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차를 마치며
어느새 메이요 클리닉에서 일한 지 일 년이 지났다. 미니애폴리스 공항에서 가족이 기다리는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홀로 기다리며, 무언가 기록을 남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일 년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나 모를 정도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랑스러운 딸아이가 태어났고, 아내는 직장을 갖게 되었으며, 나는 뉴욕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사히 정신과 레지던트 1년 차 과정을 마무리했다.
거창한 것을 배웠다기에 일 년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지만, 느낀 점을 간단히 남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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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미국행을 결심했던 것은 뉴욕에서 일렉티브를 할 때였다.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정신과 환자에 대해 토론하고 치료 계획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미국의 다양한 인종의 환자들도 나를 미국으로 이끈 계기가 되었다.
사실 '미국이 좋아 보여서'의 반대편에는 한국에 대한 불만도 분명 있었다. 무한경쟁이었던 학창 시절, 군대생활, 의과 대학시절에 아쉬움이라든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내가 그러한 현실을 바꾸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묻는다면, 부끄럽다는 말 밖엔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메이요에서 느낀 가장 큰 차이는, 조직의 가장 낮은 직급에서도 자유롭게 구조에 대한 비판 및 피드백을 할 수 있는 문화였다. 한 달에 한 번씩 모든 레지던트들이 모여서 스스로 느끼는 불만사항이나 개선점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했고, 이는 무기명으로 프로그램 리더십에 전달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각 연차의 대표들과 교수진이 모여서 실질적으로 레지던트 과정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매달 모임을 갖는다. 이로 인해 매우 실제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4년 차가 경험한 레지던트 생활과 우리가 경험한 레지던트 생활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었다.
돌이켜보건대 한국에서는, 내가 고생이 끝나면 그걸로 후련해할 줄만 알았지, 후배들, 후임들을 위해서 잘못된 점을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생각이 있었어도, 정작 내가 그 짐을 벗어던지는 순간, 불만도 벗어던졌던 것 같다. 주변을 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생할 후배들이 겪을 고통을 얄궂게 놀리는 게 일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한국 전공의의 업무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분들을 보면, 경의와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내가 한국의 수련 환경을 피했다면, 한국에서 레지던트를 하면서 정면에서 그 문제를 개선하려는 분들은 진정한 의미의 실천가라고 생각한다. 그런 분들의 노력으로 한국 사회도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개개인의 희생 또는 선의를 바탕으로 한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구조적으로 피드백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피드백을 주는 사람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야만 진정한 개선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 총대를 메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을 대신하여 총대를 메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는 과정도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잘못된 관행을 고치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돌팔매질을 하는 문화는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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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간 의학이란 학문이 이렇게 따뜻한 환경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구나, 생각하며 살았다. 미국 또한 병원이란 공간, 의학이란 학문은, 보다 보수적이고, 늘 긴장감 있고, 조금은 삭막한 공간이다. 잘은 몰라도, 아마 동부에 가면 가장 크게 느낄 차이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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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 늘 가족을 먼저 생각하라는 가르침 (Family comes first). 가족을 위해 이직을 결심하고 맘을 열었을 때 받았던 수많은 격려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언젠가 또 다른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메이요의 친구들이 나에게 조언을 해줄 것이다. 늘, 가족이 먼저라고.
우리 딸의 고향이기도 한 미네소타는 언제나 내 마음 깊은 곳에 소중한 장소로 기억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