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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산티아고 순례길 가는 것 어떻게 아셨어요?

순례길 떠나기 전 이미 기적은 내 곁에 있었다

by 오늘의 커피

2008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직전의 일이다.


일요일을 맞아 주일 미사를 드리러 서울의 제기동 성당에 갔다. 내 교적이 있는 본당은 아니었지만 주말에 그쪽에 일이 있어서 갔다가 미사 시간에 맞추어 들린 성당. 실은 바쁜 일이 있어 미사를 빼먹을까도 생각했는데, 그래도 가톨릭 성인을 기리는 도보 성지순례길을 떠나는데 주일미사를 빼먹고 가기에는 여러모로 찜찜하여 굳이 내가 다니는 성당도 아닌 성당을 찾아간 것이었다.


미사는 마침 유명한 함세웅 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였다. 정의구현사제단 창립을 주도하기도 했고, 오랜 세월 민주화 투쟁에도 함께 해왔던 함세웅 신부. 그분이 당시 제기동 성당 주임신부님이었던 것이다.

ham.png 네이버에서 '함세웅'으로 검색하면 바로 이 신부님이 나온다.


여느 미사와 다름없이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던 미사. 성경 말씀을 읽는 제1독서, 제2독서와 복음까지 끝나고 신부님의 강론 차례가 되었다. 이제는 오래되어 정확히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당시에 본당 주일학교 학생들이 어딘가로 도보 성지순례를 떠난다는 말씀이 나왔다. 지역은 충청도의 어디쯤 되지 않았을까. 학생들이 무사히 걷고 올 수 있도록 다 같이 응원의 기도 해달라는 말씀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내 귀가 번쩍 뜨이는 일이 생겼으니, 신부님께서 갑자기 유럽에 아주 유명한 도보 성지순례 길이 있다는 말씀을 꺼내시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사도 야고보 이야기부터 이 길에 대해 신자들에게 약간의 시간을 들여 설명을 하신 것.


아니 신부님,
제가 다음 주에 그 길을 떠나는 것 어떻게 아셨어요?


안다, 신부님은 본당 신자도 아닌 내가 누군지 당연히 모르고, 내가 다음 주에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는 것은 더더욱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혹은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그날 하필 정신없이 바쁘던 나를 제기동 성당의 미사에 참석하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고, 존경하는 함세웅 신부님의 그 강론을 통해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듣게 하여, 그 결과로 내가 힘과 용기를 내어 순례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믿지 않는 이에게는 이 모든 게 우연의 일치이지만,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게 그분의 뜻일 수도 있는 것.


이 길이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하러 떠나고 순교했던 사도 야고보를 기념하며 만든 길이라는 것을 이 순례길을 떠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알지만, 그렇다고 그 길을 걷는 모든 이가 자신이 걷는 이유를 종교에 두지는 않는다. 사실 종교적 이유보다는, 걷기 좋게 만든 도보 코스와, 순례자를 배려한 숙박/도장/증명서 등의 체계, 그리고 스페인의 문화와 자연을 즐기는 차원에서 오는 사람의 비중이 훨씬 클 것이다. 내게도 역시 그런 의미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길이 종교적인 의미가 없는 길이었다면, 오직 운동이나 관광을 위한 길이었다면, 나는 그 멀리 스페인 땅까지 떠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리고 떠나기 직전 제기동 성당에서의 미사가 그 길이 가진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내가 다시 한번 떠올리게 했고, 그것이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두 다리로 힘겹게 걸으며 가끔은 내가 여기서 왜 이 고생이지 하는 생각이 들 때 내내 내게 힘을 주고 나를 정신적으로 지켜주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이 길을 떠난 이유와 종교는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였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다.


spain-1562374_1280.jpg 스페인 피니스테레 (출처: pixabay.com)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음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게 된다면, 좀 더 종교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걸어보고 싶다. 걷기 외에도 좀 더 시간을 할애하여 유럽의 오래된 성당, 순례길, 그리고 문화 전반에 녹아 있는 종교적인, 영적인 의미들을 찾아보고 싶다. 다음 순례길에도 그분께서는 내가 예상치 못한 기적을 보여주실 것이고, 그로 인해 영적으로 더욱 풍성한 순례길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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