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른히 Oct 31. 2021

온기에 대하여

구김살 없이 뻣뻣한 책에서는 오늘도 엄마의 온기가 느껴진다

내가 스무 살 이후 서울에 터를 잡고 살아가면서 엄마는 종종 고향에서 서울로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식과 함께 서울에서 며칠을 보낸 엄마를 버스 터미널에서 배웅할 때면, 엄마는 가방 깊숙이 하얀 봉투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은행 로고가 박힌 봉투에는 빳빳한 오만 원 두 장이 들어 있었다. 며칠간 자신 때문에 돈과 시간을 쓰지 않았냐면서 봉투를 건네는 엄마의 손은 무척 거칠어져 있었다. 손가락이 길쭉길쭉해서 웬만한 가죽 장갑이 맞지 않던 하얀 손에 봉투를 쥐고서, 엄마는 나에게 용돈을 주고 싶었다며 활짝 미소지었다.


웬만한 자식이 그러하듯 나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며 괜찮다고 한번 튕기는 척했다. 그러고 나서 엄마의 성화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돈을 바로 받아 챙겼다.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대학생에게 그 돈은 가뭄에 내리는 단비이자, 고향에서 묵묵히 일하는 엄마의 시간 자체였다. 내 손을 꼭 잡고 봉투를 쥐여 주던 엄마의 손은 무척 따뜻했다.


엄마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돈을 무엇에 먼저 쓸지 고민하다가 나는 서점을 떠올렸다. 당시에 터미널과 이어진 건물 아래층에 커다란 서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내려와서 왼쪽에 모습을 드러내는 서점을 마주하면 나는 홀린 듯이 그곳에 빨려 들어갔다. 서점 안 여러 매대마다 책이 빼곡히 눕혀 있었다. 누운 책들을 일으켜 세워 한참 펼쳐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Photo by Hatice Yardım on Unsplash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다는 이유로 서점은 어느샌가 집 앞 정류장처럼 들러야만 하는 곳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가난한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책 한 권도 자신 있게 사 들고 나오지 못했다. 그때의 아쉬움이 마음에 자국을 남겼는지, 나는 버스 창문 너머의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마구 흔들며 배웅하고서 하얀 봉투를 꼭 쥔 채 터미널 아래 서점을 찾았다. 


눈요기할 때와는 달리 서점 곳곳을 둘러보며 신중하게 책을 골랐다. 엄마가 주신 돈은 넉넉했지만, 내일을 걱정해야 한다는 핑계로 책 한 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나는 자주 소설책을 골랐다. 그러고서는 뿌듯한 마음으로 계산대에 찾아가 뻣뻣한 오만 원 한 장을 건넸다. 책과 거스름돈으로 돌아온 엄마의 온기를 품에 꼭 안고서 집으로 돌아갔다.


부푼 마음으로 대학에 들어섰지만, 소위 ‘문과’라는 이유로 자조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점점 꿈을 잃어 갔다. 3월 입학과 함께 학과를 옮기거나 반수를 치러서 다른 대학교에 가야 한다는 볼멘소리가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하고서 내 귀에 들려 왔다. 도서관에서는 수능 문제집을 푸는 동기가 앉아 있었고, 강의실 뒷자리에서는 반수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다. 배우고 싶은 것으로 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우기던 나의 옛 모습이 슬며시 떠올랐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그러한 사람들 속에 섞이지 못했다.


서점에 들러 책을 사는 것은 어쩌면 전공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취업률이 낮아 다들 말리던 전공을 택한 딸에게 기꺼이 비싼 등록금을 내어준 엄마 앞에서 나는 종종 위기감을 느꼈다. 전공과 관련 없는 직업을 택해서 잘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나의 선택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끌끌 찰 사람들에게 안줏거리를 주고 싶지 않았고, 또한 나를 믿어준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건네준 돈으로 매번 책을 사서 읽으면서도, 나는 무엇을 하며 먹고살지 정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대학생 시절을 그저 흘려보냈다. 그리고 몇 년간 직장인으로서 우여곡절을 겪는 와중에 책장에 세워진 오래된 책 몇 권이 눈에 들어왔다. 터미널 아래 서점에서 샀던 책들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바로 눕힌 다음 펼쳐보았다. 그 책들을 읽었을 때의 감상과 함께 잊고 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책에서 엄마가 건넸던 하얀 봉투와 함께 학점과 상관없이 배움을 찾아 헤매던 내가 겹쳐졌다. 그제야 나는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하던 일을 접고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으며, 나의 책장에는 오래된 책들과 함께 내가 만든 책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다. 구김살 없이 뻣뻣한 책에서는 오늘도 엄마의 온기가 느껴진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Hatice Yardım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에잇, 탁나버렸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