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치 향유 - 필름사진을 본 후, 쓰고 그립니다
블랙: 엄마, 나는 이렇게 살기 싫어. 엄마 아빠가 반대하면 나랑 까망이라도 나가서 살 거야.
엄마: 정신머리 없는 것 같으니. 고작 2년 살아놓고 뭐가 지겹대? 엄마랑 아빠는 이 집에서 6년을 살았어. 그래도 불평 한마디 한 적 없다. 우리라고 답답한 적 없겠니? 나가서 살아봐라. 누가 너 밥 한 끼 챙겨주나!
까망: 그래도 엄마 아빠는 그 전에 3년 동안 바깥 생활을 했다고 했잖아요. 우린 하나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궁금할 수 있지.
아빠: …
엄마: 겪어 봤으니까 하는 말이다! 여름엔 상한 거 주워 먹고 탈 나고, 겨울엔 혹한에 떨며 차 보닛 같은 데 찾아 들어갔다가 차가 출발해서 다치고 그랬어. 아빠 꼬리가 괜히 저렇게 짧은 게 아니라고. 차 바퀴에 꼬리가 깔려서 거의 죽어가던 걸 거두어 키워준 게 인간 집사라는 걸 왜 모르니?
블랙: 그러면 뭐해? 모닝 노크도 안 하고 매너 없이 갑자기 차를 출발시킨 게 지금 집사네 오빠잖아. 그리고 집사 얘기도 할 말 많아. 걸핏하면 여행 가서 일주일씩 안 들어오고. 화장실 모래도 안 치워줘서 냄새 때문에 죽겠다고! 일단 나가 살아보고 정 힘들면 다른 집사 찾든지 할 거야.
엄마: 세상 물정도 모르는 게 기세만 등등한 거 봐라. 너는 우리가 오냐오냐해주니 네가 잘난 줄 알지? 잘난 집사 고르려면 옆집 터키쉬 앙고라 정도는 돼야지. 너 같은 검은 고양이는 재수 없다고 쫓겨나기에 십상이야.
까망: 헐… 진짜? 언니… 우리 그냥 여기 있을까?
블랙: 웃겨. 우리가 언제 오냐오냐 자랐어. 맨날 그렇게 면박을 주고 자식들을 깎아내리는 말만 하니까 까망이 얘가 이렇게 주눅 들어 있잖아. 의지하고 인정받는 대상으로부터 자기 존재를 부정당하는 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 일인 줄 모르죠. 너도 이렇게 작고 허름한 동네 말고 다른 데 가서 살고 싶다면서. 기죽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
까망: 응… 사실 엄마, 나의 꿈은 여행가가 되는 거야. 생후 3개월 때 집사 책상 위에 펼쳐진 사진집을 봤을 때를 잊을 수 없어. 집에 있는 작은 화분 있잖아, 어떤 사진 속엔 그런 깨끗하고 선명한 초록빛이 커다란 언덕 위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거야. 그 초록색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컸어. 작은 화분에서 솔솔 풍겨오는 맑은 내음이 그 커다란 곳을 꽉 메우면 어떤 기분일까?
아빠: 그걸 산이라고 한단다. 아빠는 그곳에서 도시로 내려왔지. 거기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먹을 것도 부족하고, 다른 크고 매서운 야생 동물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블랙: 그렇게 말해 봤자, 직접 겪고 부딪혀보지 않으면 우린 이해 못 해. 엄마 아빠가 가 본 곳들도 세상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잖아. 설사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안락한 곳이라고 해도, 이렇게는 못 살아. 매일 같은 사료 먹고 그루밍이나 하면서 창밖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지나는 것만 몇 번이고 지켜보다가 죽을 순 없다고.
엄마: 너희들의 그 안전하고 안락한 삶이 우리의 꿈이라는 걸 왜 몰라주니?
블랙: 엄마는 우리가 꿈이지? 나랑 까망이는 중성화 수술해서 그런 꿈조차 없어. 그러면 평생 무엇을 바라면서 살아야 해? 우리가 행복한 건 엄마 아빠의 꿈이 아니야?
까망: 나는 예정된 삶이 짧아지는 한이 있더라도, 매 순간을 완전히 느끼면서 살고 싶어. 산?… 사진집엔 산 말고 그런 것도 있었어. 작은 사료통에 담겨있던 물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거야. 그 앞에는 만져보지 않아도 분명히 곱고 깨끗할 듯한 화장실 모래가 깔려 있었어.
블랙: 그건 바다라고 한대. 집사가 그 사진을 가리키면서 ‘이건 바다야. 넌 못 가- 나는 내일 갈 거지만.’ 이러고 또 5일이나 집에 안 들어왔다고. 어차피 태어난 이상 모두는 죽어. 그게 며칠이든, 몇 년이든, 몇십 년이든. 어차피 결말이 정해져 있다면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과정밖에 없어요.
엄마: 이렇게 나가기만 해 봐,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아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다시 생각해라.
블랙: 미안해요… 우리 마음도 이해해 주세요. 어쩔 수가 없어요, 이젠.
망연자실한 엄마와 아빠를 집 앞에 두고, 블랙과 까망은 골목을 걸어나왔다. 동네의 어귀를 지나던 중, 앞집의 나비와 마주쳤다. 수컷이면서 ‘나비’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앞집 코리안 숏헤어 부부의 아들이었다.
블랙: 뭐야, 너도 집 나온 거야?
나비: 나, 사랑에 빠졌어. 그래서 그녀와 길에서 살기로 했어. 부모님은… 힘들어 하셨지만 이해해 주셨어.
까망: 와… 우리보다 더 대책없는 거 맞지,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