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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다캣 Mar 02. 2024

04화 영알못으로 산다는 것

이미지 출처 _ 구글 지도


뉴질랜드는 북섬과 남섬,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 수도 오클랜드는 북섬, 아벨태즈먼 국립공원은 남섬이다. 한눈에 섬을 오가는 여정이 그렇게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한 상태였다. 오클랜드에서 아벨태즈먼 국립공원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오클랜드 시내에는 국립공원 산장을 예약할 수 있는 DOC(Department of Conservation) 사무실이 몇 군데 있었다.


퀸스트리트가 끝나는 곳, 페리 선착장 어딘가에 위치한 오클랜드 DOC사무실에서 초록빛 직원 티셔츠를 입고 있는 마오리계(뉴질랜드 폴리네시안 원주민) 뉴질랜드 아가씨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원하는 것이 뭐니? 어서 말을 해라’라는 분명한 눈빛.


“뭘 도와줄까? 말을 해보렴.”(영어였다)

“아벨태즈먼 트랙을 걷고 싶다. 예약할 수 있겠니?”(…과연 영어였을까?)

“여기 이 신청서를 작성하면 돼.”


용케도 알아들은 마오리 아가씨가 신청서 양식을 챙겨 내밀었다. 신청서에는 트램핑을 시작하는 날짜와 코스, 일행들의 명단과 인원수를 기재하는 공란이 있었다. 나는 말없이 신청서를 들여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아벨태즈먼에서 혼자 트램핑을 하고 싶은데요, 여행 정보를 도무지 찾을 수 없네요. 아벨태즈먼 트랙이 국립공원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죠? 오클랜드에서 트랙 시작 지점까지 어떻게 가야 할까요? 또 끝나는 지점에서 어떻게 돌아오나요? 혹시 교통편과 숙소 정보를 이곳 디오씨 사무실에서 얻을 수 있나요? 아벨태즈먼 트랙은 밀물과 썰물시간에 맞춰 일정을 세워야 한다는데 자세한 설명서라던가, 지도라던가 뭐 그런 게 있을까요? 그리고 아벨태즈먼이 국립공원 트랙 중에 가장 쉽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마음의 소리)

“어…….”(실제로 입 밖으로 나온 의성어)


“괜찮으니까 뭐든 말해봐.”


관광대국 뉴질랜드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사람도 별로 없고 업무도 한가했기 때문인지 디오씨 직원 아가씨는 관공서 공무원치곤 보기 드문 열의와 친절함으로 나를 상대했다.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은 눈치였다.


“오클랜드에서 아벨태즈먼 트랙까지 어떻게 가야 할까?”

“그거야 네 맘대로 가면 되지, 비행기든, 배든, 버스든, 네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면 돼.”

“…….”

“응? 더 알고 싶은 거 없어?”

“…그래, 고맙다.”


관두자.

아무런 성과 없이 디오씨 사무실을 나와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곤 작금의 상황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지금 나의 처지는 다음과 같았다.


대전제

나는 뉴질랜드 아벨태즈먼 국립공원에서 트램핑을 하고 싶다.


대전제에 대한 충족조건

1. 아벨태즈먼 트램핑 4일 동안 묵어야 할 국립공원 산장.

2. 오클랜드에서 트랙 시작 지점까지의 교통편.

3. 트랙 종료 지점에서 오클랜드까지의 교통편.

4. 산장 외 최소 2박의 숙소.(어느 지방에서, 얼마나 묵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는.)


충족조건에 대한 필요조건

1. 아벨태즈먼 국립공원 산장 예약을 영어로 해야 한다.

2. 트랙 시작점까지 가는 교통편과 종료 지점에서 돌아오는 교통편에 대한 문의와 예약을 영어로 해야 한다.

3. 트램필 시작 전과 종료 후에 묵을 숙박 문의와 예약을 영어로 해야 한다.


필요조건에 대한 심각한 장애요인

영어를 못한다.


결론

젠장,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파파고는 15년이 지나야 나온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던 내게 언니 가족은 오클랜드 한국 교민 잡지 하나를 건네주면서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온천 관광 패키지나 다녀오라고 했다.


안 되는 영어 실력과 안 될 거라고 말하는 가족들. (그래, 가족들이란 원래 그런 법이지.)


선택1

가족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트램핑은 포기하고 한국인 여행사의 원스톱 패키지를 이용한다. 한국 아줌마 아저씨들과 같이 단체 사진 촬영을 한 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차례로 버스에 오른다. 다음 목적지까지 “왜 혼자 여행을 떠났어?” “결혼은 왜 안 했는데?” 등등 그들의 따뜻한 관심을 한 몸에 받는다.


선택2

그 지경이 되느니 아무 데도 안 가겠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이것들아!


하지만 일단 그들이 준 잡지를 들여다보았다. 어차피 가족 돈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족 집에서 묵고 있는 주제에 너무 까다롭게 굴 필요는 없었다.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일까?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이 모든 것을 반드시 갖춰야 할까? 경제력, 외국어 능력, 정보력이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부정할 순 없지만, 나는 성공의 결정적인 열쇠는 바로 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랬다. 항해를 떠나기 위해서는 큰 배와 노련한 선장과 충직한 선원이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날씨가 좋아야 한다.


교민 잡지에 실린 한국인 여행사 목록 중 한 곳에 전화를 걸어 상담 예약을 했다. 퀸스트리트 시립극장 맞은편 고층 빌딩 어딘가에 여행사 사무실이 있었다. 내부 인테리어가 꽤 고급스러운 걸 보니 배낭여행자와는 거리가 먼 여행사가 확실했다.


“트램핑이 뭐죠? 백패커스 여행은 상담하지 않아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맞은 한국인 여직원이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재빨리 벽에 붙은 여행상품 가격을 훑어봤는데, 역시나 엄청난 금액이었다. 나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사장님 친구분 소개로 찾아온 건데, 아무튼 알겠습니다.”(물론 뻥이다)

“그래요? 친구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친구분 성함. 그런 것까지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아무 이름이나 내뱉으려고 했지만, 평소 순발력이 떨어지는 편이라 그만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뻔뻔스럽게 차 대접까지 받은 처지에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죄송해요. 까먹었어요.”


순간 디오씨 직원의 얼굴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표정이 여직원 얼굴에도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나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대표이사 박**


여직원이 아니라 사장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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