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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Oct 15. 2019

자살은 극단적 '선택'이 아니다.

故 설리 씨를 애도하며

포털의 인기 검색어 순위에, 최근 활동이 잠잠한 연예인의 이름이 일 순위에 오르면 늘 긴장된 마음으로 이름을 눌러본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오랜만에 방송에 출연해서 화제가 된 경우이지만, 직업의 특성상 늘 자살로 사망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불과 몇 달 전 사망한 배우 고 (故) 전미선 씨의 경우, 나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었다.


우리 사회는 지난 십 년간 얼마나 많은 연예인들을 자살로 잃었나. 고 (故) 이은주 씨를 비롯해서, 국민 배우였던 최진실 씨, 지금의 설리 (본명 최진리) 씨까지, 아마 열 손가락으로 꼽아도 모자라지 않을까.


고 (故) 이은주 씨의 죽음 이후,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잃었는가.


미국에서는 자살에 관련 보도 지침에서 용어에도 많은 무게를 둔다. 자살을 설명하는 동사는 전통적으로 늘 commit (저지르다는 뜻)이었다. 자살 관련 전문가들이 이 용어에 문제를 제기한 이유는 commit이라는 단어가 범죄라든가, 살인과 같이 부정적인 행동들에 주로 사용되는 용어였기 때문에, 자살로 사망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유가족들에게 낙인을 찍고, 죄책감과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자살 유족들이 이에 공감을 표시했고, 여전히 기사들에는 commit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하지만, 자살로 사망했다 (died by suicide)는 표현으로 대체되었다.


한국에서는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말을 언론에서 흔히 쓴다. 이제는 거의 자살과 동의어가 된 이

구절은, 일상생활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조합한 것이라 더 눈에 띈다. 

'극단적 선택'이란 표현은 자살로 사망한 사람의 기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목이다. (출처: 네이버 검색)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 입장에서는 자살로 사망한 사람이 삶과 죽음의 선택지에서 죽음을 ‘택한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이성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그가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가 수없이 많을 테니까. 사랑하는 가족, 아끼는 친구들, 성공적인 커리어까지. 하지만 자살로 사망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선택이 아니라면, 왜 자살을 시도하는 것일까?


자살 생존자들에게 시도 당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질문하면, 십중팔구는 자살 생각에 너무나 강하게 사로잡

혀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마치 자살을 명령하는 환청을 들은 것 같다고 답하는 환자도 있다. 이처럼 자살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힌 순간에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이성적 사고가 마비되고, 우울감과 불안감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며, 극도의 정서적 고통을 느낀다.(1)


그래서 역설적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살아남은 사람은 대부분 살아있음에 안도한다. 벨뷰 병원에서 총기 자살 시도로 얼굴의 삼분의 일 이상이 손상된 환자를 진료한 적이 있다. 바로 며칠 전 스스로의 얼굴에 총을 쏜 그에게 '살아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 묻자 살짝 웃으며 살아있어서 감사하다고 말하던 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자살을 생각하거나 시도하는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해도 삶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감정은 삶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시야를 가로막는다.(1)

결국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탈출하고 고통을 멈추는 유일한 길은 죽음뿐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한다. 자살을 시도하는 그 순간만은 그들에게 자살은 선택지가 아닌, 현실의 고통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2) 그렇다면 여기서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선택지가 없었다고 느낀 사람에게 선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정당한가?


사람들은 흔히 자살로 세상을 떠난 사람은 이기적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3) 자살을 선택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러한 편견을 강화시킬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이기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스스로가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4)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내가 사라지면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오해한다.(2,4)


자살을 이기적인 선택으로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이 자살 예방에 악영향을 미치는 궁극적인 이유는, 자살 고

위험군으로 하여금 자살 생각이나 자살 시도를 숨기게 만든다는 데 있다. 또한 이들이 미리 적절한 치료를 받

을 기회마저 박탈한다. 자살한 사람이 모두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을 앓았다고 보긴 어렵지만, 정신 질환을 앓았을 확률은 매우 높다.(5) 실제로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치료되지 않은 우울증'이다. 자살 경향성은 우울증과 조울증, 경계성 성격장애, 약물중독 환자에게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며 자살 생각은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6)    


마지막으로, 자살을 선택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고인은 물론 자살 유가족들까지 낙인찍는 일이다. 실제로

자살 유가족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질문이 바로 “고인이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 묻는 것”이라고 한다.(7)

유가족 중에는 낙인으로 인한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다른 사람과 교류하기를 꺼리고 고립되는 경우도 많다. 죄책감, 수치심, 고립 그리고 애도 과정이 합쳐질 경우 극심한 정신적 통증(psychache)을 느끼게 된다. 이 정신적 통증이 때로는 너무도 강렬한 나머지 자살 생각을 호소하는 유가족도 흔하다.(8) 


자살 유가족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죽음들과 달리, 자살만은 ‘죽음’이 망자의 ‘삶’을 압도 해버

린다고. 가령 누군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뿐 아니라 ‘그가 어

떻게 살았는지’를 떠올리며 삶 전반을 기린다. 아마 대부분의 죽음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유독 자살로

사망할 경우 그 사람의 삶 자체보다는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 사랑하는 이를 자살로 잃은 슬픔만으로도 벅찬 유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은 지양해야 한다.


아마 이 모든 이야기들이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의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20퍼센트에 가까운 사람이 평생에 걸쳐 주변의 누군가(친구, 지인, 가족 등)를 자살로 잃는다고 한다.(9) 자살률이 미국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한국에서는 아마 이 보다 더 흔하지 않을까.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는 나라임에도 이 중대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논의

하기보다는 덮기 급급했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도 어찌 보면 자살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거나 우회하려는 자세가 반영된 신조어 일지 모른다. 이제는 자살에 관해 떳떳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자살을 ‘자살’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반복되는 자살은 우리 정신 건강의 현주소다.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 이상,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참고 문헌:

1. Schuck A, Calati R, Barzilay S, Bloch-Elkouby S, Galynker I. Suicide crisis syndrome: A review of supporting evidence for a new suicide-specific diagnosis. Behav Sci Law. 2019;37(3): 223-

239.

2. Shea SC. “The practical art of suicide assessment: A guide for mental health professionals and substance abuse counselors.” 1999. John Wiley & Sons Inc.

3. Carpiniello B, Pinna F. The reciprocal relationship between suicidality and stigma. Front Psychiatry. 2017;8: 35.

4. Van Orden KA, Witte TK, Cukrowicz KC et al. The interpersonal theory of suicide. Psychol Rev. 2010;117(2): 575-600.

5. Cavanagh J, Carson A, Sharpe M & Lawrie S. Psychological autopsy studies of suicide: A systematic review. Psychol Med. 2003;33(3): 395-405.

6. Nock MK, Borges G, Bromet EJ, et al. Cross-national prevalence and risk factors for suicidal ideation, plans and attempts. Br J Psychiatry. 2008;192(2): 98-105.

7. Goodman B. Web MD: “It’s not a choice: Trying to understand suicide.” 2018. https://www.webmd.com/mental-health/news/20180608/its-not-a-choice-trying-to-understandsuicide. Accessed Mar 3rd, 2022.

8. Aguirre RTP & Slater H. Suicide postvention as suicide prevention: Improvement and expansion in the United States. Death Stud. 2010;34(6): 529-540.

9. Andriessen K, Rahman B, Draper B, Dudley M, Mitchell PB. Prevalence of exposure to suicide: A meta-analysis of population-based studies. J Psych Res. 2017;88: 11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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