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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다캣 Feb 24. 2024

3화 퀸스트리트에서

도심과 가까워질수록 버스 안이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한 시간 뒤 버스는 우리를 브리토마트역에 내려주었다. 페리 선착장 부근이었다. 인간의 문명, 맥도날드와 스타벅스가 보였다.


뉴질랜드는 영국령이었기 때문에 곳곳에서 영국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한국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자동차들, 베이글 대신 영국식 머핀을 파는 빵 가게, 레스토랑에서는 팁을 내지 않았고 어딜 가도 피시앤칩스 메뉴가 있었다. 천천히 달리는 순환버스와 눈이 부시도록 좋은 날씨, 번화가에 걸린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장식이 여기가 남반구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오클랜드 도시 풍경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일정 간격으로 늘어선 커다란 휴지통과 나무 벤치.


퀸스트리트를 따라 걷다가 문득 벤치와 휴지통이 소떡소떡처럼 번갈아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휴지통이 옛날 장독대 항아리만큼이나 컸다. 자연스럽게 내가 사는 도시의 공공 휴지통이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려 보았다.


…생각나지 않는다.


뉴질랜드 여행 이후 나는 도시의 청결은 시민의 공공의식이 아니라 청소과의 예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번째, 오클랜드 시내를 활보하는 엄청난 숫자의 일본인 여행자. 


도쿄 여행 이후 이렇게 많은 일본인과 마주쳤던 건 처음이었다. 대부분 2~30대 젊은 일본 여행자였다. 일본 주식이 폭락하고 실업률은 폭등하면서 의욕 상실의 좀비 국가로 나아가는 중이었지만, 잃어버린 10년이 설마 잃어버린 30년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역시 일본 젊은이들도 처음부터 안분지족하며 욕망하지 않는 삶은 살았던 건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의욕적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던 다이나믹재팬 시절이 있었다.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영향도 있었던 듯)


마지막 세 번째, 퀸스트리트에서 마주친 여행자들.


경복궁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여행자들이 왜? 라고 묻는다면, 정확하게는 여행자들이 짊어진 자기 몸보다 더 큰 배낭이었다.


12월과 1월, 그리고 2월까지, 드디어 여름 성수기를 맞이한 뉴질랜드는 유럽과 일본, 중국,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몰려온 배낭여행자들과 자국을 여행하는 키위(kiwi:뉴질랜드사람) 여행자로 온 나라가 북적거렸다. 뉴질랜드 전역을 여행하는 그들은 대부분 무거운 배낭과 척박한 잠자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들이었다. 젊은 여행자들은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면서 주로 ‘백패커스’라고 불리는 도미토리 숙소에서 묵었다. 퀸스트리트에는 꽤 많은 백패커스가 있어서 오늘밤 묵을 숙소를 찾아 배회하는 세계 각국의 배낭여행자를 볼 수 있었다. (오늘 묵을 숙소를 오늘 찾는다고…?)


오클랜드에 도착했거나 혹은 오클랜드를 떠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떠나기 전 여행 계획을 복기했다. 구체적인 일정 따윈 없었다. 준비한 것이라곤 등산화 한 켤레가 전부였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지금까지도 후회하는 부분이다.


나는 아웃도어를 전혀 알지 못했던 도시 여성이었다. 뉴질랜드 여행을 떠나기 전 등산 카페를 그렇게나 자주 들락거렸으면서도 등산 ‘장비’ 쪽은 아예 거들떠보지 않았다. 가장 걱정했던 건 교통편과 숙소였다. 그마저도 정보를 얻지 못했다. 알고 싶었던 건 그래서 국립공원까지 어떻게 이동하느냐였는데, 거긴 풍광이 좋다는 둥, 뉴질랜드에선 모기 조심해라, 뭐 이런 말뿐이었다. 천하에 쓸모없는 카페 같으니.


다른 건 몰라도 장비는 준비했어야 했다. 뉴질랜드 나라 전체가 아웃도어를 위한 국가라길래 아웃도어 장비도 당연히 뉴질랜드가 좋은 줄 알았다. 우리나라야말로 아웃도어 ‘장비’ 대국이라는 사실은 뉴질랜드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에 알았다. 그 시절 애플 주식을 쟁여두지 못했던 것만큼이나 뼈아픈 실수였다. 


사실 난 20년 전에나 지금이나 주식을 안 하기에 후회할 일도 없다. 대신 그때부터 가진 모든 걸 오직 나 자신에게만 투자하고 있다. 지금에 이르러 나 자신을 믿는다는 건 어리석고 위험한 행동이며, 지하로 추락한 투자자들이 그렇듯 나도 나 자신을 손절 못해서 이 꽉 깨물고 버티는 중이다. 나는 과연 테슬라인가, 위워크인가? 아니, 위워크 창업자는 사기 비슷한 행각으로 갑부가 되기라도 했다. 손절에도 유효기간이 있는 법이다.


다시 여행기를 쓰겠다. 아무튼 지금이라도 부지런히 여행 일정을 세우고 산장 예약을 하지 않으면 대기자로 넘쳐난다는 뉴질랜드 국립공원을 구경 못 할 수도 있었다.


뉴질랜드 ‘그레이트 워크’는 9개였다. 이들 코스는 하루 만에 완주할 수 없어서 3~5일 산장에 묵으면서 걷는다. 그중에서도 손에 꼽는 트랙이 밀포드 트랙, 루트번 트랙, 캐플러 트랙, 그리고 아벨태즈먼 트랙이라고 했다. 밀포드가 가장 유명했고, 밀포드를 놓친 사람들은 루트번과 캐플러를 선택했다.


그런데 밀포드, 루트번, 캐플러, 이 셋은 걷는다고 하기엔 글쎄, 난이도가 좀 있어 보였다. 트래킹보다는 등산에 가까워 보였다. 특히 루트번 트랙은 꽤 험준해서 등산 숙련자들에게 권장되는 코스라고 했다. 이런 산사나이들의 코스를 주파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에 비해 아벨태즈먼 트랙은 “easy 3~4day walk, coastal views and beaches.”라는 코멘트가 붙어있었다. EASY, 쉽다는 뜻이다. 심지어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적당한 코스라는 설명도 있다.


이거였다.


밀포드 트랙처럼 경이로운 풍광은 아니지만 이보다 더 걷기 편할 수 없어서 초심자에게 유리하다고 했다. 밀포드 트랙에 비해 날씨도 좋았다. 밀포드 트랙은 비가 쏟아져야 제맛이라는 말이 있었다. (도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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