

동생 몸에도 하나 있다.


이러한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타투를 받는 사람과의 유대와 이해가 정말 중요하다.

내 작업의 관권은, "상대방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했는가."이다.


"우사단길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나?"


윤조) 아티스트 코리아라는 방송이 있었는데, 팬이었다. 정려원님이 MC였고, 여러 명의 작가들이 대결을 해서 최후의 1인이 남는 프로그램이었다.

특히 홍성용 작가님을 좋아했는데, 타투라는 매체로 예술 작업을 하신다는 것이 아닌가. 무조건 우리가 받아야겠다 생각을 했고, 우리가 받았다.

우리에 대한 느낌을 타투로 표현해주셨다. 실제 우리 몸에 새겨져 있는데, 같지만 다른, 다르지만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래 홍성용 작가님은 파주에서 작업하셨었는데, 이태원으로 옮기셨다고 해서 놀러 왔었다.

작가님이 혹시 작업실을 옮길 생각이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작가님께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았다. 이 기회를 빌어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우린 작가님을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른다. 작가님 덕분에 공간도 얻게 되었고, 무엇보다 좋은 사람을 많이 알게 되었다.

덕분에 "정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경쟁시대 아닌가, 저기 길 건너편만 가도 그런 모습에 복잡하고 아프다.

하지만 이곳 우사단은 나, 너라는 개념보다 우리라는 느낌이 든다.


저번 매거진에서 37.2 사장님은 길이 사람을 불렀다고 했나?

우린 길에 있는 사람이 우리를 불렀다.

따지고 보면 길이 부른 거다. 길로 인해서 사람이 모였으니까.


"공간이 참 느낌 있다.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  

아티스트 코리아 멤버이셨던 림수미 작가님이 공간을 만들어주셨다.

작가님은 공간에 대상의 스토리, 기억, 흔적을 담는 작업을 하신다. 도깨비 시장에 있는 "음"도 작가님이 작업하신 것.

작가님이 외국 여행을 많이 다니시는데, 여행에서 수집한 자료로 벽면에 콜라주로 작업을 해 주셨다.

아버지가 음악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티스트 앨범도 붙여주셨다.  

<인디타투 작업실 한켠>

공간 구석구석에 우리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디테일한 작업들이 있다. 특히 이 문구가 맘에 든다. 

Made by daddy, Completed by eachother.  

<최예지 작업실 벽>

여긴 예지의 작업공간인데, 나는 이 공간을 인테리어, 작업공간이라기보다 하나의 작품으로 받아들인다.

Although I love you,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널 사랑해. 분홍색으로 표시된 숫자는 우리가 싸운 횟수를 의미한다. 더 안 늘어났으면 좋겠다.  

<작업실 옆 면에 긴 구멍이 뚫려있었다>

 

<구멍을 통해 자매가 마주볼 수 있다>

서로의 작업실에 길쭉한 구멍이 뚫려있다. 그만 좀 싸우고 이야기 좀 하라는 의미에서 만들어 주셨다. 

<왼쪽부터 타투이스트 최예지,최윤조>

이곳은 고양이 방이다. 인디타투의 고양이 이름은 "룰루"와 "랄라". 현관에서 고양이 방이 보이게 설계되었다. 

<타투 작업실>

타투 작업을 진행하는 곳이다. 림수미 작가님의 작업은 "아트 테리어"라고 한다.

여기저기 보이는 선반, 조명, 구조물 등은 새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원래 이 집에 있던 물건들을 소재로 사용한 것이다.

<왼쪽부터 최예지, 최윤조>
<왼쪽부터 최예지, 최윤조>

"마지막으로 편견이나 힘든 점에 대해서 묻고 싶다."


우사) 처음 타투를 하게 되었을 때, 부모님의 반대는 심하지 않았나.

윤조) 부모님. 싫어하셨지, 공교롭게도 아버지 양 팔에 바늘 문신이 있었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우리가 이걸 하는데, 어쩔 수 없다" 이야기를 하니. "어쩔 수 없군." 하고 승낙하셨다. 아버지는 드러머 활동을 하셨다.

타투는 누구나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연필을 들듯이, 수채화를 그리고 싶으면 물감을 칠하듯이,

타투도 표현하는 기법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위생관념 철저히 지키고, 자기 자신에게 허락을 받았다면, 조금은 특별한 자신의 이야기와 영감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줬으면 한다.  

예지) 안산에서 타투를 시작했다. 개업을 하고 전단지를 돌리는데,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우리 전단지를 발견했던 기억이 난다.

우사단으로 옮기면서 우리가 간판을 달게 되었는데, 아. 이제 우리가 아래가 아니라 위를 보게 되었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하면 더 멋진 타투이스트로 성장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말을 하고 싶다. 타투는 캔버스가 아닌 몸 위에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과 함께 늙어간다. 색감도 바래고, 문신에 주름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문신을 하기 전에 온전히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으면 좋겠다. 거울을 볼 때 항상 예쁘지만은 않지 않은가. 문신도 자신의 일부이며 자신의 기억, 추억이다.

색이 조금 바랬다고 다른 문신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래진 타투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고양이 룰루>

윤조) 우리는 아낙림이라는 여성 타투이스트 크루와 함께하고 있다.

부정적인 인식으로써 타투가 아니라, 아름답고 예술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타투이스트들끼리의 교류가 아니라 타투를 모르는 일반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우리의 작업들이 이상하고 나쁜 작업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활동이다.

친근하고 선한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다. 위안부 나눔의 집, 유기견 센터 기부행사 등 봉사도 하고, 타투가 아닌 그림 작업으로 전시도 하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통해 타투를 알린다.

방식이 굳이 타투가 아니어도 괜찮다. 방법과 소재가 다를 뿐이지 우리가 하는 행동은 자신의 생각과 영감을 표현하는 것 아닌가.

해외 타투문화를 보면, 부러운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우리는 이렇게 하나씩 우리 영역을 만들어 가고 있다.

한국 타투 역사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편견의 땅에서도 다음 타투 세대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다.


언제 시간이 지나갔는지, 하늘은 어두워지고, 인터뷰를 시작한 지 장장 4시간이 지나있었다.

편견의 편견을 깼다고 해야 하나, 자세히 보니 예뻤다. 특히 타투가 그랬다.

둘. 그 작은 체구에서 의지와 진리의 단어가 흘러나왔다. 사람으로서 표현하고 싶은 원초적인 본능. 공감과 사회의 영역까지, 작은 타투 안에 인생이 담겨있었다.


그랬다. 그녀들의 도화지가 제일 비쌌다.


인디타투 타투이스트 인스타그램

윤조) https://www.instagram.com/smile_yoonjo/

에지) https://www.instagram.com/yeonyeji/


인디타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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