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간의 휴가를 마치며
2주간의 꿈같은 휴가를 마쳤다. 생각해보면 지난 9월 이후로 두 번의 휴가를 뉴욕에서의 거주지를 알아보고, 이사를 하느라 다 썼기 때문에, 거의 일 년 만에 제대로 쉴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아내와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보내고, 딸과 2주 내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지낼 수 있어서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 레지던트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원하는 커리어를 일궈나가면서도, 가족 중심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련을 받아본 적도 없는 의대생이, 가족도 없는 상황에서 그걸 생각했다는 게 우습다면 우습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때는 나에게 한국보다는 미국에서의 의료환경이, 조금 더 가정에 충실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이것이 정말 맞는 선택이었는지, 미국행이 잘한 결정인지에 대해서는 종종 회의감이 들지만, 지난 2주는 그 결정에 대한 회의감을 조금은 상쇄해줄 만큼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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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중 하루는 딸과 브루클린 어린이 박물관에 갔다. 뉴욕에서 갓난아기들도 나름 재밌게 놀 수 있는 곳이란 소개를 보고 큰 맘먹고 갔는데, 정작 딸아이는 아직 너무 어린 탓인지, 영아들이 놀 수 있는 공간에 내려놓았더니 얼어버린 듯 기어 다니지도 않고 굳어 있어서 웃기만 했던 기억. 무언가를 인증하고 싶었는지, 박물관 앞에서 유모차에 탄 9개월 된 딸아이의 기념샷을 찍고 가족 및 친구들 채팅창에 사진을 공유했다. 쑥스럽지만 고백하건대, 조금은 뿌듯했던 것 같기도 하다. 조금은 좋은 아빠, 자상한 아빠가 된 기분이었달까. 사진을 본 친구 및 가족들의 반응도 이를 강화시켜주는 내용이었고, 그렇게 기분 좋게 박물관을 들어섰던 기억.
브루클린 어린이 박물관은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리고, 평일이어서인지, 차가 막히지 않는 타이밍에 출발한 탓인지, 생각보다 한산했다. 이제 막 9개월도 채 되지 않은 딸아이는, 별 감흥 없이 뚱한 표정으로 유모차에 탑승한 채, 한 바퀴를 같이 돌았다. 대략 여섯에서 일곱 가족이 있었는데, 다들 엄마와 함께 온 아이들이었다. 조금 더 큰 아이들 이어서였을까, 아니면 자주 와서였을까, 아이들은 이것저것 열심히 경험하며 박물관에서의 경험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많이 들떠 있던 나와는 달리 엄마들의 표정은 차분했다. 나에게는 매우 특별한 오늘 하루가, 그녀들에게는 일상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저 엄마들을 보며 사람들은 "좋은 엄마", "자상한 엄마"라고 생각할까?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아마 아이들을 어린이 박물관에 한 번도 데려간 적이 없다고 하면, 오히려 사람들은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을까. 아이들을 데리고 박물관에 오는 일은, 좋은 엄마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나쁘지 않은 엄마"들로 만들어주는 일상일 뿐이다. 이내 부끄러워졌다. 엄마들은 매일같이 반복하는 일을, 단지 하루 흉내만 내놓고 스스로 뿌듯해하는 모습이. 그리고 그런 생각도 들었다. 좋은 아빠 되기는 정말 쉽지만, 좋은 엄마 되기란 정말 힘들겠구나. 어찌 보면 우리 사회의 좋은 아빠의 기준은, 보통의 엄마가 되기 위한 최소 조건 보다도 훨씬 낮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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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여성 혐오, 모성 혐오, 남녀 차별에 대한 기사를 볼 때면 나는 이제 딸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미국 기사도 마찬가지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성희롱 사건들에 대한 기사들을 읽을 때면, 난 딸아이가 생각이 난다. 그리고, 이제는 브루클린 어린이 박물관에서 느꼈던 감정도 함께 떠오를 것 같다.
꿈 많던 엄마의 눈부신 젊은 날은, 너란 꽃을 피게 했단다. 그리고 널 위한 이 노래..
- 토이의 <딸에게 쓰는 편지> 가사 중에서
앞선 어떤 글에서도 밝힌 적 있지만, 나는 이 노래의 가사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어느 순간 싫어진 유희열의 농담들에서 느껴지는 마초성이 드러나는 가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가사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란 생각이 드는 요즘이기도 하다.
다만, 내 딸아이가 스무 살이 되고, 직장을 구하고, 만약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면, 그때는 부디 동반자와 희생을 지금보다는 더 분담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 사회가, 부디 보다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 길목에 아버지로서 내가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하고 있다. 딸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줄 때, 딸이 아빠를 위해 늘 밥을 차린다든가 하는 내용은 읽어주지 않는다든가,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전통이 있다는 내용은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고 바꾼다든가 하는 식. 아마 시간이 지나, 내 이야기를 이해할 나이가 되면 현실을 부정하기보다는 인정하고 잘못된 것을 짚어주는 방향으로 가야겠지만, 현재로선 이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넘어서, 비단 여성/남성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든, 미국이든, 어디든 간에 부모 됨이 조금은 손쉬운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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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와 9개월을 함께 하며, 늘 머릿속으로 부모의 역할에 대해 고민을 하곤 한다. 과연 어떻게 키우는 것이 "좋은" 양육일까,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가장 "이상적인"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등등. 답도 없는 문제에 대해 계속 고민하는 것이 나의 성격이긴 하지만, 아이에게 있어서만큼은 조금 더 신중하게 되묻게 된다.
휴가기간에 앞서, 딸아이는 처음 무언가를 짚고 설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그날의 흥분을 기억한다. 우리 가족이 떨어져 살았다면 지켜보지 못했을 딸아이의 하루하루. 너무도 감사하고, 기적과 같은 오늘이 힘든 수련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힘인 것 같다.
특히나 창틀에 서서 바깥을 보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는 딸아이와, 엄마가 퇴근할 때 즈음에는 늘 창문에 같이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이제 갓 짚고 일어서기를 배웠기에, 여전히 자세는 불안 불안했지만, 그래도 나름 나의 도움 없이도 딸아이는 창가를 짚고 서있을 수 있었다. 나의 역할은 혹시나 뒤로, 혹은 옆으로 넘어질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뒤에 앉아서 팔을 내밀 준비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가끔, 아직은 창문 높이에 비해 키가 작은 딸아이가 더 높이 볼 수 있도록, 까치발을 들 수 있게 도와줄 따름이었다.
아마 이상적인 부모 역할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내 딸아이가 혼자 서있다가, 넘어지더라도 다치지 않게 뒤에 서있는 일. 내 딸아이가 조금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을 때, 조금 더 높이 볼 수 있게 살짝 힘을 보태 주거나 들어 올려주는 일. 그게 아마 내가 그리는 나만의 이상적인 부모상인 것 같다.
엄마가 일에서 돌아오면, 늘 아내는 문으로 바로 들어오지 않고 창문을 통해서 우리를 쳐다보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면 딸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해맑은 미소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스스로를 희생한 내 아내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일. 그것이 아마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