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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다캣 Feb 18. 2024

2화 버스, 버스 정류장이 어디예요?

비행기에 탑승하고 12시간이 지난 뒤 오클랜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같은 태평양 아시아 국가라 심정적으로 가깝게 느껴졌는데 미국 LA까지의 거리와 비슷했다. 비좁은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반나절을 버티면서 만약 타이태닉호였다면 아마 절반의 확률로 북극해 어딘가로 가라앉았을 거라고 생각했다.(타이태닉호 삼등석 여자 승객의 생존율은 50%였음. 남자는 더 적었다) 아니, 항공사고니까 일등석이건 삼등석이건 차별 없이 생존자가 없겠구나.


뉴질랜드의 12월은 여름이었다. 그렇다고 들었다. 그런데 여름과는 사뭇 다른, 당황스럽기까지 한 스산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눈이 부실 것처럼 햇볕이 뜨겁지만, 그늘에 서 있으면 초겨울의 한기가 느껴지는 정말이지 미묘한 날씨였다.


오클랜드의 첫인상은 화창한 미국 서부 해안 도시들을 연상시켰다. 언덕이 많았고 멀리 바다가 보였다. 당시 언니 가족이 도심에서 떨어진 한적한 주택가에 살고 있었는데 군데군데 커다란 야자수가 우뚝 서 있는 ‘팜하이츠’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였다. 잘 관리된 공원처럼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오클랜드에 도착한 다음 날 혼자 집을 나섰다. 오클랜드 중심가 퀸스트리트로 향하는 버스를 타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버스 정류장 위치는 알 수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밀레니엄이었다. 포탈에서 찾을 수 있는 정보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오클랜드 버스 정류장 위치까지 올리는 집요한 여행 블로거는 당연히 없었다.


문득 그 시절부터 열심히 블로그를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나는 취미삼아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거기 올린 글이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랬다면 지금쯤 아무것도 안 하고 블로그만으로 먹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블로그로 성공할 사람은 뭘 해도 성공한다. 성과를 내기 위해 갈아 넣어야 할 농업사회형 근면 성실의 총량은 동일한 법이다.


팜하이츠 거리는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집을 나선 지 족히 30~40분이 지났는데 여전히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클랜드는 인구 140만의 대도시다. 아무리 변두리 주택가라고 해도 당연히 다운타운으로 가는 버스가 존재한다. 이것이 집을 나서기 전 나의 추론이었다. 다만 그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이 대체 어디에 붙어있는지, 정류장을 찾는 일이 이렇게까지 어려운 건지 미처 알지 못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자동차가 필수 교통수단이다. 언니 가족들은 한 번도 버스를 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이 동네에도 시내로 가는 버스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똑같이 생긴 주택이 모여 있는 똑같은 블록을 벌써 백번 정도 보는 중이었다. 차도는 텅텅 비었고(지나다니는 차가 없는데 무슨 용도로 이 넓은 도로를 건설했을까?) 고양이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아포칼립스가 떠오르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걷고 있는 사람이라곤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나는 24시간 버스와 택시가 경적을 울려대는 도시 한가운데에서 탁한 공기와 더불어 살고 있었다. 주택가를 벗어나면 상가가 나온다. 이것이 내가 가진 상식이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주택가를 벗어나면 상가 대신 야생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발상은 얼토당토않았다.


공포가 느껴졌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하지만 뒤돌아 가는 이 길이 방금 지나온 길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한국 아파트도 죄다 똑같이 생긴 건 마찬가지지만 최소한 건물 전면에 숫자라도 크게 써준다. 여긴 그런 것도 없었다. 그냥 뒤돌아 가다간 고양이의 삼각형에 빠질 게 뻔했다. (고양이의 삼각형이란? 고양이가 길을 잃어버리는 원리를 말함.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는 바람에 집과도, 목적지와도 멀어지는 현상)


다리가 아팠다. 어디 앉아 아이스 커피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체면 따윈 개나 줘버리고 남의 집 정원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해외 로밍 같은 건 없었다. LTE폰이 나오려면 10년은 더 지나야 했다. 아무래도 이 똑같이 생긴 주택 중 한 곳에 들어가 전화 좀 사용하면 안 되겠냐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집주인이 한국 사람일 리는 없고 과연 그 말을 영어로 잘할 수 있을까? 괜히 도둑으로 몰려 총이라도 맞는 건 아닐까? 역시 뭘 하려고 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호기롭게 혼자 집을 나섰던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그때 도로 건너편 집에서 잔디를 손질하던 금발의 주부가 날 구제해 주었다.


“버스, 버스, 버스 타는 곳이 어디예요?”(필사적)

내 영어에 머리를 갸우뚱하던 그녀는 곧 환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오우~ 바스!”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옛말처럼 용케도 그녀가 알려준 버스 정류장 위치를 찾아갔다. 친절한 뉴질랜드 주부가 알려준 곳, 분명 여기가 맞다. 하지만 이걸 버스 정류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버스 정류장 푯말은 고사하고 아무런 표식도 없는 휑한 길가였다. 이쯤 되면 과연 내가 그녀의 영어를 제대로 알아들은 것인지 의심해 봐야 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대답하자. 아무리 간단한 대화였다고 해도 중학생보다 못한 너의 영어 듣기 실력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그 순간 멀리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무엇이 눈에 들어왔다. 미간을 한껏 모아 기도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는데 그것은 바로 버스, 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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