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보같이, 꽃이름만 묻다.
어디선가 아련한 여가수의 음악이 들려온다.
만약에 니가 간다면 니가 떠나간다면 / 널 어떻게 보내야 할지 자꾸 겁이 나는걸 / 내가 바보같아서.....
사랑한다 하지 못하는 건 아마도 / 만남 뒤에 기다리는 아픔에 / 슬픈 나날들이/ 두려워서 인가봐.......
- 태연, <만약에> 중
'여기 어디지?'
소파에 앉아 졸리다는 생각을 하며 깜빡 졸았던 생각이 어렴풋이 난다.
마루 바닥이 아닌 흙더미 땅 위에 서 있는 내 구두위를 쳐다보면서 두리번거린다. 갑자기 달라진 주위에 놀라긴 하지만, 낯설지 않은 풍경에 겁은 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 곳은, 매주 오는 엄마 집 정원이다.
강원도 철원에 가까이 있는 이 곳은 봄을 가장 늦게 맞이한다. 다른 이들이 서울 여의도와 안양천 벚꽃놀이에 1번 취하고, 수십 장의 핸드폰 속 벚꽃사진에 2번 취하고, 다가올 더운 여름을 기다릴 때쯤, 그때 이곳엔 꽃이 가장 만발한 봄을 맞이한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하얀 산철쭉, 진분홍 산철쭉, 연분홍 산철쭉이 벽돌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다발 다발로 피고, 초롱 같은 꽃을 핀 금낭화는 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마치 악보 위의 음표처럼 이쪽저쪽으로 대롱대롱 날린다.
그 사이 뭔가 풀꽃 같아 보이지는 않는 보라색 꽃을 발견한다. 웅크리고 앉아서, 보라색 꽃봉오리를 요리조리 만져보면서 질문을 한다.
"이 꽃은 무슨 꽃이야? 첨 보는데, 여기저기 비슷한 꽃이 마구잡이로 피어 있네.
이 꽃 이름 뭔지 알아? "
"하늘매발톱꽃이야. 흰색은 흰매발톱꽃이고.
이 꽃 고향이 어디인지 너 모르지?
백두산이 이 꽃 고향이야. 백두산에선 이 꽃 천연기념물이다.
백두산에 피는 꽃이 우리 집 정원에 이렇게 많이 펴 있는 거야. 신기하지 "
"꽃은 이쁜데, 이름이 매발톱이 뭐야? 매발톱 하고 닮았나. 어디 보자"
"맞아. 꽃잎 뒤쪽에 보면 꽃불이 매의 발톱을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 거야. 잘 봐봐.
근데 너 매발톱을 본 적이 없잖아. 바보"
"근데 이 꽃 엄마가 심었나? "
"아니. 이 꽃들 오빠가 심은 거다.
내가 없어도 엄마 이 꽃 보면서 슬퍼하지 말고, 내 생각하라고 내가 미리미리 심어둔 거야. "
그 순간 머리가 밝아진다. 맞다. 오빠는 12년 전에 하늘로 갔는데, 지금 나와 대화를 하는 이 사람은 누구지? 대화를 하던 남자를 쳐다보려고 아등바등 고개를 들려고 하지만, 고개가 들어지지 않는다.
갑자기 무서움과 궁금함이 몰아닥치면서 감고 있던 눈이 떠진다. 아파트 마루 소파다. 쥐고 있던 핸드폰이 떨어져 있다. 엄마 집에서 수백 장 찍어온 하늘매발톱꽃을 보다가 잠이 들었나 보다.
핸드폰 속에 저장된 수백 장의 <하늘매발톱꽃>사진이 눈물에 흐릿하게 보인다. 그렇게 보고 싶던 오빠를 12년 만에 꿈에서 만났는데, 나는 고작 얼굴도 안 보고, 바보같이 꽃이름만 물었다.
<하늘매발톱꽃>을 아시나요?
<하늘매발톱꽃> 꽃말은
'승리의 맹세'와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