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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바닥 Oct 27. 2023

9. 아빠, 저는 제가 잘 살아갈 거라 믿어요.

직장이라는 울타리 밖에서도 전 제가 어른일 수 있음을 알아요.

가족과 함께 사는 31살, 부모님의 부모님=할머니는 빨리 우리를 시집보내라고 하셨다. 어른들에게 '결혼'이란, 보듬으며 키운 자식이 마치 '어른'으로 나아가기 위해 당연히 거쳐야 하는 일 같아 보였다.


집에 퇴사 사실을 알렸다. 딸이 신용평가사를 '잘'만 다니고 있는 줄 알았던 아버지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퇴사를 알린 그날, 어른이 돼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과 조우했다.


"애야, 그곳은 마치 너의 놀이터와 같은 곳이었어. 네가 마음껏 일하고, 정당한 대우를 받고, 사회적으로도 나쁘지 않은 위치에 있는 안정적인 직장, 마치 아빠의 자랑과도 같은 장소였단다"


아버지는 내가 직장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스스로 걸어 나온 걸 안타까워하셨다. 우리 아버지세대에게 안정적인 직장은 마치 결혼처럼, 필수적인 존재였으니까. 새삼, 아버지의 마음이 눌러 담긴 문장을 들으며 '퇴사를 한 게, 잘못한 일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은 하루는 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하다가, 또 하루는 퇴사를 말했던 날의 내 입장에 동의를 했다. 마음이 수십 번 퇴사에 대해 곱씹으며 내 결정을 후회로 만들어갔다. 너덜너덜해진 자신을 보고 있자니, '내가 정말 31살이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만 먹었고 등치만 커졌지, 내 마음은 20살 아니, 10살 때랑 다름없어 보였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안 되는 것들이 참 많았다. '불량식품을 먹으면 안 된다. 티브이를 가까이에서 보면 안 된다. 게임을 많이 하면 안 된다.' 등 어른들이 세운 규칙을 따라야 했다. 하루는 몰래 초콜릿을 먹었다. 그리고 초콜릿을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아버지의 말에 혼자, 후회와 자책에 시달렸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저기서 초콜릿을 퇴사로 바꾸면 지금 상황같았다. 어른들의 염려는 아이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기 위함이다. 인생을 먼저 살았던 어른이 아이에게 내려주는 일종의 '편하게 사는 지침서' 같은 거다. 



편하게 사는 지침서에는 마찬가지로 지켜야 하는 규칙이 참 많다. '조신하게 말하고 행동하기, 자신을 낮추고 항상 겸손하기, (소득이 높은) 좋은 직업을 갖기, 안정적인 평생직장에 취직하기, 결혼적령기가 되면 가정을 꾸리기, 가족에게 헌신하며 살아가기' 등 인생의 선배가 조언해 주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조금 방향을 달리 생각해 보면 어떨까? 17살, 18살, 19살 - 고등학교를 자퇴한 친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자퇴를 한 친구가 인생의 잘못된 선택을 내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답은 틀렸다. 물론 고등학교를 그대로 다니고 졸업한 친구들에 비해 약간의 힘듦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자퇴를 했다고 '그 친구의 인생이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른들이 말하는 '편하게 사는 지침서'도 같다. 단지 제시할 뿐이지 따르지 않았다고 하여 '내가 인생에서 잘못된 선택'을 내렸다고 볼 수 없다. 물론 '편하게 사는 지침서'에 반하는 일은 그에 따른 힘듦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마저도 내가 내린 결정이라면, 스스로를 한 번쯤은 믿어볼 수 있지 않을까. 


퇴사를 했다. 아버지는 내 퇴사를 너무 마음 아파하셨다. 분노보다는 슬픔과 걱정으로 가득 찬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우리 아빠도 나이가 드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며 아버지가 제시한 '편하게 사는 지침서'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지켜왔다. 그리고 그게 어른으로 성장하는 길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지침서의 바깥도 어른이 살아가는 길이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용기 내서 말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잘 살아갈게요. 저, 제 인생 잘 살아낼 능력 있어요. 저를 믿어주세요."


나는 퇴사를 아버지에게 말한 그날, 한 발짝 나만의 '편하게 사는 지침서'를 적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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