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치 향유 - 필름사진을 본 후, 쓰고 그립니다
2월 1일 목요일 새벽 두 시. 새벽 하늘, 맑음. 단단하고 투명한 유리 너머로 펼쳐지는 서울의 야경을 처음으로 회사에서 보던 날. ‘빛난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토요일에는 애인과 신논현 역 근처의 빌딩 14층 이자카야 창가에 앉아 같은 야경에 따뜻한 사케를 곁들여야지.
2월 9일 목요일 밤 열 한 시. 서울의 밤을 꽉 채우는 이 불빛이 벌써 익숙해졌다. 지난 주말에도 출근을 해야 했다. 그래도, 출근을 한다. 지난 달까지만 해도 서울의 야경은 남산 타워에서나 볼 법한 생소한 것. 익숙한 것은 작은 방의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었으니까. 평일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한적한 길거리를 보며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만 할 수 있다면 하고 생각했으니까. 몸이 무거워지는 만큼 불안하게 흔들렸던 마음이 안정되어 간다. 흩뿌려진 저 불빛들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게 나의 위안이다.
2월 28일 수요일 밤 열 시. 서울의 빛무덤을 본 것이 스물 다섯 번 정도. 매일 자정을 넘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매일 회사에서 저녁을 먹는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저녁 드시겠어요?’ 하고 서로에게 묻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저녁은 뭘로 할까요?’
3월 29일 목요일, 새벽 두 시. 나에게 3월은 잔인한 달. 최근엔 야경조차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밤이 깊도록 얼굴을 뒤덮는 건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의 백열. 뉴스에서는 어느새 바깥 공기에 봄 기운이 돈다고 하던데. 사무실 안에서의 계절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사계절 중 그 무엇도 아닌 무의 계절이 이 안에서 계속된다.
4월 16일 월요일 새벽 세 시. 이제 집에 가야지… 아마 이 시간에 택시는 잘 잡히겠지.
네 시가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씻을 기운도 없어 무성의한 세수를 하고 조급하게 편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갈아 입는 도중에도 힘이 빠져 잠시 침대에 앉았다가, 불을 끄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후의 기억이 썩둑, 잘렸다. 눈을 떠보니 입 안에 비릿하고 끈적한 맛이 맴돌았다. 거울을 보니 마른 장미처럼 검붉은 피가 입가 부터 턱 끝 까지 줄줄 흘렀다. 처음엔 어디가 다친 건지 명확하게 알 수조차 없었다. 바닥엔 도예과 시절 만들었던 도자기가 깨져 있었다. 졸업하고 전공과 다른 길을 선택한 후 그 동안 만든 것들을 방 한 구석에 몰아둔 채 잊고 있었는데, 하필 넘어져도 그 자리로 넘어진 모양이었다. 시간은 새벽 다섯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지방에 있는 본가의 전화번호 대신 세 자리 숫자를 눌렀다. 곧 구급차가 왔고, 응급실에 혼자 누워 열 두 바늘을 꿰매었다. 증세를 진찰한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미주신경성실신이라고. 몸이 더 이상 못 견뎌서 두꺼비 집 내린 거예요. 이러다 죽을까봐. 그래도 이만해서 다행이네요. 계단 같은 데서 이러면 어떻게 될 지 몰라요. 앞으로 절대 무리하면 안돼요.”
다음 날 연락을 받은 엄마가 부랴부랴 서울에 올라왔다. 그녀는 잠시 눈물을 글썽이는 듯 하더니 곧 무섭게 화를 냈다.
“당장 그만 둬라. 그렇게까지 할 일이니.”
“아… 갑자기 빠져서 어떡하지. 다음 주가 프로젝트 마무리라 지금이 제일 일이 많을 땐데. 나 때문에 사람들 엄청 고생할 것 같은데…”
“넌 지금 네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지. 대단한 일이 아니라 대단한 착각이다. 너 없어도 회사 잘 돌아간다. 지금 너는 이 시간을 밀도있게 보내고 있는 게 아니야. 그저 남은 삶을 깎아먹고 있는 거라고.”
엄마가 한 말은 왜 항상 흘려 듣게 되는 걸까. 그리고 되돌아보면 왜 항상, 그 말이 다 맞는 걸까.
그 땐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회복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지만 병원에서 일주일도 채우지 못하고 퇴원 후 회사로 복귀했다. 턱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였다. 그리고 복귀한 그 날도, 서울의 야경은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다.
4월 27일 금요일 밤 아홉 시. 외상을 입었다. 아주 치명적인.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 우리들에게 다가와 대표가 한 말 때문이었다.
“은아씨는 좋겠네. 그렇게 쓰러지고, 붕대까지 칭칭 감은 퍼포먼스라니. 이제 아무도 은아씨한테 무리하게 일 못 시킬 거 아니야? 나도 일 하느라 힘든데- 경미한 교통사고라도 나서 생활에 지장 없을 만큼만 다치면 좋겠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몇 사람이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몸 안에서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나는 턱의 상처보다 심각한 외상을 입었음을 알았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인성도 능력도 바닥인 대표가 그렇게 싫었었는데, 그 혐오감조차 차갑게 얼어붙어 무감각 해졌다. 그 어떤 것으로도 데울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식어갔다.
외상(trauma)의 사전적 의미. 내부 또는 외부에서 오는 강력한 자극으로 인해 정신 기구가 갑자기 붕괴되거나 고장을 일으키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 보호막은 깨어지고, 자아는 압도되어 중재능력을 상실한다. 그 결과 무기력 상태가 따라오며, 이 상태는 전적인 무관심과 공황상태에 가까운 해체 행동으로 나타난다.
5월 1일 화요일 오후 네 시. 공원의 벤치에 앉아 한적한 거리를 보며 샌드위치를 먹는다. 그 일은 다시 하지 말아야지. 서울의 야경도 다시는 보지 말아야지. 무감각과 안정을 혼동하지 말고, 차라리 불안감을 온 몸으로 느껴야겠다. 턱의 상처보다 마음의 외상을 치유하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임을 나는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