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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터마인 Feb 03. 2019

16. 달콤한 인생의 밤은 길어서

하루 치 향유 - 필름사진을 본 후, 쓰고 그립니다

 

 남들은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는 게 죽도록 힘들다는데, 저녁에 출근하는 나도 일어나는게 힘든 건 매한가지다. 늦어도 8시까지는 가야한다. 그러면 6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알람은 5시, 5시30분, 5시 45분, 5시 55분에 맞추어 귀를 때리며 울려대고, 그 때마다 난 짜증도 내지 않고 익숙한 손짓으로 끔, 끔, 끔 버튼을 누른다. 5시 55분의 마지막 알람이 울리면 이제 정말 일어나야 해, 하고 몸을 반 쯤 일으켰다가 잠시 벽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체감 5분정도 감고있던 눈을 뜨면 30분이 지나있겠지. 하고 눈을 떴는데 저녁 7시다. 오늘은 정말이지 대지각인걸. 


 메마른 손에 졸졸 물을 묻혀 푸석한 얼굴을 몇 번 문대자, 딸기맛 감기약 색깔의 물이 세면대에 잠시 고였다가 흘러내린다. 거울을 보니 한 쪽 콧구멍 밑부터 턱까지 쓱, 피의 길이 뻗어있다. 코피가 났네. 아무래도 출근은 공쳤다. 호세에게 아파서 쉰다고 문자를 보냈다. ‘오늘 너 지명한 손님이 몇 명인데 쉬어? 일단 내일로 미룰테니까 풀타임으로 뛰어.’ 화를 참으며 최대한 담백하게 쓰려고 노력한 게 눈에 보이는 문자다. 어느 업계든 상사 잘못 만나면 쉽지 않다던데, 비록 유흥업소인 토킹바지만 호세는 악질상사는 아니다. 나를 좋아해서 그런걸지도 모르지만. 나 또한 그 애호를 등에 업고 버릇없이 행동하는 일은 없다. 다만 코피가 날 때는 쉬어줘야 한다고 생각할 뿐. 나는 빠져나온 그대로 구멍이 뻥 뚫려있는 이불 속으로 다시 꼬물대며 기어들어갔다.


 새벽 3시에 한 번 깼다가 잠들고 8시가 되어서야 다시 눈을 떴다. 황혼이 내리는 매직아워나 어스름한 새벽녘과는 다른 온전한 아침의 햇빛이 창으로 쏟아진다. 비타민D의 활성화를 위해 볕을 좀 쐬어볼까. 붕 뜬 파마머리를 성근 빗으로 대강 빗고 입고 있던 파자마 원피스 위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베이지색 니트 가디건을 걸치고 시체스 해변으로 나갔다. 평일의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백사장에는 몇 사람만이 바다 위 부표처럼 점점이 박혀있을 뿐이었다. 모래를 사각대며 걷다가 중간 쯤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나도 백사장 위의 부표 하나로 남기 위해서. 가만히 바다를 보고있는데 사각사각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나이 지긋한 한 남자가 풀썩, 하고 내 옆에 앉았다. 뭐지? 이 할아버지는. 장사 안되는 식당처럼 이 넓은 백사장도 파리가 날리는데 굳이 왜 내 옆에 붙어 앉는거야?


 딱히 할 일도 없어서 힐끔 그를 관찰했다. 남자는 희끗한 머리와 늘어진 피부에 비해 군살이 없었고 목과 팔뚝에 굵은 선이 그려졌다. 꾸준히 운동해 다듬어진 몸이라기 보다는 오랫동안 몸 쓰는 일을 해서 나이에 비해 단단한 체격을 지닌 사람 같았다. 나의 시선을 느꼈던 걸까.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는 불쑥 말을 던졌다.

 라 돌체 비타에서 일하죠?

 네? 저를 아세요?

 라 돌체 비타는 내가 일하는 토킹바의 이름이었다. 달콤한 인생이라니. 술과 웃음을 파는 밤의 가게들은 곧잘 이런 진부한 이름을 내건다. 우리가 파는 건 이렇게 잠깐 믿고싶다가 아침이 되면 허탈할 달콤한 허상이라는 듯이. 

 제가 거기 단골입니다.

 이상하네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인데.

 방문하는 타임이 다를 거예요, 아마.

 타임이요?

 새벽 3시부터 5시까지, 두 시간 쉬고 거기는 다시 열어요.

 5시에 가게가 다시 연다고요?

 거의 2년을 일하는 동안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래요. 나는 거기에서 일하는 어떤 사람과 연애를 했는데…

 내가 일하는 곳에서 지켜야 할 원칙은 단 하나 뿐이었다. 손님과 연애금지.

 그 곳의 호세라는 관리자도 그 사람을 좋아했죠. 

 잠깐만요. 호세라고요? 그 여자가 누구예요?

 여자가 아니에요.

 네?


 그 곳은 새벽 3시부터 5시까지 두 시간 쉬고 게이바로 다시 열어요. 1년 전에 그 곳에서 미겔을 만났죠. 반 년 정도는 그저 함께 술을 마시다가, 그 후엔 끝나고도 같이 마시는 사이가 됐어요. 그 사이에 미겔은 등록금을 낼 수 있을만큼 돈을 벌었는데, 그래서 그만 두려고 했지만 호세가 막았어요. 그가 게이라는 사실과 불법인 업장에서 일한 걸 학교에 알리겠다고 협박하면서요. 그러다 점점 영업이 끝나고도 그를 만나기 힘들게 됐죠. 호세가 그를 놔주지 않았으니까요. 웃기는 건 호세는 자신이 게이가 아니라고 했대요. 밤은 길고 심심하니까 그를 만나는 거라고 했던가요. 찌질하고 처절한 남자였죠. 그래서 그를 없애줄테니 미겔에게 방학동안 바르셀로나를 떠나 있으라고 했어요. 아마 오늘 아침 비행기를 탔을 거예요.

 …그래서 그를, 없앴나요?

 펼쳐진 바다를 보며 담담히 이야기를 풀어놓던 그가 갑자기 나를 빤히 쳐다봤다.

 거짓말이에요.

 뭐라고요?

 다 거짓말이라고요. 방문하는 시간이 다른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알고 있겠어요. 나는 흔해빠진 늙은 이성애자고 몇 번의 밤에 외로움을 달래러 그곳에 들렀다가 구석자리에서 당신을 봤어요. 그러다 오늘 우연히 당신을 발견하고 재미삼아 말을 지어내본 거예요. 나와 호세는 친하진 않지만 오래된 친구죠. 일부러 시간을 내서 만나지는 않지만 마주치면 괜히 더 반갑게 인사하는 그런 사이요. 그저 당신을 좀 놀려주고 싶었어요. 그곳에서 유독 눈에 띄던 당신의 관심을 끌어보고 싶었달까요. 

 그렇다면 성공한 셈이네요. 분명 저의 관심을 사로잡았으니까. 그런데 아주 나쁜 방향으로요. 그런 농담에 즐거워하는 타입은 아닌지라. 이만 가야겠네요, 저는. 


 오랜만의 휴식을 방해받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해변 밖으로 걸어나갔다. 걷다가 뒤를 돌아보자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옅은 미소를 띄고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가디건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 찰칵, 하고 그의 뒷모습을 찍었다. 출근했을 때 호세가 없다면, 그가 진짜 죽거나 실종되었다면 이 사진을 들고 경찰서에 갈 거야. 그런데 그렇다면 그의 말이 다 사실이라는 뜻일까? 호세, 어디야? 꺼낸 아이폰을 다시 넣지 않고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워낙 다사다난한 직업인지라 그는 자다가도 폰이 울리면 깨서 연락을 받는 사람이었는데, 왠일인지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답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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