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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다캣 Mar 09. 2024

05화 그땐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때 여행사 여직원, 아니 사장님께서 왜 백패커스 여행을 받아줬을까, 궁금해진다. 사장님 말처럼 시간이 남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어른들의 사정 상 이익이 적은 일도 열심히 했어야 할 상황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귀찮은 나머지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하는 심정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밀레니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밀레니엄 시절에는 실패에 대한 혐오가 지금처럼 극렬하지 않았다. 실패와 실수는 당연했다. 그래서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뉴질랜드에 도착한 미련한 여행자에게도 상황은 너그러웠을 것이다. 나도 그때는 실수한 사람들을 보면서 웃었던 것 같다. 지금처럼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이따금 생각하는데, 세상은 도무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한편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모든 것이 신의 뜻이었던 중세와 근대를 지나 자수성가한 자본주의의 세상으로 넘어가면서 피라미드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사람들은 힘겨운 삶을 감당하는 것도 모자라 실패자라는 모욕까지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공에는 우연한 운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IT 기술을 기반으로 신흥 부자들이 탄생하던 시절이었다.


철학자 강신주의 말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시간이 지나 피라미드 상부로 향하는 사다리가 끊어지면 좌절한 사람들은 위가 아닌 옆을, 특히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분노를 돌릴 것이고 양상은 더욱 악랄해질 것이라고 했다. 


지금의 젠더 갈등, 반목과 무논리가 이익이 되는 현상, 유독 없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적용되는 기준을 보면서 아주 젊은 시절에 들었던, 지금까지 변함없이 적용되는 어떤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한 사람의 개인으로는 이보다 더 할 수 없이 똑똑하지만, 모여서 집단이 되면 이보다 더 할 수 없이 어리석다고. (인간이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모양이다.)


여행사 사장님은 가장 저렴한 항공권과 적당한 백패커스와 교통편을 예약해 주었다. 나는 약간의 대행료를 지불했고, 소도시 넬슨에서의 짧은 와인투어 관광을 예약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여행의 세부 일정이 완성되었다.


오클랜드에서 크라이스트처지

항공권과 백패커스 예약 완료

크라이스트 처지에서 넬슨

시외버스 티켓과 백패커스 예약 완료

넬슨에서 아벨 타즈먼 트랙 출발 지점인 마라하우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버스 예약 완료

트랙 종료지점인 토타라누이에서 넬슨

버스와 백패커스 예약 완료

넬슨에서 오클랜드

항공권 예약완료


총 7박 8일이었다. 여행사 사장님은 백패커스 예약 대행을 해주기는 처음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기뻐 날뛰는 나를 보면서 싫지 않은 얼굴을 했다. 남은 건 DOC 사무실로 뛰어가 정해진 날짜에 맞춰 아벨 태즈먼 산장을 예약하는 일 뿐. 원래는 산장부터 예약한 다음 숙박과 교통편을 알아봐야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면 되는 대로, 안되면 안 되는 대로 내달릴 뿐이었다.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무모할 수 있었을까?(지금도 안 무모한 건 아니지만) 사실은 그게 이 뉴질랜드 여행기를 다시 쓰고 싶었던 이유기도 하다. '나'라는 인격과 지금이라는 세계의 변화를 짐작하면서 과연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에 비해 얼마나 성장하고 한편 퇴보했을까? 얼마나 불타오르고 한편 위축됐을까? 지금의 세상과 그때의 세상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리 모두 압력밥솥으로 들어가 터지기 직전인 지금보다 그 시절이 더 좋았던 걸까? 


물론 아니다. 그때는 그때 대로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무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심성이 없는 성격에, 빈약한 경험, 무엇보다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던 당시의 일 처리 방식과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나’라고 여기는 사고방식은 환경에 따라, 학습에 따라 달라진다.


다시 만난 DOC 직원은 오, 너 또 왔구나! 라는, 반갑고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마. 아가씨야. 이번에는 영어가 필요 없다고) 당당하게 신청서를 내밀며 예약하겠다는 나에게 그녀는 밀물 썰물 시간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아벨 타즈먼 트랙은 때로는 바다를 건너가야 하기 때문에 밀물 썰물 시간표를 확인해야 했다. 나는 인터넷에서 확인한 후 출력해 온 타이드 시간표를 내밀었다. 내가 건넨 신청서와 타이드 시간표를 훑어본 직원은 원하는 날짜에 사람들이 얼마나 예약했는지, 혹시 자리가 남아 있는지 알아본 뒤 전화를 줄 테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라고 했다. 이번에는 산장 예약 상황을 출력한 프린트물을 내밀었다. 방금 확인했고, 자리는 충분하니까 지금 바로 예약해달라고 했다. 나는 한국인이었다. 직원은 안 되는 영어를 불사하겠다는 내 기세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누구와 함께 가는지, 일행이 있냐고 물었다. 


“난 혼자 가.”


직원의 구리빛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퍼펙트!” 


축 처진 어깨로 사무실을 나섰던 나와 그런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DOC 직원, 우리는 드디어 활짝 웃을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내게 산장 티켓을 건넸다.


“이제 넌 아벨 타즈먼으로 떠나기만 하면 돼. 가보면 알겠지만, 거긴 정말 환상적이야!”


-06화에서 계속






뉴질랜드 국립공원 정보 https://www.doc.govt.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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