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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식 Apr 24. 2021

나의 중국집 일대기

<조영권(글), 이윤희(그림)_ 중국집>을 읽고

  짜장면은 어릴 때부터 특별한 음식이었다. 외식을 할 만한 게 많이 없던 그때는 외식을 하면 중국집 아니면 돈까스였다. 아니 어쩌면 부모님 입장에서는 입이 짧은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다닐 만한 곳이 두 곳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아들은 중국집에 가면 주로 먹는 것은 짜장면뿐이었다. 가끔 양장피나 팔보채 같은 것들이 있어도 손이 잘 안 갔다. 나에게는 그저 탕수육이면 최고였다. 그래서 언제나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과 탕수육이었다. 그 조합이 나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걸 보면 완벽한 세트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그 완벽한 세트를 정말 많이 시켜 먹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는 정말 말 그대로 산골짜기에 있어서 점심시간에 먹을 수 있는 건 학식과 배달 음식뿐이었다. 주변에 경쟁 식당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 학식은 발전이 없었다. 최악이었다. 가격은 저렴했어도 까다로운 이십대를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아니 아마 그 학교 모든 사람들은 만족하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우리는 배달 음식을 많이 시켜 먹었다. 지금이야 배달 음식이 너무 많아 뭘 골라야 할지 힘든 상황이지만, 그때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앞서 얘기한 대로 우리 학교는 산골짜기에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없었다. 심지어 총학생회 사업으로 도시락 단체 주문 대행까지 했었던 적도 있었다. 아무튼 그 열악한 환경에서 시킬 수 있는 배달 음식은 역시 중국집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도 그렇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거의 점심을 중국집에서 시켜 먹었다.

  

  근처 중국집에 있어서 우리 학교는 놓칠 수 없는 시장이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대림각, 만다린, 만리장성 등 많은 중국집이 있었다. 그리고 학생회관 앞에는 언제나 배달 오토바이가 서너 대가 있었다. 그것은 산골짜기에 있는 우리 학교가 배달의 종착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집 배달원들은 자주 학생회관 앞에서 모여 쉬곤 했다. 어느 날은 서로 모여서 급여나 노동 환경을 물어보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우리 마음대로 그 모임의 이름을 '짜배협'이라 불렀다.


  아무튼 그 시절은 짜장면이 정말 지겨웠다. 그래서 졸업하고는 꽤 오래 짜장면을 안 먹었다. 그리고 다시 중국집을 찾은 건 졸업하고 2년 뒤었다. 사실 그전에도 중국집에 가거나 배달을 시키긴 했었으나 찾아서 먹었다고 할 순 없었다. 선택할 다른 메뉴가 없을 때 무난하게 선택하게 된 정도가 맞았다. 그러다 중국집에 가봐야지 생각한 건 어느 선배 때문이었다.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유행이 바뀌던 그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트위터는 아싸라기엔 인싸이고 인싸라기엔 아싸이고 싶은 사람들이 하는 이상한 곳이다. 이상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유행에 따라 움직이기보단 취향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다. 어느 날 선배의 트위터에 중국집이 올라왔다.


  그 선배는 학교 다닐 때에도 멋있었었다. 다른 표현을 쓰고 싶지만 우아하다고 하기엔 세련됐고 세련됐다고 하기엔 투박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취향이 항상 돋보였던 사람이었다. 역시 멋있다는 말이 제일 잘 맞다. 그 선배의 미니홈피 배경음악 선곡이 좋아서 일부러 들어가 찾아 듣기도 했었으니까 어느 정도는 같은 취향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오랜만에 중국집을 가고 싶었다. 그 선배가 좋아한 곳이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선배가 올린 중국집은 연남동에 있었다. 그리고 배달은 하지 않았다. 테이블도 인테리어도 깔끔했다. 2층에 위치해 있었고 밝게 해가 들어왔다. 이 정도 기억하면 갔을 것 같지만, 안 갔다. 그냥 블로그를 열심히 검색만 해봤다. 말 그대로 찾아만 본 것이다.


  중국 요리하면 짜장면과 탕수육의 불변의 선택을 허물게 된 건 그 무렵이었다. 그건 선배 탓도 어떤 엄청난 계기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어떤 음식을 시켜도 감당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비싼 음식을 시켜도 될 만큼 비용을 감당할만 했고, 새로운 음식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어릴 때는 매번 새로운 것들 속에서 여유로운 척하고 싶었다면 이제는 기꺼이 새로운 것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팔보채도 양장피도 맛있게 먹는다. 어쩔 때는 고추잡채에 꽃빵이 당기는 날도 있다. 집에서는 자주 가지튀김을 해서 먹는다. 하지만 언제나 제일 많이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이 짜장면이다. 그리고 탕수육!

이 글을 쓰다 보니 작은 소망이 하나 생겼다. 그건 친구들과 중국집에 가는 것. 둥근 큰 식탁에 앉아 큰 접시에 나오는 다양한 요리를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날은 맥주 대신 소주를 꼭 주문할 것이다. 술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면 조금 더 비싼 술을 주문할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되면 나의 중국집 일대기에 또 하나 좋은 기억으로 남겠지. 앞으로도 꽤 오래 중국집에 갈 것 같다.


  202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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