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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바닥 Sep 25. 2023

2. 부장님은 검정이 싫다고 하셨어.

멀고도 험난한, 캘린더+다이어리+패키지 = 도합 7000원 제작기

다이어리 제작 진행이 한참이다. 아직 업체와 계약도 못했다. 몇 곳과 미팅을 하고, 최종적으로 한 곳과 계약을 진행하기로 했다.



-메일-

안녕하세요 ooo주임님,

ㅇㅇㅇ회사의 손바닥(본인)입니다.

아래와 같이 견적내서 마무리 지어주시면 됩니다.

1. 기성품 다이어리

전면 불박 1개, 종이포켓, 볼펜꽂이, 수첩밴드, 내부 화보 2p, 속지 컬러수정 3도

2. 캘린더

검정 스프링, 받침레쟈크, 풀컬러 인쇄 16p

3. 패키지

실링 봉투 (은색에 화이트칠, 로고 및 재활용표기 은박)

.... 중략


요청사항을 제공했고 다이어리, 캘린더, 패키지를 포함해 최대 7300원에 맞춰줄 것을 요구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거의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요청이었으므로 업체도 할 말을 잃고 돌아갔다.



그래도 기성품 다이어리를 하는 조건으로 업체에서 제작을 진행해 주기로 했다.


메일을 보낸 뒤 갑작스러운 부장의 호출이 있었다. 부장은 내게 다이어리 진행건에 대해 물었다.


"업체에서 가져온 상품 보시겠습니까?"


"가져와봐"


상품을 보자마자 무섭게 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검정?!?!!? 검정???!!!!"


갑자기 높아진 부장님의 데시벨, 놀란 팀장이 저 멀리서 달려왔다. 약간 그 3초간은 내게 영화 같은 순간이었다. 부장의 높아지는 목청에 순식간에 흐른 정적 멀리서 뛰어오는 팀장과 뇌정지가 온 내 모습까지. 영화 한 편이 뚝딱이 었다.


그렇게 높아진 데시벨은 내려올 줄을 몰랐다.


"야 너 생각해 봤어? 우리나라에서 검정이 어떤 의미인줄????!!!"


...? 검정이 무슨 큰 뜻이 있었나 순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언성이었다. 이내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부장은 말을 이었다.


"야!! 우리나라에서 검정은, 상치를 때나 사용하는 물건이야!!!!"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순간 할 말과 어의를 함께 잃어버린 나는, 부장의 책상 위에서 '검정' 물건이 없는지 훍었다. 돌아다니는 내 눈을 발견한 건지 못한 건지 이어지는 소음은 끝날기미가 없었다.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검정이 뭐야 상갓집도 아니고 검정이!!!"


약간의 침묵이 이어지고 듣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부장님, 그건 고정관념 아니십니까?"


대답을 예상하지 못한 부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순간 우리 둘은 서로에게 할 말을 목뒤로 숨겼다.

부장은 분노를 삼키지 못한 듯 떨리는 음성을 겉으로 뱉어냈다.


"야, 고정관념이 뭐야?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야!!! 상치를 때 쓰는 물건 가져다오면, 회사 매출도 떨어져서 물건도 이런 걸로 준다고 생각할 거 아냐!!!!"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검정이어서 상 치르는 물건이고, 매출 떨어져서 검은색을 준다니? 도대체가 의식의 흐름고리를 판단할 수 없는 발언들에 나는 그 순간 내 귀가 음소거 되길 원했다. 다행히도 부장님 근처에 검정물건은 없었고, 나는 '부장님이 사용하시는 저 물건도 상갓집에서 사용하시던 겁니까'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어, 부장은


"너는 보고도 없이 이런 걸 마음대로 정하냐, 여러 개 샘플이라도 들고 와서 보여줘야 할 거 아냐"


참고로 다이어리 제작건은 타 부서에서 진행하던 내용이었다.


 우리 팀 과장이 옆팀이 다이어리 제작을 우리 팀으로 가지고 오고 싶어 했고, 자꾸 옆팀 회의에 참여해서 졸지에 내가 제작 업체를 알아보기 시작한 거다. 그전부터 과장이 부장한테 '상무님이 캘린더랑 제작된 상품 가지고 잘못 만들었다고 혼내셨다'라는 말을 전했다.


그 사이사이에 과장이랑 부장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내가 알 길 없었다. 갑자기 다이어리 회의를 하자며 나까지 불러서 대서 간 거고, 과장은 몸이 안 좋아 2일 병가를 낸 상태였다.


"과장한테 보고 받으시던 거 아닙니까?"


검은색이 고정관념 아니냐는 말 다음으로 부장의 발작 버튼이 한번 더 눌린 순간이었다.


"지금 자리에도 없는 과장얘기가 왜 나와!!!! 나는 얘기 들은 적도 없고 몇 번 물어본 게 전부야@~#@#!!!"


순식간에 고함이 사무실을 채웠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이어 보고가 들어가지 않은 줄 몰랐다, 죄송하다, 앞으론 보고 하고 진행하겠다라고 말을 붙였다. 하지만 이미 부장의 귀에서 내 목소리는 아웃된 상태였다.


"너는 검은색이나 들고 오고!!!! 나때 이런 거 제작할 때는, 샘플 다 들고 와서 물어보고 진행했어!"


그놈의 검은색 타령... 듣다 지쳐갔다. 사실 검은색으로 선택된 이유에는 회사가 제작은 해야 하지만 돈이 없어서, 4000원~4500원 안쪽으로 다이어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다이어리를 1개 사기도 어려운 가격이지만, 우리 회사가 원하는 건 너무 많았다. 로고 불박도 넣어야 했고, 내지에 회사 소개 화보도 있어야 했다. 그리고, 명함꽂이와 가늠끈 심지어 볼펜꽂이에 고무밴드까지.. 원하는 게 너무 많았다. 그 모든 걸 다 맞출 수 있는 건 업체에서 가지고 온 검정 다이어리뿐이 없었다.



"부장님, 원하시는 색상과 배색스타일 있으시면 따르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부장은 그냥 검정이 싫었던 거다. 검정도 싫고 나도 싫던가.


결론이 나지 않는 이야기에 부장은 컬러에 대해 말하지 않고 대화의 논점을 흐렸다.


 '너는 왜 보고를 이런 식으로 하냐, 네가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게 문제다'로, 내가 죄송하다고 말하면 다시 검정이 시작되는. 마치 돌림노래처럼 끝나지 않는 이야기.



나도 알고 있었다. 부장님은 다른 색상이나 스타일을 원한 거나 생각해 놓은데 없다는 걸.


하지만 그가 나에게 대안 없이 맹목적 비난을 하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심지어 검은색을 가져온 업체와 계약을 한 것도 아니었다. 원하면 언제든지 컬러는 (단가만 맞으면) 바꿀 수 있음도 얘기했다. 보고는 과장에게 못 받은걸 정말 몰랐고, 죄송하다고도 했다. 검정이 싫으면 바꾸겠다고도 말이다.


하지만 뜨거운 냄비처럼 화는 식을 줄 몰랐고, '너 가!!!!'라는 고함과 함께 대화가 끝이 났다.




<번외>


이어 다음날. 나는 정시 출근보다 3분 일찍 회사에 왔다. 하지만 부장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는지, 양팔을 골반 위에 올리고 한껏 몸집을 부풀리고 있었다.



나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대리를 같이 불러다가 또 한 번 사무실이 떠나라가 소리를 질렀다.



"X대리 지금 몇 시야? 어?? 뒤에 시계 봐봐!! 누가 이시간에 출근하래?"

"나한테 익스큐즈 할만한 상황이 있었어? 없었어??!!!!! "

"X대리, 어? 어떻게 생각해 어??


죄송합니다 라는 답이 조그맣게 들려오고 난 이게 어제 검정의 여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이어오는 소리침에 나라는 대상에 대한 주어가 명확하게 있었다.


" 손바닥, 이런 식으로 근무할 거면 회사 나오지 마!! 그만둬!!!!!!!"



검은색으로 다이어를 했다고, 얘기가 이렇게까지 이어져야 하나.


나 혼자였다면 3분 정도 일찍 왔는데 부장님이 말씀하신 10분보다는 덜 일찍 왔으니 죄송하다. 하지만 이런 식인건 불합리 하다라고 말했겠지만, 옆에 서있는 대리는 무슨 죄인가.


그만두라는 고함까지 함께 듣는 대리에게 너무 미안했다. 부장은 이걸 노린 걸 지도 모르겠다.


"예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앞으론 일찍 오겠습니다"

내 목소리에 부장은 씩씩거리며 화를 이어갔고 이내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대리에게 미안한 웃음을 짓고, 메신저로 사과를 한 뒤 하루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다.


 정작 내 옆자리에 30분을 넘겨 들어온 다른 직원은 혼나지 않았다. 이런 앞뒤 상황을 고려해 보니, 부장은 꺾이지 않는 나를 짓밟고자 혼을 낸 것 같았다.



평소에 나는 1분~4분 정도 늦게 들어올 때가 있다. 핑계를 대자면 재작년 부서에선 일이 너무 힘들었고(기본 10시 퇴근에, 한해 야근 시간만 150시간을 넘겼다.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 그리고 존중이 없는 회사를 다니며 현타가 많이 오고 있었다. 몇 번을 그만두겠다 말하고도 회사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사표를 수리해주지 않더니 졸지에 나를 다른 부서로 발령을 냈다. 내 공백을 채울 다른 인력을 덥석 받고 말이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때 그만두지 않은 내 잘못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원치도 않은 다른 부서에서 생활을 시작했고, 한 해 동안 검은색사건과 같은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생겼다.


 언어폭력이 난무하는 회사. 디자이너로써 존중받지 못하며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단 1분도 일찍 오기 싫어 1층을 배회하다가 올라간 적도 많았다.


여하튼, 정시출근을 지키지 못한 내 잘못은 맞다. 그것에 대해 혼을 낸다면 할 말이 없지만, 죄 없는 다른 동료까지 끌어드려서 혼내고 심지어 진짜로 늦은 직원은 혼내지 않았다.


교묘하게 '자신의 위신을 새우면서 나를 고립시킬 방법을 찾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며 기다란 뱀으로 성장하고 있을 무렵, 부장이 부서 전체 소집을 걸었다.


말이 부서 회의였지, 1년에 1번밖에 안 하던 회의를 불러드리는 건 이유가 뻔했다.



다 같이 모인 회의실, 정막을 깨고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서원들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내 떨리는 목소리에 부서원들은 그저 괜찮다고만 말해줬다.



부장이 회의실로 들어오고 노트를 탁하고 던지며 갑작스럽게


"아침일은 소리쳐서 미안하다. 아침 그 사람들한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


라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부장 옆자리에 앉아있는 나는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말하는 게 그저 다음말을 이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내 방식에 불만이 있으면 노조에 가서 말을 하든지 말든지 그건 알아서 하고, "

"나도 이제는 말로 안 하고 있는 수단을 동원해 근무 태도에 대해 징계를 내릴 거다"



그 말은 분명 나를 향한 말이라고 느껴졌다. 다이어리를 검은색으로 했다고, 그간의 근무태도까지 들고 나와 징계를 내리겠다니. 온 세상 디자이너에게 널리 알려야겠다. 회사 물품은 절대 검정으로 하지 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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