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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Sep 15. 2020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다음 글은 미국의 정신과 질병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만든 단체인 NAMI (National Alliance of Mental Illness)에 그레고리 던컨 씨가 기고한 글을 번역한 내용입니다. 


제 아내가 8월에 자살로 삶을 마감한 후 몇 달간, 저는 극심한 충격에 빠져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너무 많은 생각과 질문들이 제 머릿속에 맴돌아서 제 감정을 미처 돌아볼 시간이 없었어요. 하지만, 11월이 되고 주변 사람들이 보내주던 공짜 음식들이 끊기기 시작할 때쯤, 저는 고통과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여전히 많은 것들이 미궁 속에 있었지만,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몇 번쯤은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눈에 눈물이 고이거나 울기도 했지만, 가장 나약한 모습들은 집에서 혼자 있을 때를 위해 아껴두곤 했어요. 레이첼은 제가 슬픔을 보이거나 울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곤 했었어요. 저희 관계에 생긴 어떤 변화 때문에, 저는 제가 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때로는 슬픔이나 절망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전처럼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했었어요. 마치 감정을 너무 깊이 묻어둔 나머지, 거기에 스스로도 닿을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 모든 것들은 레이첼의 죽음 이후 변했어요. 저는 다시 우는 법을 배웠어요. 집에서 혼자 감정이 벅차올랐을 때, 저는 이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울음을 터뜨리곤 했어요. 그 고통은 심연에서 비롯되는 것 같았고, 제 울음은 곡하는 소리 또는 신음소리로 변하곤 했어요. 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고 분출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았어요. 그 감정은 울음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그것들을 묻어버리거나 다른 감정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감정들을 마주해야만 했어요. 

저는 다른 죽음에 대한 애도가 어떤 것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자살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은 마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사람들은 당신이 구렁텅이에 있다는 걸 알고는, 가끔 와서 내려다보고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곤 하죠. 당신은 "저는 구렁텅이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썩 좋지는 않지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대신, "괜찮다"라고 말해요. 당신이 사실 가장 원하는 것은 누군가가 당신을 구렁텅이에서 구해줄 동아줄을 던져주는 것임에도요. 


당신은 누군가가 다가와서 당신이 구렁텅이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주길 원해요. 그리고 당신은,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동아줄을 실제로 던져준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그 구렁텅이에서 나와야 함을 깨달아요. 여전히 당신은 구렁텅이의 벽을 타고 어떻게든 올라오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거죠.  


그 구렁텅이에서 나오는 방법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려서, 결국 당신은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어요. 그나마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은 사람들이 다가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때예요. 그들은 당신처럼 구렁텅이에 있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는 모를지 몰라도, 최소한 그들의 시간과 관심을 (그것이 가장 필요한) 당신에게 쏟아주니까요.  


치유하는 과정은 빠르지 않아요. 시간이 걸리죠. 어떨 때는 짧게나마 빛이 비치는 것 같다가도, 금방 다시 흐려지곤 해요. 


어느 날 밤, 저는 제가 부두를 걷고 있는 꿈을 꾸었어요. 저는 카트를 밀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너무 많은 물품들이 들어있어서, 앞을 전혀 볼 수 없었어요 - 마치 벽이 제 시야를 가리는 것처럼요. 어디를 둘러봐도, 저는 바람, 어둠, 그리고 비와 같은 나쁜 날씨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 같았어요. 그때 누군가가 나타났어요. 그는 저에게 긍정적인 마음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그러고 나서 저는, 제가 밀고 있던 카트의 오른쪽 멀리에 빛나는 햇살과 그 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순간들 마다, 저는 희망을 찾을 수 있었어요. 왜냐면, 제가 지금 있는 구렁텅이의 어둠 속에서도, 저의 밝고 찬란한 부분들이 언젠가는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위 이야기는 던컨 씨의 책 <Rachel: A true account of a life and summer never to be forgotten>이라는 책에서 발췌되었습니다. 


그레고리 던컨 씨는 텍사스, 시카고, 버지니아, 스페인에 머물다가, 현재는 미국의 북서부에 살고 있는 음악가이자, 교육자이며, 작가입니다. 그는 마음 따뜻하고 에너지 넘치는 두 마리 반려견을 돌보지 않을 때에는, 주로 트럼펫을 연주하거나, 글을 읽거나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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