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치 향유 - 필름사진을 본 후, 쓰고 그립니다
짧지 않은 보관기간, 호불호 없이 누구나 좋아하는 맛, 껍질 째 먹어도 되거나 껍질을 손으로 깔 수 있거나 하는 간편함 때문에 사과와 바나나는 모두에게 친숙한 과일이다. 그러나 영혜는 열 네 살이 되기 전 까지 사과와 바나나의 존재를 몰랐다. 아마 거리를 지나며 스치듯 본 적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도 먹어본 기억은 없었다.
영혜의 가족은 타인의 시선에선 거의 완벽했다. 피아니스트 엄마와 대학 교수인 아빠, 그리고 외동딸 영혜. 잘 모르는 어른들의 태도에서 영혜는 종종 그 사실을 느끼곤 했다. 선생님들의 미소, 식당 점원의 공손함, 동네 아주머니의 친절 같은 것들로부터. 그러나 이런 찰나의 얕은 따뜻함에 매달리고 싶을 만큼 영혜에게 가족이란 시린 결핍이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 아빠는 언제나 부재한 사람이었고 엄마는, 늘 곁에 있었지만 없었다. 말과 행동이 거의 없어 정물처럼 고요한 사람이었다. 깨끗하지만 먼지가 쌓인 거실의 소파에서 몇 시간이고 창 밖만 보고 있거나, 안 방 침대에 종일 누워있는 게 영혜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이다.
분명 가끔은 셋이서 식사를 한 적도 있었겠지만, 그런 저녁 식사를 잔뜩 기대했다가 놓쳐버린 상실의 기억이 영혜에겐 더 짙게 남아있다. 열 세 살의 어느 날, 아빠의 논문이 어디에선가 상을 받은 모양이었다. 출근을 하며 아빠는 엄마에게 조용히 저녁, 집에서 하지. 하고 말했고 그 순간 엄마의 눈빛에 잠깐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영혜를 데리고 마트에 갔고, 제철 해산물과 질 좋은 고기 등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사과와 바나나가 쌓여 있는 과일 코너를 지나쳐 비싼 가격의 철 이른 딸기와 애플 망고도 골라 담았다.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반짝이는 생기는 남아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모습에 영혜의 작은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비릿한 해산물을 다듬으며 엄마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종국엔 요리를 하다 말고 탁 하고 칼을 내려놓았다. 나지막이 무슨 말을 중얼거리고 엄마는 다시 안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그녀로부터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 어색하게 장난감을 만지작 거리던 영혜는 그 말을 들었다.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씻지도 않은 애플망고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날의 남은 일들을 마저 생각하려던 참에 누군가 어깨를 두드려 영혜는 정신이 들었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미대 동기 윤이었다.
뭐해? 무슨 야외에서 정물화를 그려… 벤치 색깔은 이쁘네. 아, 그거 기억난다. 너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서 처음 사과 먹어보고 신기해 했잖아.
어. 나도 기겁하던 네 얼굴 기억나. 분식집은 가 봤냐고 물어봤던가?
그건 나 아니고 준희. 근데 다 그렸으면 이 사과 내가 먹어도 돼?
너는 검은 반점 있는 바나나는 절대 안 먹더라. 원래 이 때가 제일 맛있는 건데.
야… 니가 바나나에 대해 뭘 알아… 먹어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게!
빨간 사과를 옷에 대충 문지르고 한 입 아삭 깨물며 윤이 웃었다. 그 웃음 뒤로 정오의 햇살이 비추었다. 특별하게 자랐다고 할 수도 있겠지. 영화로 만들면 이렇다 할 기복도 문제도 없어 지루하고 얄미운 삶일 거야. 어둠은 마음 속에서만 요동쳤고, 사실은 긴 시간 동안 이런 평범한 빛을 그리워 했어. 윤의 입 안에서 과즙이 터져 풍겨오는 사과향을 맡으며 영혜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