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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iHyuk Feb 01. 2021

재난, 생존, 기억

2020 길위의 인문학 - <재난의 상상, 포스트 펜데믹의 사회학>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우리가 기억하는 최초의 재난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마다 살아온 시대와 기억이 달라 섣부르게 재단할 수 없지만 역사에서 재난은 늘 인간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각 국가마다 홍수와 관련된 공통된 신화가 존재할만큼 재난에 대한 공포는 존재해왔다. 건국신화, 혹은 문명의 발흥을 재난에 대한 극복에서 찾으려는 현상은 국가의 경계를 넘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재난-극복-건국이라는 일종의 신화적 포지션이 근대 이후 일종의 문화텍스트로 전이되는 과정은 사뭇 흥미롭다. 재난을 극복하는 초인적인 존재의 등장이 주목받던 시대를 지나 재난 그 자체에 대한 사유로의 전환이 장르의 새로운 중심이 된 것이다. 그 이면에는 재난 이후 정상성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감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글로벌한 질서를 구축하면서 생존이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위협받고 있다는 무의식적인 반증이기도 하다.

빛으로 상징화된 근대적 합리성의 세계 이면에 드리운 어둠에 대한 발견은 결국 정상성에 대한 기준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재난의 발현과 함께 비로소 밖으로 드러나는 감정들, 이 감정들은 단순히 위기상황에 느껴지는 공포와 불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재난이 불러일으키는 위기의 감각이 특정한 기억을 환기시킨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재난서사는 완벽하게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을 실현시키는 한편 일상에서는 감지할 수 없는 특정한 이면을 보고자 하는 바람을 통해 세계의 상을 다시 구축한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재난의 재현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재난을 통해서만 소환되는 특정한 감정들의 질감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일 것이다. 완벽한 가상을 추구하는 판타지물이 주변 장르로 취급받는 한국의 현실에서 재난물이 우회로를 위해 마련한 것은 실화를 통한 리얼리티의 확보였다. 재난서사를 현실의 그것으로 등치시켜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이 한국의 재난물이 주로 취하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실재의 기억이 가상을 침범하여 새로운 구조를 고안해낸 셈이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재난물이 현대사의 주요 장면에서 미처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들을 재구성되는 양상은 흥미롭다. 이 과정은 재난서사를 스펙터클의 재현이나 현실에 대한 도피에서 한 걸음 나아간 새로운 사유로 읽어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때문에 식민지와 전쟁, 독재를 거쳐온 한국의 역사적 기억은 트라우마를 거치지 않고서는 재현될 수 없다. 어찌되었든 재난물이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기억과의 접촉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생존이 남긴 트라우마였다. 오카 마리가 지적했듯이 과거의 트라우마적 기억은 생존자들의 삶에 남아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다. 이 트라우마를 해소하는 방법은 언어화를 통한 자기서사를 재구축하는 것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재난물들이 마주친 기억은 미처 언어화되지 못한 트라우마에 대한 플래쉬백이자 자기고백에 가깝다. 완벽한 가정법의 세계에서 역설적이게도 현실은 새롭게 발견된다. 그런 점에서 재난이라는 비현실적 사건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단절’과 ‘고립’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 대응은 주목해야할 현상이다.

  합리적인 선택이 재난 속에서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은 비현실적인 것이 된 지 오래다. 우리는 현실의 재난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한다. 기억해야할 것은 유토피아의 상상이 무너진 세계에서 생존이 취하는 독특한 윤리의 형태에 주목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절과 고립은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에 공동체의 실패가 가시화된 세계에서 주체가 선택할 수 있는 지극히 합리적인 대응방식이다. 비논리가 합리성으로 역전되는 재난의 비상상태에서 유일하게 주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생존의 감각이다.

  주지했다시피 재난서사에서 생존의 문제는 새로운 윤리의 구축과도 맞닿아있다. 철저하게 현실의 질서를 따라오던 사람들이 어느 날 맥락없이 세계의 종말을 꿈꾸는 현상을 예외적인 일탈로 치부하는 어렵다. 주지하다시피 재난물은 관습적으로 사회시스템의 마비를 재난의 시작점으로 잡는다. 이 가운데에서 생존자들은 이동과 통신의 불능에 빠지게 된다. 자연스럽게 재난물의 주체들은 자신과 인접한 타인의 관계에 집착하게 되고 그 가운데에서 생존의 방법론을 탐색한다. 이 상황을 윤리의 붕괴에 따른 불쾌감 어린 장면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재난에 대처하는 새로운 윤리적 실험으로 볼 필요가 있다.

    아즈마 히로키가 지적하듯이 현대의 콘텐츠 소비의 맥락에서 소비자들이 아주 먼 것(세계의 종말)과 아주 가까운 것(관계)만 리얼한 것을 인식하는 현상은 주목할만하다. 세계의 종말에 마주한 주체가 인식하는 것은 (주로 연애감정을 가진)관계의 맥락이다. 이 거리를 메우는 디테일을 사회라고 한다면 현대의 소비자들은 이 사회를 간단하게 생략한 채로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상적인 비약이 가득한 소비형태는 먼 것과 가까운 것을 연결(설명)하는 중간단계가 바로 언어로 된 상징계가 더 이상 기능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더 이상 주체가 세계를 해석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을 고려할 때 주체가 가진 ‘윤리의 위치’가 이동했다는 아즈마 히로키의 분석은 탁월하다. 사회를 구축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거리감의 소실은 사회를 지탱하는 윤리의 불능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사회의 윤리가 무용함을 깨달은 인간들이 상상하는 세계는 언어화 과정을 거쳐 가시화될 수 없기 때문에 종말의 형태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재난의 윤리학’이 대두하는 풍경은 콘텐츠의 관습에 근거한 소비를 넘어 지금 여기의 세계를 가장 잘 재현해낸 것이기도 하다. 기실 재난물을 소비하는 소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존의 서사에서 리얼리티를 느낄 수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재난 상황에서 사람이 사람을 버리는, 인간상실의 시대를 직접 목격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붕괴 잔해 속에서 명품옷을 꺼내며 웃는 사람들, 승객들을 버리고 먼저 탈출해버린 선원들, 이들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끝을 눈 앞에서 목격해버렸다. 문제는 이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매순간 되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당연하게도 기억의 회귀는 잊을 수 없는 상처와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세계의 끝을 목격한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세계의 끝을 상상하는 재난물에서 느껴지는 특정한 감정적 반응들로 단절과 고립을 이해하고자 한다. 재난의 관습적 수용을 넘어 특정한 서사구조에 반응하는 수용자들의 공통적인 감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재난물이 동반하는 부재로서의 공동체와 없음으로의 세계는 주체가 현실을 인식하는 특정한 정서구조를 형성하는 동시에 이에 대응하는 새로운 윤리적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재난의 불온한 상상이 증명하는 것은 일상과 현실의 붕괴가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감응하고 있다는 것과 이에 따른 새로운 윤리학의 구축을 찾아가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단절된 세계의 어른들     


“1996년 12월 31일, 열여덟살을 하루 앞둔 그날

당산역과 합정역 사이를 잇는 노쇠한 철길은 끊어졌다.”

윤필, <지하철도의 밤>(창비, 2015)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라면 아무래도 90년대를 뺴놓을 수 없다. 경제개발의 정점에서 맞이한 민주화로의 변화까지 험난한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을 기꺼이 맞이했을 것이다. ‘잘 살아보세’가 현실이 된 시점에서 희망과 진보가 눈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진 경험은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90년대 중반에만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씨랜드 사고가 순차적으로 일어나며 근대화된 국가의 전근대적인 재난을 사람들은 목격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닐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은 외환위기라는 사회적 재난 앞에서 현실이 되어버렸다.

앞의 인용문은 윤필 작가의 웹툰 <지하철도의 밤>의 한 부분이다. <지하철도의 밤>은 소심한 고등학생 석규가 2호선에서 혼혈 노숙인 넬라를 만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서사구조만을 따지자면 소년이 어른으로 변해가는 성장서사의 외형을 취하고 있는 <지하철도의 밤>은 1996년에 일어난 그 날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고등학생 석규는 2호선 순환열차에서 <은하철도 999>의 메텔을 닮은 넬라를 만나게 된다. 평범하게 이어지던 소년의 삶이 변한 것은 넬라를 관찰하면서 부터였다. 학교에서 들리는 지저분한 소문에 분노한 석규가 노숙자인 혼혈아 넬라를 따라 2호선에 몸을 실으면서 이야기는 변화하게 된다.

서울을 끝없이 순환하는 2호선의 이미지는 미야자와 겐지의 소설 <은하철도의 밤>에서 우주를 운항하는 은하철도의 그것과는 다르다. 우주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은하철도와 달리 어두운 지하에서 노숙자와 취객, 부랑자들이 무한히 탑승하는 서울의 2호선은 같은 자리를 반복적으로 운행하는 순환선에 불과하다. 현실의 지하철이 가지는 의미들은 석규가 자신을 둘러싼 서울의 풍경을 해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지하철은 도시화의 상징이다. 동시에 도시로부터 배제된 불쾌한 존재들이 밤을 보내기 위한 공간이다. 말하자면 2호선은 서울의 빛과 그림자를 내재하고 있는 일종의 거대한 장소에 가깝다.

    석규가 선택한 성장에 대한 거부와 넬라가 선택한 거리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 모든 삶을 끌어안고 있는 1996년의 2호선이 가지는 의미는 중요하다. 한국전쟁 이후 50여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위를 바라보며 성장해온 서울은 근대화와 민주화의 교차점에서 당시 전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성수대교 붕괴(1994년)와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을 사람들에게 직접 목격하게 했음에도 끊임없이 서울을 순환하는 2호선의 존재는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풍경을 가능하게 만든다. 멈추지 않는 2호선의 순환은 근대화 이후 대도시 서울을 움직이는 동력이자 한편으로 서울에 드리워있는 어둠에 대한 물질적인 비유다.  

    <지하철도의 밤>이 모티프로 삼고 있는 미야자와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은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나아가는 제국의 일로에서 소년이 현실을 환상에 기대어 재해석하는 모습은 환상이 아니고서는 현실의 폭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지하철도의 밤>은 100여년 전의 소년이 그러했듯 근대화된 세계의 중심에서 정지해버린 한 소년의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펼쳐내고 있다.

    <지하철도의 밤> 역시 석규의 성장을 멈추게 하고 2호선의 순환을 멈추게 만들었던 외상에 대한 기억, 즉 트라우마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2호선과 넬라와 석규가 가지고 있는 각각의 기억이 언어화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한국전쟁의 사산아였던 넬라와 서울의 붕괴를 직접 목격했던 석규, 그리고 이 모든 기억을 안고 달리는 서울의 2호선은 순환을 반복할 뿐 성장이나 진보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석규가 겪었던 비현실적인 가출이야기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켜 무의미한 존재로 남으려 했던 석규의 미성숙한 내면을 표현한 것이다.

    석규가 노숙생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넬라가 어머니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서다. 양공주의 삷을 살다 치매에 걸린 노숙자로 나타난 어머니를 따라가는 넬라의 뒷모습을 보며 석규는 넬라와 작별을 고하게 된다. 석규가 2호선을 떠나는 또 하나의 계기는 당산철교의 철거다. 성수대교 붕괴로 인해 안전성 검사를 받던 서울의 철교들 중 당산철교는 그 위험성이 지적되어 1996년 재시공에 들어갔다. 끝없이 서울을 순환하는 2호선은 당산 철교 철거로 인해 멈추게 되었고 아득하게 순환만을 고집하던 소년은 다시 어른들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이 웹툰은 성인이 된 석규의 기억에서 시작된 일종의 자서전식 구성을 띄고 있다. 어른이 된 시점에서 석규가 과거를 회상하는 웹툰의 구성은 기억과 함께 돌아오는 어떤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1994년 성수대교 붕괴를 목격한 소년이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지만 끝내 재난을 내면화하여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 성장 자체가 일종의 트라우마에 대한 대응과 극복에 대한 우화로 <지하철도의 밤>은 어른이 된 석규에 의해 쓰여진 셈이다. 결국 <지하철도의 밤>은 개인이 겪었던 재난의 기억이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보편적인 트라우마로 자리 잡게 되는 현실과 상상을 교차하는 지점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90년대의 기억을 잔혹한 미제사건에서 끌어와 재해석한 드라마 <시그널>의 경우에도 이러한 시각은 유효하다. 과거의 형사와 현재의 프로파일러가 낡은 무전기를 통해 연결되어 한국의 대표적인 미제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의 시그널은 198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했던 사건들을 다시 재현한다.      


박해영 형사님, 경기 남부 연쇄 살인사건 범인 잡았어요.

이재한 어, 어떻게, 어떻게 잡은거죠? 증거가 나왔습니까? 뭡니까? 어딨어요?

박해영 그때는 안돼요. 형사님이 발견했어도 그때의 과학감식 기술로는 범인을 잡을 수 없습니다.

<시그널>(tvN, 2016) 4회     


    흥미롭게도 <시그널>이 추구하는 집중하는 정서는 사건의 잔혹함이나 추리의 쾌감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조수사로 경기 남부 연쇄 살인사건(화성 연쇄 살인사건)에서  범인은 체포했지만 정작 80년대 당시의 사건 발생은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재한(조진웅)이 짝사랑하던 여성이 살해당한 사실까지는 바뀌지 않는다. 울먹이며 범인의 존재를 묻는 이재한에게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박해영(이재훈)의 무력함은 판타지로도 해소될 수 없는 현실의 짙은 상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위의 인용문이다. 이 장면 뒤로 함께 가기로 했던 극장에 앉아 코미디 영화를 보며 홀로 흐느끼는 이재한의 모습은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정서가 정의의 성취나 연쇄살인범에 대한 복수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신동훈 우리 여진이 어딨어? 여진이 어딨어!

오경태 죽어가는 딸을 보는 느낌이 어때?

신동훈 왜 우리한테 이래! 왜!

오경태 너도 그랬잖아. 여기 한영대교에서. 그러니까 너도 한 번 똑같이 느껴봐. 딸이 죽어가는 데 아무것도 못하는 그 심정.

<시그널>(tvN, 2016) 6회     


    대도 오경태가 납치범으로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는 성수대교에서 모티프를 딴 한영대교 붕괴로 인해 딸을 잃은 두 아버지가 각각 가해자와 피해자로 등장한다. 오경태는 절도 사건의 누명을 쓰고 호송되던 중 한영대교 붕괴로 인해 버스에 탄 딸을 눈 앞에서 잃게 된다. 수감생활을 마친 오경태는 같은 시각 구급대원을 재촉해 자신의 딸을 먼저 구한 신동훈에게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납치사건을 계획하는 것이 이 에피소드의 핵심내용이다. 결과적으로 오경태를 막기 위해 박해영이 과거에 개입하면서 현재는 바뀌지만 한영대교는 무너졌고 오경태는 다른 방식으로 신동훈을 살해하고 감옥에서 죽어간다.

    이 에피소드는 대도 조세형 사건과 성수대교 붕괴를 모티프로 하여 진양시 개발을 둘러싼 비리사건으로 발전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에피소드 후반에 이루어진 박해영의 개입은 두 사건의 연결 고리를 밝혀내고 오경태가 무죄로 풀려나는 새로운 시간대를 만들어내지만 한영대교가 붕괴했다는 근원적인 사고까지는 막지 못한다. 어떤 개입을 해도 피해자들이 서로의 가해자가 되고야 마는 비극적인 상황은 다리의 단절이 가져온 근원적인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작가의 고백과도 같다.


    사회적 재난이 개인의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 아득한 정서야말로 <시그널>을 통해 지금 여기 한국의 시청자들이 공유하는 특정한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시그널>에서 현재의 형사로 나오는 박해영은 문제없이 자라온 젊은 경찰처럼 보이지만 삶의 굴절점에서 강력범죄라는 사회적 재난을 통과하며 성장한 미성숙한 어른이다. <시그널>의 처음과 마지막 사건인 90년대의 김윤정 유괴 사건, 2000년대의 인주시 여고생 성폭행 사건 등은 박해영의 성장기를 굴절시켰단 사건들이다. 이 사건들의 배후에 진양시 개발 비리가 개입되어 있었고 이를 주도했던 자가 유력한 대선 후보라는 사실은 극적이면서도 현실과 먼 거리를 두고 있지 않다. “20년 후에는 뭐라도 달라졌겠죠”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재한의 교과서같은 대사가 어떤 울림을 자아낸다면 아마도 <시그널>이 보여준 미제사건의 기억들이 몰고 온 감정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목격자이며 동시에 피해자인 셈이다.

    재난의 기억을 다룬 두 편의 텍스트를 살펴보며 우리는 이제 공통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적 재난을 목격한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개발과 성장의 욕망이 마주친 세계의 붕괴는 필연적이었다. 희망의 시간을 지나 개발과 성장의 붕괴가 가시화된 2010년대에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것은 기억이었다.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사회적 재난이 개인의 재난으로 치환되는 세계, 이 세계야말로 지금 여기를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90년대를 지나온 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가지는 트라우마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재난이라는 특정한 키워드를 경유할 때만 비로소 보이는 이 트라우마는 작가들은 물론 같은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재난의 트라우마를 개인의 것으로 내면화시켜 재현하려는 작가들의 무의식은 쉽게 넘겨버릴 수 없다.           


고공 위에 선 아이들     


나는 다시 기다려야 했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 속눈썹을 깜빡이며 달무리 진 밤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러곤 파랗게 질린 입술을 덜덜 떨며, 조그맣게 중얼댔다.

“누군가 올 거야.”

칼바람이 불자 골리앗 크레인이 휘청휘청 흔들렸다.

김애란, 「물 속 골리앗」(문학과지성사, 2012)      


    김애란의 단편소설 「물 속 골리앗」에서는 폭우로 인해 고립된 모녀가 나온다. 이제 갓 사춘기를 지나는 소녀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철거를 앞둔 아파트에서 삶도 죽음도 아닌 미증유의 시간에 갇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는 그치지 않고 어머니는 숨이 잦아들었고 소녀는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크레인 위로 올라가 끊임없이 중얼댄다.

    서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이 단편소설은 철거예정으로 인해 아무도 남지 않은 가상의 아파트에 남은 한 소녀에 집중하고 있다. 독특하게도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소녀와 어머니가 전부인데 소설의 중반부에 어머니가 기아와 정신이상으로 사망하게 되며 소설을 이끌어가는 것은 대부분 소녀이다. 모두가 떠난 낡은 아파트에 남아 허기와 함께 사회적 고립에 빠진 소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한다. 타워크레인에서 실족사한 아버지와 폭우에 갇혀 결국 숨을 거둔 어머니와 상관없이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폭우가 끝내 마을을 집어삼키자 어머니의 시신을 싣고 아버지의 방문을 뜯어 배를 만든 소녀는 물살에 떠내려가다 크레인 위에서 버티기 시작한다. 이처럼 「물 속 골리앗」은 철거예정 아파트에 남은 소녀의 시선으로 재난을 바라본다. 부모의 죽음, 멈추지 않는 비, 허기를 느끼며 간신히 크레인에서 버티는 소녀는 재난 속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작은 소녀를 형상화해낸다.   

    폭우에 의한 재난을 다룬 「물 속 골리앗」은 극한상황에 내던져진 작은 소녀의 생존기처럼 읽혀진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재난의 상상력을 의도적으로 소거하고 읽어보면 이 소설을 잇는 사건은 두 가지다. 아버지의 실족사와 어머니의 아사는 21세기에도 한국에서 계속되는 해고 노동자와 철거민의 처절한 현실을 압축적으로 상징화하고 있다.      


새벽이 되자 양팔의 힘이 풀리더니 급기야 쥐가 났다. 나는 크레인 기둥에 고개를 처박으며 흐느꼈다. 왜 나를 남겨두신 거냐고. 왜 나만 살려두신 거냐고. 이건 방주가 아니라 형틀이라고. 제발 멈추시라고……

김애란, 「물 속 골리앗」     


    부모를 잃고 폭우에 떠밀려 내려간 소녀에게 크레인 위는 춥고 가혹했다. 존재할지도 모르는 신에게 작게 흐느끼며 원망을 내뱉는 소녀의 한숨은 너무나 미약한 것이었다. 자의에 의해(하지만 그 자의는 폭우로 인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크레인 위로 올라가 소녀가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 중 가장 큰 감정은 아마도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철거 예정 아파트에서 크레인으로 장소만 바뀌었을 뿐 소녀는 계속해서 고립되어 있었다.

    「물 속 골리앗」이 재현하는 재난의 상상은 한국의 현실을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2000년대 이후 크레인 위에서 많은 해고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김진숙 위원은 309일을 크레인 위에서 버티며 “살아서 두 발로 크레인을 걸어 내려오겠다.”라는 약속을 겨우 지켰다. 누군가 올라와 손을 잡아줄 것이라는 간절한 희망 하나만으로 버티던 크레인의 희망은 지금 얼마나 달라졌을까. 21세기의 도시 한 복판에서 철거 갈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집과 목숨을 잃고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이 기억은 한국전쟁 이후 개발과 성장이라는 달콤한 미명 아래 집과 삶을 잃고 떠돌아야만 했던 철거민과 노동자의 역사에 닿아있다.     소녀의 뒤로 펼쳐지는 까만 밤하늘은 개인의 고립과 사회적 고립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김애란만의 해석일 따름이다. 「물 속 골리앗」의 소녀가 비참하게 버티며 되뇌이는 한 줄의 희망은 아무런 힘이 없지만 그럼에도 크레인 위에서의 버팀에서 우리는 고립을 뛰어넘는 연결의 경험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웹툰 <지금 우리 학교는>(주동근, 2009~2011)은 좀비 아포칼립스가 벌어진 한 고등학교를 무대로 하고 있다. 2009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이 작품은 좀비라는 생소한 주제를 정통장르물의 형태로 다루고 있단 점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작품이었지만 이 웹툰이 완결 후에야 주목받을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경기도에 위치한 가상의 도시 효산시에서 일어난 좀비 팬데믹을 다루고 있다. 효산고등학교에서 외계의 바이러스로 인한 좀비가 발견되며 학교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학생과 교사들이 감염되어 좀비로 변하는 와중에 아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한다. 한국에서 좀비물이 생소한 장르로 치부받던 시절 연재를 시작한 이 작품은 여러 명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며 좀비 팬데믹에 빠진 공간 자체를 웹툰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일상적인 학교가 폐쇄되고 나 자신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아이들의 선택이 <지금 우리 학교는>의 플롯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이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 자체의 목격이 곧 웹툰의 내용이고 장르의 재미를 야기하는 형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잔혹한 장면이나 성적인 묘사는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좀비 팬데믹이 가져온 생존의 공간과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 가져오는 특정한 정서야말로 <지금 우리 학교는>의 주인공인 셈이다.

    문제는 이 작품이 원래의 의도를 초과하며 해석의 지점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좀비 팬데믹이 발병한 효산시는 경기도에 위치한 가상의 도시다. 특별한 경제력을 가진 도시도 아니고 아이들 역시 평범한 고등학생에 불과하다. 좀비 팬데믹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정부는 효산시를 봉인하고 효산고등학교의 폭격을 검토한다. 팬데믹 상황을 가정한다면 지극히 정상적인 결정처럼 보이는 정부의 선택은 학교에 살아남은 아이들에게는 사형선고와 같다. 결국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과 바이러스를 해결하기 위해 봉쇄와 폭격이라는 다소 과격한 조치는

    2009년에 연재를 시작한 <지금 우리 학교는>은 좀비 팬데믹이라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장르물이지만 현실의 재난 상황을 교차하는 지점을 재현하고 있다. 봉쇄령에 따라 학교 안에 버려진 아이들은 좀비가 된 친구들과 아이들을 밟고 살아나가려는 어른들의 이기심이 맞물리며 좀비와 인간, 그리고 외부와 고립된다. 학교라는 공간이 환기하는 폭력의 이미지는 차치하더라도 재난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고립은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얼마나 잔인한지를 보여준다. 독자들은 정부의 선택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벌어지는 탈일상의 이미지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평범한 좀비물처럼 보이는 이 텍스트가 새롭게 해석될 가능성은 공교롭게도 몇 년 후 일어난 2014년 세월호 사건을 환기시킨다는 사실은 가볍게 넘어갈 수 없다. 경기도에 위치한 가상도시 효산시와 그 안에 물리적·사회적으로 고립된 아이들의 이미지는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겪었던 절망적인 상황과 기묘하게 닮아있다. 세월호 이후 거리로 내몰린 유족들과 트라우마에 빠진 생존자들, 그리고 안산이라는 도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적·심리적 고립은 이 사건이 비극적인 사고를 넘어 세월호가 사회적인 재난임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 학교는>의 원래 의도와 달리 어쩔수 없이 떠오르는 재난의 기억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한 것으로 만들어낸다. 서로가 서로를 감염시키는 와중에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에게 접근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 안에서 물리적인 고립뿐만 아니라 어른들로부터 버려졌다는 절망에 대한 보고서로 이 웹툰을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안에 잠재된 트라우마의 가능성을 끄집어낸다. 학교에 대한 기억을 넘어 수능점수를 볼모로 전쟁터로 내몰리는 아이들(<방과 후 전쟁활동>(하일권, 2012~2013)), 지진으로 인한 붕괴에서 서로를 죽이며 탈출하는 아이들(<유쾌한 왕따>(김숭늉, 2014~2016)) 등 지금 아이들이 등떠밀린 세계는 어떤 세계였을까. 재난물을 둘러싼 학교와 아이들의 고립과 그 고립을 둘러싼 잔혹한 상상력은 결코 과하지 않다.           


재난의 시대, 일상의 종언     


아직도 엄마의 차가운 손을 만졌던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어요. 엠뷸런스 안에 고요하게 누워 있는 시신에서는 바다 냄새, 그리고 소독약 냄새가 났어요. 저는 그 냄새들을 맡으면서 더듬더듬 엄마의 손을 만졌지만, 그 손에서는 돌덩이 같은 촉감만이 느껴질 뿐이었어요. 그 순간 저는 엄마가 말하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애야, 모든 것이 끝났다.”

이만영, 「두 개의 시간 – 1993년 10월과 2014년 4월」     


    이제 생존의 기억을 짚어내는 것으로 짧은 글을 마쳐보려 한다. 90년대 수많은 사건들이 재난으로 통칭되는 것은 그 시간이 가지는 트라우마적인 성격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트라우마를 빼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역사의 절반만을 이해하는 것과 다름없다. 재난이라는 가상의 설정이 현실의 리얼리티와 비교할 때 결코 힘을 잃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만영 평론가의 글은 몇 번이고 곱씹어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만영 평론가의 「두 개의 시간 – 1993년 10월과 2014년 4월」은 잊을 수 없는 두 사건을 하나의 시간에 교차시킨 글이다. 씨랜드 사건과 세월호 사건이라는 각기 다른 재난이 가져온 상처를 담담하게 짚어내는 이 글은 격앙된 표현이나 직접적인 토로없이 그저 엄마에게 말을 건네는 편지의 형식을 빌고 있다. 두 사건은 배의 침몰이라는 사건의 공통점을 제외한다면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들이다. 그럼에도 두 사건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성장과 개발의 정점에 서 있던 한국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던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안온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누군가에겐 상처의 기록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재난이라는 가상의 상황이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은 오히려 리얼리티에 기반하고 있었다.

    일상의 안온함을 지탱하고 있는 현실이 고통과 폭력으로 가득한 유약한 기반 위에 있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다소 가벼운 제목으로 시작한 이 글은 결국 재난의 기억이 일상을 침범하는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기도 하다. 모두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이 실상 연약한 지반 위에 놓여있는 것이며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약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글은 <지하철도의 밤>, <시그널>, 「물 속 골리앗」, <지금 우리 학교는>은 한국의 문화적 맥락에서 재난이 가지는 의미에 집중했다. 많은 텍스트를 돌아왔지만 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한국에서 재난이 대중적으로 수용되는 맥락이었다. 공교롭게도 재난 앞에 선 인간들이 느꼈던 공포의 기억이 지금 우리에겐 트라우마로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절과 고립이라는 재난 앞에 선 인간의 반응은 보편을 넘어 한국이라는 로컬의 맥락을 경유해야만 해석 가능한 상처의 기록인 셈이다.

    짧은 글을 마치며 우리가 다소 거칠게 단락을 넘어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픽션으로 재구축된 가상의 세계가 리얼리티를 얻고 현실 속에서 다시 생명력을 얻기까지 우리가 돌아와야만 했던 기억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만영 평론가가 건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그때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중첩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경험으로 이 글을 끝내려 했다. 하고 싶은 말들과 미처 언어화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재난이 불러일으킨 불온한 상상력은 꽤 오래 계속될 것이다.



이 글은 출판문화진흥원 주최로 진행된 2020년 길위의 인문학 중 <재난의 상상, 포스트 펜데믹의 사회학>에 실린 글입니다.  20220 길위의 인문학 - <재난의 상상, 포스트 펜데믹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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