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좋은 직업이야. 그래도 그냥 직업일 뿐이지 (It's a good job. But it's still just a job). 우리 삶엔 더 중요한 것들이 있고, 난 너의 선택을 존중해.
내가 미국 와서 들은 조언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와 닿는 말이었다. 2년 전, 내가 와이프 직장을 따라 뉴욕으로 병원을 옮긴다고 했을 때 레지던트 동기가 나에게 이메일로 해준 말. 그 이메일을 받고 한동안 모니터 앞에서 벙쪄 있었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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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뻔한 말이 왜 그렇게 충격이었을까. 돌이켜보면, 내가 평생을 그와 정반대의 가치관을 주입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난 어릴 때부터 가슴이 뛰는 일, 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일을 찾으라는 사회의 (혹은 나 스스로 만든) 무언의 압박 속에 자랐던 것 같다. 누군가는 우리들에게 야망을 가지라고 했고, 신해철의 가사는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물으며,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면, '너의 날개는 펴질 거야'라고 나에게 속삭였다. 자기 계발서들은 20대의 나에게, 그렇게 찾은 꿈에 미칠 것을 강요했다. 유명인들의 자서전을 즐겨 읽었던 이유는, 그 들은 그렇게 가슴이 뛰는 일을 찾은 (혹은 찾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고, 또 그 성공에 상응하는 노력을 한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롤모델 삼아 나 스스로에게 (지쳤음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연료를 공급하기 위함이었다.
현 20-30대 세대가 불행한 이유에 대한 이론은 수도 없이 많겠지만, 어릴 때부터 그려놓은 이상적인 직업에 대한 청사진 또한 한 몫하지 않았을까. 우리 부모님 세대와 달리, 우리에게는 무한한 미래가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 세대와는 달리, 의식주가 해결이 된 세대였기 때문에, 단순히 현실적인 가치들을 쫓기보다는 꿈을 키울 수 있는 특권이 있는 것만 같았다.
김영하 작가는 최근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잘하는 일을 하라"라고 조언했다. 난 사실 그 글을 보고 김영하 작가의 통찰력에 조금은 실망했다. 아니, 어쩌면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한 내 잘못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잘하는 일을 하지 말고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고리타분한 말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은 해봄직한 일이다. 왜냐면 많은 사람들이 잘하는 것은 없어도, 좋아하는 것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재능, 그것도 일로 (혹은 임금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재능은 평균 수준에 머문다. 운동을 특출 나게 잘한다고 해도, 그것을 업으로 삼으려면 상위 0.1% 혹은 그 이상의 실력 (혹은 재능)을 요구한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 중에, 공부를 평생 업으로 삼을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 또한 넓게 잡아봐야 상위 1% 정도일 것이다.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 잘하는 일 말고 좋아하는 일을 해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은 99%의 사람들에게 이런 주문들은 가혹하다. 차라리 '직업은 직업일 뿐이다'라고 말해주는 편이 더 좋은 조언/위로가 되지 않을까. 왜냐면, 99%의 사람들은 직업에서 큰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만족하지 못할 주문을 우리 사회가 어릴 때부터 설파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면 스스로의 일에 엄청난 보람과 자긍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1%의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행복에 더 큰 만족감을 느낄 테고 말이다.
이 글을 쓰는 순간도 마음 한편에는 죄책감이 자리 잡고 있다.
'난 지금도 환자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난 지금도 내 직업에 감사한다. 환자를 보는 순간에는 내 눈앞의 환자가 세상의 전부이고, 환자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다. 사실, 일에서 떠나 있을 때도 때론 마음 한편에 환자들이 자리 잡곤 한다.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을 나의 천직으로, 소명으로 인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환자를 소홀히 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의사라는 직함은 내 직업일 뿐, 나를 규정하는 단어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환자에게 해고를 당해도, 환자가 나에게 욕을 해도, 내가 정신과 의사로서 특출 나지 못한 것 같아도 내 일상생활은 풍요로울 수 있다. 내가 직장에서 느낀 감정을, 내 가족과 있을 때 그 들에게 전가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마음가짐을 바탕으로 난 더 좋은 정신과 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사는 좋은 직업이야. 그래도 직업일 뿐이야.
그 말 이후로, 내 삶의 많은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여전히 진로에 대한 고민들은 하지만, 그 고민들이 내 일상을 흔들어놓지는 않는다. 일을 하다가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집에 오면 잊게 된다. 난 여전히 이상주의자고, 꿈을 좇는 청년들을, 그리고 청년들은 모름지기 그래야 함을 주창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충분히 존중한다. 하지만, 직장을 삶의 터전으로 인식하고, 직업을 스스로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한 우리 사회에, 조금은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것 또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짧게 글을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