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느 계급에 속해 있나요?
연일 뛰는 서울 부동상 가격에 사람들은 상실감을 느낀다.
실질적으로 부동산을 구매할 수 있는 화폐 숫자를 소유할 수 없기에 현실은 절망적이다.
하지만...
좀 더 냉정하게 개인적 차원에서 계급론을 바라 볼 필요는 있다.
나의 소유의 한계가 나의 소유인지, 타인 소유에 대한 욕망인지 구분은 해야 할 것 같다.
계급론은 인간이 올라가려는 욕구다. 그런데 이 욕구가 채워지면 또 다른 욕구가 생긴다. 사실 지금 부동산 가격은 욕망의 단계라고 볼 수도 있다. 수도권에 살고 싶은 사람들, 조금 더 서울 안으로 들어가고 좋은(?) 지역에 살고 싶은 사람들, 이 욕구들이 모여 만든 지역 이름이 "마,용,성"이 되고, 강남이 된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는 상실감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개인이 상실감을 느낀다면 어쩔 수 없지만, 혹시 타인이 이야기 하는 끊임없는 소음에 나도 모르게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지는 않은지,,,
우선 일(Work)을 보는 시선을 생각하자.
만약 내가 '일(work)'을 '노동'으로만 본다면 일은 계급을 정의하는 위치가 된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가 나의 계급적 위치를 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계급은 내가 만든 계급이다. 아니면 사회(?)가 아니, 누군가 말하는 계급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상품의 대체 수단으로만 본다. 즉 유물론적인 관점이다.
일에 어떤 '의미'나 존재론적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일을 마치 착취의 계급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만 생각해 보면, 그의 모순이 발견된다.
그는 분명 일을 노동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상품의 교환 수단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착취라는 개념이 들어오면서 인격체의 상실감을 교묘하게 포함 시킨다.
그래서 마치 나는 누군가에게 나는 착취 당하고 있는 존재로 느끼게 한다.
여기에 우리는 분노감을 느끼고, 그가 주장하는 폭력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안에 나를 가두고
난 지금 어디 계급에 속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상실을 스스로 정의한다.
그렇다면 다시 일을 나의 존재론적 가치로 여겨 보자.
그럼 일은 '노동의 대가' 의미로 해석된다.
첫째로, "이 일을 통해서 내가 '돈'을 벌고 어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수단"
이때는 일과 그 노동의 대가가 의미가 있다. 내가 얻은 재화로 사회 속에서 나는 인간 관계를 형성한다.
마치 첫 월급을 타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한턱 쏘는 느낌이다. 이 느낌으로 일의 대가는 삶의 만족감을 가져 온다. 최근 유행하는 소확행이 여기에 속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일은 더 많은 나의 인간 관계의 사회적 실천을 실현 시키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나는 더 많은 재화를 얻을 수 있는 자아를 실현하게 된다.
그래서 일은 단순히 소비적 화폐 가치가 아닌 존재론적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82년 김지영 영화에서 주인공 지영이가 끊임없이 자신의 일을 찾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베란다에 앉아 상실감을 느낄 때... 뒤에서 들린 '엄마~'라는 아이의 목소리에 다시 정신을 찾리는 지영이
'엄마'라는 소리에 잠시나마 존재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결국 아이도 나의 존재감 자체를 지속적으로 느끼게 해 줄 수는 없다.
결국 나의 관계는 내가 만들어 가야 한다.
지영이는 돈을 벌기 보다는 자신의 사회적 가치를 찾아 떠난 것이다.
쏟아지는 뉴스에서 우리는 나의 공간의 평수를 생각한다. 그리고 정의한다. 나는 상실된 인간이구나...
하지만 상암동에 살면, 마포에 살고 싶고, 마포에 살면 강남에 살고 싶고, 강남에 살면 뉴욕에 왔다 갔다 하며 살고 싶은 것이다. 만약 그 공간을 통해 내가 존재감을 찾고 싶다면 난 결국 작은 원룸에서 나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공간이 아닌 나의 일에서 나의 인간관계에서 존재의 가치를 찾게 되면, 상실감 보다는 오늘의 삶에 더 집중할 수 있고,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타인의 소유에 대한 시선으로 만든 내 우울증은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실질적인 생계의 어려움으로 상실 되는 분들이 계신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시선이 있다면, 우리는 더 개인의 존재론적 가치 속에서 타인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 타인에게 나의 가치를 전달 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타인에 대한 나의 시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방향성이 나의 존재감을 어떻게 느끼게 하는지를 결정한다.
계급은 오히려 벽을 쌓고 성을 쌓는다.
그리고 타인을 향한 사회적 실천은 부재하게 만든다.
오히려 비싼 우리 동네, 비싼 우리 아파트만 존재할 뿐, 서로를 경계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묘한 시기의 시선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어쭙잖은 우쭐감을 가지고 산다. 매우 자존감이 낮은 상태로...
쏟아지는 계급론적 뉴스 속에서 당신은 타인의 말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를 잃고 있지는 않은지...
잠시 모바일 헨드폰을 놓고 생각해 보면 어떨련지...
VHR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