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금액이 주는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정도의 많은 노력
나는 프로 강사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영역이던간에 한 분야에 오래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강의’를 할 기회가 뒤따른다. 그런 기회는 ‘강의를 잘해서’라기 보다는,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컨텐츠에 대한 요청일 경우이다. 그렇게 본인이 대중 앞에서의 스피치에 아주 취약하지 않고서는, 전문코치로 일하다보면 강의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보통은 문자메시지나 이메일로 강의 의뢰를 받는다. 일정, 강의 주제, 강의료 등 나의 여건과 해당 기관의 상황이 맞아 떨어질 때 강의진행을 수락하게 된다. 그러나 막 코치가 되었을 시절, 그러니까 코치로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수준이 생계형인 시절에는 들어오는 강의를 취사 선택하기란 어렵다. 들어오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가리지 않고 일단 경험치를 늘여야 한다.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강의를 선택할 수 있을 때가 오면, 그걸 뒷받침해줄 실력이 갖춰져 있을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다양한 경험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
2010년, 코치로서 내가 처음 의뢰 받았던 기관강의는 ‘청소년 대상으로 하는 진로 코칭’이었다. 당시 난 서울에 살았는데, 그 강의를 하러 ‘평택’까지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오가야 하는 일이었다. 실제 강의는 2-3시간 정도였는데, 그것을 준비하는 데 드는 시간, 준비하며 받는 스트레스까지 더하면 몇 십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 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강의를 준비해 내려갔다. 하지만 10여명의 신청자가 있다고 들었던 강의장에 도착해 보니, 단 3명이 앉아 있었다. 난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 마치 1:1 코칭을 한다는 마음으로. 만나서 반갑다는 마음으로.
돌이켜보니, 그 때 그 강의료는 시간당 ‘3만원’이었다. 2-3시간 일해도 10만원이 체 되지 않는 돈이었는데, 거기에 무궁화호 기차비, 지하철비, 버스비, 오가며 마시는 커피, 식사값을 제하고 나면 남는 수익은 거의 없었다. 그 뿐인가. 거기 강의를 하러가는 날엔 그 강의 시간만 투자되는 게 아니었다. 그 강의를 하기 위해 오가는 시간까지, 거의 하루가 통으로 다 쓰이는 것이니, 사실 그 강의료는 내가 하루라는 시간을 들여 일한 것에 대한 대가였다. 물론, 준비 시간까지 더하면 더 긴 시간에 대한 대가였을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나는 코칭이 정말 좋았으니까, 재밌었으니까, 돈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 기관 홍보지에 내 이름 석자가 코치로 적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좋았던지. 가슴으로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 켜켜이 13년 동안 쌓여왔다. 겹마다 사연이 그득하다. 고속도로가 막혀 지역 인재원에 지각하여 강의를 망친 일, 강의를 정말 열심히 준비했는데 도착해 보니 참가자분들이 딴청피우며 강의를 안 들은 일, 도착해서 PPT가 열리지 않은 일, 4시간 운전해서 강의장에 도착했는데, 신청자가 미달이었던 일… 단 3명을 앞에 두고 했던 강의부터 2-3백명 앞에서 한 강의까지, 나의 코치이자 강사로서의 우여곡절이 그 시절들에 묻어나 있다. 지나고 나니 다 미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절들이어서 가능했던 일이었구나 싶다. 그냥 코칭이 좋아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전업코치’로 살아간다는 것, 코치로 본업을 삼고 생계를 이어가는 길을, 나는 그렇게 온 몸으로 부딪히며 배워갔다.
이것이 어디 나 혼자만의 흐름이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강의 장면에서 우여곡절을 겪고 있는, 책상에 앉아 몇 시간 째 일어나지 못하고 강의 흐름을 짜고, 강의안을 만들고 있을 모든 강사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 이것은 ‘나’, ‘당신’, ‘우리’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런 흐름을 최소 10년 이상 쌓은 우리(나)에게는 자연스럽게 그 어떤 강의가 와도 한 번 해볼만은 하겠다는 힘(짬)이 있다. 그건 돈으로도 살 수 없고, 배울 수도 없는 오로지 온 몸으로 부딪혀 배운 경험치에서 오는 바이브다. 그리고 세월은 무시 못한다고, 자연스럽게 업계에 우리란 사람에 대한 이름과 레퍼런스가 흐르고 쌓여간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들어오는 강의들 중에서 내가 해 보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때를 맞이한다.
그렇게 2023년 오늘 날, 나는 의뢰받은 강의들의 요청 ‘주제(메시지)’를 보고 내가 정말 할 수 있겠다, 해 보고 싶다라는 느낌을 받으면 강의의뢰를 수락한다. ‘강의’가 본업도 아닐 뿐더러, 코치로서 전문성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강의들에서 내 강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코칭이 없는 일정에 가끔씩 ‘강의’를 선택하여 하고 있다.
그런 내게 얼마 전 이 ‘강의’란 일과 관련한 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 동료와 이야길 나누다가 강의에 대해 얘기하게 되었고, 최근 내가 진행한 강의의 ‘강의료’에 대해 이야기할 일이 있었다. 그 강의는 ‘모 기업의 팀장님들 대상으로 진행하는 코칭 특강’이었는데, ‘코칭을 조직에 도입해야 하는 시대적 배경, 팀장리더십에 코칭이 유익하다는 이야길 담아 말 그대로 코칭에 대한 동기부여를 드리는 특강이었다. 해당 강의료는 ‘시간당 100만원’이었다.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상대의 반응이었다. ‘우와, 진짜 많이 버네. 좋겠다.’, ‘어떻게 하면 그런 강의를 할 수 있어?’ 나는 그 반응을 보면서 이것에 내가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게, 나도 시간당 3만원 받았던 베이비 강사였었는데 말이야… 뭐였을까?...’
나는 그것에 대해 한 주 간 다음과 같은 알아차림을 얻었다.
하나, 나는 강의를 의뢰받았을 때, ‘강의료’ 액수 자체에 큰 무게를 두지 않는구나란 걸 알아차렸다. 나는 그 강의가 시간당 얼마든 간에(대체로 높은 금액일 때), 그 액수에 좌우되지 않는다. 나는 나에게 강의를 의뢰해 준 기관과 담당자가, 내 강의에 그 정도 비용의 강의료로 예산을 측정했을 때에 가졌을 ‘기대치’, ‘신뢰정도’에 마음을 둔다. ‘그 정도 비용을 이 코치(강사)에게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어. 왜냐하면, 이 사람은 그 정도 가치 있는 컨텐츠를 우리 대상자(교육생)에게 줄 사람이라 믿어.’ 나는 이것에 포인트를 둔다.
둘, 그리고 그 상대방의 기대치와 신뢰정도에 있어, 나는 ‘결국 주어진 시간동안 최선을 다해서 그 기대치를 채워줄 컨텐츠를 구성해낼 나의 성실함’을 믿는다. 나는 나를 믿는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았을 때, 나는 한 강의를 맡아도, 뭘 볼 때마다 그 강의와 관련한 아이디어들을 틈틈히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고, 어떤 책을 보더라도 그 강의와 관련해 좋은 문구를 발견하면 수집해 둔다. 전체 강의 흐름을 잡아두고도, 강의 진행 전날 밤 새벽까지도 그 흐름이 최선인가 되돌아본다.
이번 특강만 해도 그랬다. 혹자에게는 ‘그 강의의 강의료가 얼마였어?’가 먼저 보이겠지만, 그 너머에 ‘내가 그 금액이 주는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정도의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강의를 의뢰 받고 난 후 한 달 동안, 일상에서 틈틈히 그 주제를 생각했다. 그리고 2시간짜리 특강이면 난 3시간을 강의해도 될 컨텐츠 분량을 준비한다. 이번에도 이 2시간 특강을 위해 강의 흐름만 5쪽을 썼었었다. 그리고 그 강의의 흐름은 어디서 본 책 내용의 요약, 인용이 아니라 대부분은 내 안에서 통합된 생각들이다. ‘내가 정말 그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이지?’ 라는 핵심 질문을 바탕으로 강의 흐름을 구성한다. 고치고 또 고치며,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딱 됐다.’하는 느낌이 올 때까지 나는 그 흐름을 째려보고 또 째려본다.
그래, 어쩌면 시간당 강의료란 건 없다. ‘강의료’란 ‘그 날 강의한 시간에 대한 댓가’이겠지만, 사실 우리 알지 않는가. 그 시간동안 하기 위해 우린 강의 의뢰 받은 날부터 강의 당일까지 그 강의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우리 내면의 창조성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 짧은 2시간 동안 번 비용이 아니다. 한 달 넘는 시간 동안의 내 노동력에 대한 비용이다. 그 뿐인가 그 비용안엔 수년동안 이 업계에서 노력해 온 나의 가치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세어보면 그렇게 어마어마한 금액은 아닌 것이다. 정말 내가 평상시에 코치로서 코칭을 잘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루틴과 수련을 하루 중 하는지 보면, 그 노력들이 결국 그 기회를 불러오고, 그 기회에서 성과를 내게 하는지 알고 나면, 사실 강의료는 그 시간에 대한 비용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같은 전문가들은 자신이 받는 시간당 ‘비용’에 대해 잘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을 존중해 주는 비용선(최저선) 기준을 잘 갖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하는 것에 대한 비용은 그 시간당이 아니라, 평상 시에 시도하는 그 수많은 노력들과 그 실제 일하는 날에 노력, 그리고 그 동안 세월 속에 쌓은 우여곡절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코칭 한 세션의 비용 책정도 마찬가지다.)
위 두 가지를 생각하고 나니, 그대로 나에게 두 질문이 이어져 남았다.
‘그럼, 나에게 그런 기대치, 신뢰도를 갖는 담당자들은 어떻게 점점 늘어나 왔을까?’
‘나는 어떻게 내가 맡은 강의분량이 요구하는 것보다 몇 배의 노력을 더 기울일 수 있었을까?’
바로, 내가 이번 달에 있었던 코칭이나 강의들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혼자 중얼 거린 말에 정답이 숨겨져 있다.
(진심으로) ‘하, 좋았다.’ (하, 너무 재밌다. 좋았어요.)
그래, 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날 몇 일 밤에 잠 못이루며 강의흐름 짜고, 강의안 만들고, 당일 무대에 마이크 잡고 서서 다 해내고 난 후에, 내 입에서 결국 나오는 말, ‘좋았다’. 이 세 글자에 모든 답이 다 있다. 내가, 내 메시지가 필요한 곳에서, 정말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준비한 흐름 속에 전달했을 때, 그리고 그 메시지가 앉아 있는 분들 중에 대다수에게 잘 전달되고 있구나 느꼈을 때, 근데, 마침 그 메시지가 내가 좋아하는 ‘코칭’과 관련된 것이었을 때 ‘난 정말 행복하구나.’라고 절절히 깨달았다. 번 강의료는 덤이다. 나에겐 한 건의 강의가 그렇게 알차게 끝났을 때, 진실로 행복하다. 그 짜릿함이 나로 하여금 그 달에 주어진 강의에 최선을 다하게 했던 것이겠지.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
그 일을 포기하지 않고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해 온 사람,
그런데 그 성과가 크게 나쁘지 않고 때때로 꽤 괜찮았던 성과도 낸 사람,
한 번 맡겨봤는데, 신뢰로웠고, 한 번 더 맡겨봤는데 더 좋았던 사람.
결국 믿고 맡기게 되는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이 내면에 동력이 그 일을 너무 좋아서 아무도 안 시켜도 그 일을 즐기는 사람.
누군가 나에게 어떻게 하면 ‘시간당 100만원’을 받는 강의를 할 수 있나요? 라고 묻는다면, 위와 같은 사람이 점점 되어갈 때, 언젠가 100만원, 아니 그보다 더 큰 돈을 받는 코치, 강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여기서 정말 큰 아이러니는 뭔지 아는가? 실제 찐으로 그 일을 즐기는 사람들들은 ‘강의료 100만원’이란 숫자보다, 그 일을 하는 자체가 몇 배의 충만함을 이미 주기에 비용 자체에 크게 연연 안 한다는 것이다. 아, 그런데 더 큰 아이러니는 업계나 담당자들은 그런 분들을 더 큰 비용을 주고서라도 강사로 섭외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흥미롭다.
내 일을 사랑하면, 나는 언젠가 그 일에 실력자(전문가)가 될 수 밖에 없고,
진짜 실력자가 되면, 내가 지리산 산골에 있어도 내게 배우겠다며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8년 전, 선배 코치가 내게 해 주었던 조언이 떠오르는 밤이다.
오롯하게 실력을 갖추어가리.
정도를 걸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