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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keone Feb 04. 2016

배우/수정테이프

- 단어로 만드는 이야기들 -

가끔 tv를 속에서 희귀병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보곤 한다. 희귀한 불치병이지만 치료를 하지 않아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서 조금 불편하게 사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 희귀한 병을 앓고 있다. 병이라고 해도 가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병을  이해하기는커녕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아서 병을 숨기고 있다.


나는 조금이라도 타인을 부러워하는 방식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실제로 그 사람이 되어버린다. 나이나 체형이나 성격까지 어떤 제한도 없이 마치 복제를 하듯이 그 사람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한번 변하면 최소한 한 달 전까지 그 어떤 모습으로도 변하지 못한다. 물론 증상이 약화돼서 다시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원하면 돌아갈 수는 있지만 요즘 들어서 점점 타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는 문제가 생겼다.


어릴 때는 나의 병을 가족들도 인지하지 못해서 문제가 심각했지만 그나마 가족들이 알아줘서 적응을 할 수 있었다. 워낙 희귀한 병이라 처음에는 타인으로 변하는 이유조차 알 수 없었지만 원인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된 후로는 타인으로 변해도 조금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타인이 된 순간부터는 남들에게 내가 나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는 배우가 되어야 했다. 가족들은 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내 증상을 잘 모르거나 나를 잘 알지만 증상은 처음 보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연기가 필요했다. 그것도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닌 남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재연해야 해서 평소에도 자신을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고, 조금은 냉정하고 차갑게 변해가는 것 같았다.


사춘기가 되고 방황하는 시기에는 타인의 모습이 되어도 스스로를 연기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그냥 바뀐 모습에 나를 맡겨버렸다. 그렇게 연기조차 하지 않는 나는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고 그것이 방황하는 시기의 내가 그나마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예상하기 어려운 나의 모습을 학교도 받아주기 어렵고 스스로도 굳이 학교에서 지낼 이유를 찾기 어려워 내 발로  뛰쳐나와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방황은 사춘기를 지난 후에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됐다. 그 시기에 나는 타인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살아가고 있었다. 점점 원래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은 거의 사라지게 됐다. 나는 살아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것과 같았다.


타인의 모습에 중독되듯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나를 숨기기 위해 내가 지니고 다니는 명함을 포함한 여러 가지 이름이 새겨진 흔적들에 수정테이프를 사용해서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다녔다. 수정테이프로 가볍게 이름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속이기에는 충분했다. 결국 원래 나의 이름은 덕지덕지 뒤덮여 잘 보이지도 않게 됐다. 점점 깊게 그런 모습에 적응되어 원래 나의 모습을 기억에서조차 거의 잃어갈 때쯤 문득 가장 오랫동안 들고 다니던 명함을 보다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나의 병은 워낙 희귀해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이렇게 무작정 타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변해버리지 않는 게 아닐지 걱정이 시작됐다. 오랜만에 몰래 찾아간 집에는 너무 많이 변해버린 가족들의 모습과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몇 번이나 같은 모습으로 우연을 가장 한 채 가족들 앞을 지나가면 가족들에게는  가장된 우연이 아닌 완전한 우연이 되어 스쳐 지나가 버렸다.


태어나서 그렇게 크고 강렬한 외로움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었다. 외로움은 쓸쓸함을 지나 거의 공포에 가깝게 다가왔다. 모든 것을 잃은 듯한 감정을 안고 명함을 바라보다가 뭔가에 홀린 듯 수정테이프 자국을 벅벅 긁어봤다. 이성을 잃고 긁는 바람에 긁히고 헤지긴 했지만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이름은 그 자리에서 조용하고 우직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지 그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격해져 버려서 눈물이 울컥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름을 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집 앞으로 투벅투벅 걸어갔다. 벨을 누르고 나온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솟구치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져 버렸다. 필사적으로 나의 과거 모습을 기억하며 일류 배우가 된 것처럼 연기를 해봤지만 어머니는 질색을 하며 도망가 버리셨다. 그 표정에서는 내가 없는 사이 개념이 없는 사람들이 들이닥쳐 나인 척했던 아픈 기억이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연신 어머님을 불렀다. 물론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잘 기억도 나지 않고 노력에 비해 성과는 없었다. 결국 어머니께서는 매몰차게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가 버리셨고 나는 넋을 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집 앞 거리에 청승맞게 앉아있는데 눈치 없이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이 모자만 눌러쓰고 있는데 저 멀리서 가족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오붓하게 걸어오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워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나의 모습을 변할 생각조차 없었다. 나의 병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모습이  된 지 이미 몇 개월이나 지났지만 반응이 없었다. 분명 병이 치료된 것이라면 기뻐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걱정하던 일이 일어난 것 같았지만 가족을 잃은 나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의욕도 없었다. 슬퍼할 기운도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날씨가 개이나 싶어 고개를 들었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햇살이 아닌 우산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어머니께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기껏 씌워주신 우산 속에서 나는 다시 눈물로 젖어버리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가족들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병원에 가서 수 많은 테스트를 거치고 실험하고 나서 예상은 했지만 완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됐다. 포기하지 않고 그날부터 오랜 시간 동안 수십 차례가 넘는 성형을 통해서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연기가 필요 없는 나의 모습으로 되돌아 온 그 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가족들의 미소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날은 오랫동안 원하던 진정한 내가 된 날이다. 나의 두 번째 생일. 나는 나로 다시 태어났다.






누구나 소재 신청 가능합니다. 

아래쪽 글을 참고하시고 신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s://brunch.co.kr/@ehdwlsez4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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