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는 어김없이 굉음과 함께 공항 활주로에서 맞는다. 열 네시간 근육을 움츠리고 앉아있다가, 퉁퉁 부은 다리를 움직여서 온갖 질문을 받으러 간다. 수상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호소의 미소를 지은 후에 짐을 찾아서 최대한 빨리 공항을 빠져나온다. 엄마가 바리바리 쟁여준 음식거리를 짊어지고 택시를 잡아타면 강건너로 보이는 불빛들이 보인다. 그러면 그렇게, 드디어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학기가 시작된다. 나는 좋아하는일을 좋아만 하지 않으려고 계속 커피를 마시고, 일기를 쓰고, 여자들을 그린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것, 그리고 노력과 결과를 즐길 수 있는것. 여름방학은 더할나위 없었다. 맛있는 것을 먹었고, 서핑을 했고, 모래에 몸을 비비며 낮잠을 잤고, 순간 순간 온통 코코넛 향기와 웃음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나는 그 여유로운 행복이 너무 신났다. 잔뜩 들떠서 더 크게 말하거나 웃었다. 여름방학속에서 계속 뉴욕의 흔적을 찾아대던 나는 드디어 뉴욕에 왔는데 이번엔 또 다시 여름방학의 흔적을 찾고있다. maybe i do live in the past.
괜찮다 어쩄든 현실이 고통스럽지는 않으니까. 그냥 향수어린 기억은 늘 그 순간보다 더 예쁘게 기억되고, 나는 예쁜것들을 좋아하는 것 뿐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시작해야하니까, 내 메모리에 새로 저장된 기억들을 하나하나 넘겨본다. 뭐가 좋았더라, 흥미로웠더라, 새로웠더라.. 뒤적거리다가 머릿속에 걸리는 단어들이 공책에 받아적혀지고, 그 단어들로 연상되는 다른 단어들도 적어진다. 이 기억에 저 기억을 섞어서 새 기억을 만드는 순간이 꼭 화학실험같다. 어떤순간의 온도와 어떤순간의 색깔과 어떤순간의 일상 오브제가 이렇게저렇게 날아다니다가 쾅 뭉치는 순간이 신난다. 서로에게 반응하는 순간들은 그 조합자체로 새로워진다.
몇주쯤 이렇게 과거의 기억을 먹어치우며 프로젝트를 하다가 보면, 발이 시려운 계절이 돌아오고, 그럼 나는 한번씩 세상에 정말 나 혼자뿐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해가 따듯하고 항상 다른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여름의 기억을 꺼낸다. 따듯한 모래에 발을 묻고 계획하나 없이도 하루를 처음부터 끝까지 꽉꽉채워서 보냈던 날들을 꺼낸다. 프로젝트를 하려고가 아니라 그냥 내 몸을 따듯하게 하고싶어서 또 기억을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위기의 늦가을이 지난다. 그럼 정말로 추운 칼바람의 겨울이다. 엄마와의 전화통화가 잦아지고, 길어지는 계절이다. 금세 컴컴해지는 날들에 집의 모든 불이란 불은 다 키고도 휴대폰 플래시라잇을 그림에 갖다대며 이 색깔이 맞나..확인하는 행위가 잦아진다. 뜨거운 커피를 정말로 appreciate하게 되며 여름사진을 여는 빈도가 잦아진다. 여름만 되면, 여름만 되면. 을 반복하며 프로젝트 마무리 작업을 한다. 이쯤 되면 아주 작은것들에도 여름을 연결시킨다. 여름만이 모든 근심의 해결책인마냥 여름을 외쳐댄다. 목도리에 쉬는 숨이 축축해도 괜찮다. 시간은 지나고 여름은 오니까.
퍼자켓을 입기엔 부담스러운 날씨가 오고, 스웨터를 입기엔 조금 더운 날씨가 오고, 긴팔을 입기엔 조금 더운날씨가 오고, 짠! 여름이 왔다.
물론 여름이 오는 그 길을 세세하게 날짜를 세면서 기다리진 못한다. 5월은 과제 시간분배에 실패한 2학기를 마무리하는 달이라서 유난히 바쁘고, 덥거나 말거나 그렇게 눈물콧물 짜면서 기다리던 여름이 오는데도 ‘어 어 왔어 기다려봐 이것만 하고’의 건방진 애티튜드를 보인다. 중순이 넘어서 프로젝트가 끝난다. 죽은 곰처럼 잠자다 일어나면 여름이 온것이다. 어벙벙한 나는 일단 수영복을 입고 바다로 간다. 아직 물이 차서 정신이 들면 그때부터 여름을 즐기면 된다.
과거에 산다기보단 과거를 먹고사나보다. 과거를 먹어치워야 현재의 모든것에 불이 붙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과거에만 살거나 현재에만 살거나 하나만 선택하는 옵션은 없다. 그래서 늘 짐이 많지만, 갖고있는지도 잊어버린 짐을 뒤지면 항상 보물이 나오는법이라서 어느것 하나 버릴 수가 없다. 짐은 어느 순간부턴가 기념품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