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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달아 Jan 11. 2024

아기집 확인 후 4일 만에 아기를 떠나보내며

직장 스트레스가 아니었으면 널 지켰을까 

  나에게 일어난 '유산'의 기록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무엇을 서두로 할 지 고민이 많았다. 내가 3개월간 시달려 퇴사 직전까지 이르게 된 직장 내 괴롭힘으로 해야 할 지(매일 고민 중). 처음 아기를 확인한 순간으로 해야 할 지. 잃었던 순간으로 해야 할 지. 무엇이든지간에 나에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천천히 글로써 남기려고 한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면서 기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에, 또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나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 돌아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 아픈 순간을 다시 돌아보려 한다.




  엄마란 무서운 존재다. 나는 임신테스트기의 2줄을 확인하기 전에도 어렴풋이 내가 임신했을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12월 19일 화요일에 친구들과 함께 눈 오는 남산을 뛰며 그 어렴풋한 감정을 남산에게 이야기 했다. '저에게 진짜 아기를 주신다면 잘 키워볼게요.' 임신을 실패한 2~3달 사이, 어느새 나는 임신을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다.

  이 곳에 여러차례 남긴 것처럼, 나의 23년 하반기는 바빴다. 24년에 아기 계획이 있었지만, 23년 6월에 이직을 했기 때문에 1년은 다니고 출산휴가를 들어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아기 준비를 미루고, 미루고, 뒤로 많이 미뤄놨었다.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한 건 9월부터였는데, 2~3개월이 무위로 돌아가자 나는 약간 초조해졌다. 그런 기다림 끝에 만난 예감이었다. 내가 아기를 바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임테기의 2줄을 확인한 날은 12월 22일 밤이었다. 나는 첫째 때 경험이 있었기에(물론 그 땐 임신에 대해 정말 무지했었다..) 23일에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아주 긍정적인 소식(aka 아기집)을 들을 줄 알고 한껏 기대를 하고 병원에 갔다. 예진실에서 마지막 생리일과 이것저것 정보를 물어보시더니, 많이 봐야 4주 5일 정도고, 이 정도는 피검사로만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나는 피를 뽑으면서 생각했다. 첫째 때는 병원에 가자마자 "착상이 잘 되셨네요"를 말을 들었는데... 이번 배란이 늦은 것 같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렇게 일찍 왔나 알쏭달쏭 한 순간, 진료실에 가서 마주친 내 피검사 수치는 114였다. 의사선생님은 "축하해요, 임신하셨네요"라고 하셨지만.. 뭔가 개운치 않았다. 집에 돌아와 확인해보니 114에 해당하는 주수는 무려 4주 0일이었다. 4주 0일..... 마지막 생리일 기준이라 하더라도, 핑크 다이어리가 알려준 배란예정일로 보았을 때도 조금은 더딘 수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때부터 나는 긍정적인 생각보단 부정적인 생각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떨쳐버리려고 해도 부정적인 생각이 자연스럽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제 막 고령임신에 접어든 나의 나이(만 35세), 내 난소 나이(실제 나이보다 3~4살 높게 나왔다), 그리고 주변에서 겪는 많은 안 좋은 이야기들. 


  게다가 나는 9월부터 회사 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12월 말부터는 다른 동료와 함께 상사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자리가 이어졌다. 이미 3개월간 너무나 많은 스트레스와 화, 분노를 삭히고 삭히며 일했다. 자기 전 누워 나에게 온 아기 생각을 하다가도 회사로 생각이 옮겨가면 잠은 분연히 달아났다. 그렇게 잠을 설쳐 뒤척이다 누운 지 1시간이 지나서야 잠이 들었다. 신체가 멀쩡해도 제대로 된 정신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크리스마스 연휴, 연말이었다는 점이었지만, 놀러가서도 메신저로 회사 이야기를 하며 분노했다. 하.... 



 

  드디어 아기집을 확인하러 가는 날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병원에 갔다. 맥박이 70 몇이 나왔다. 걸어와서 그래요, 라고 애둘러댔지만 나는 떨렸다. 마치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아기집이 자리를 잘 잡았을 지 정말로 궁금했다. 다행스럽게도 아기집은 뿅 내 눈 앞에 나타나줬고 난 그 순간 마스크 속에서 피어나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아기집 초음파 사진과 임신 확인서가 발급됐다. 


 아기집을 확인한 날을 남편의 생일에 맞추었다. 생일 선물로 가장 멋진 것을 주고 싶었다.

사진은 왜 이렇게 그림자지게 찍었을까. 잃고 돌아보니 다 내 잘못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아니라해도, 그게 엄마의 마음인걸


  ...그렇지만 내가 놓친 게 있음을 나는 다음 날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아기집은 정상이었지만, 내 정신은 정상이 아니었던 거다. 나는 남편에게 미역국을 끓여 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일선물로 아기를 염두에 두었다고 해도, 미역국은 너무나 쉬운 생일 세리모니인데.... 난 다시 느꼈다. 내가, 스트레스로 일상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구나. 심지어 남편과 첫째가 잠든 고요한 밤, 나는 새벽 2시까지 대표이사 면담을 염두에 두고 그간 당했던 괴롭힘과 해야 할 질문을 정리했다. 비참했다. 


  그 다음날, 출근해서 회사의 다른 상사분들을 만났다. 나와 동료는 한차례 사직 의사를 전했는데, 만남을 가진 상사분들이 말리며 면담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야기를 해보니 상황은 희망차지 않았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더 필요했고... 뭘 더 해야했고.... 소명해야했고....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임신했다고 밝혔다. 모두 축하를 해주셨지만 내 임신과 회사 상황은 전혀 별개였다. 결국 나와 동료는 증거를 더 모으는 방향으로 결정했고, 그 날 저녁까지 증거를 정리했다. 23년 9월부터 내 다이어리는 회사 생활 스트레스 일기가 많은 지분을 차지했는데, 증거 수집을 위해 그 다이어리를 다시 들쳐봤다. 고역이었다. 그러나 가해자들을 마주한 채 일을 하는 게 더 고역이었다. 


  또 그 다음날, 직장으로 가는 9호선 급행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임산부석을 찾아 겨우 앉아 심호흡을 했다. 힘들었다. 게다가 아침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오전 10시 회의를 앞두고 급히 찾은 화장실에서 약간의 출혈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나는 회의에 참석할 수 없음을 밝히며, '제발, 제발, 제발'을 되내이며 직장 근처 산부인과를 찾았다.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결과가 좋았다. 피고임도 없고, 아기집도 잘 컸다, 착상혈일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착상혈이라고 보면 될까요?란 내 질문에 피가 고여있어서 나올 수도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희망을 안고 금요일 오후의 업무를 이어나갔다. 45분동안 발표를 했고, 1시간 더 초과근무를 했다. 집으로 가는 9호선 급행도 사람이 많았다. 눕고 싶다는 생각이 깊게 들었다. 집에 가자마자 누워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어코 일은 터지고 말았다. 이제 누워 있으리라 결심했건만. 화장실에서 맞이한 건 ... 더 많은 출혈이었다. 2~3방울이라던 착상혈 수준이 아니었다. 검붉은 빛도, 핑크빛도 아니었다. 선홍빛의 빨간 출혈이 속옷을 적시고 있었다. 


정지. 

정지.


꿈이 아니었다. 


  출혈은 그 저녁 내내 이어졌다. 피가 나오는 게 느껴졌다. 배도 묵직하게 계속 아팠다. 일기를 쓰고 불안함에 잠을 못자다 새벽에 눈을 뜨니 좀 나아진 출혈에 안도하고 있었는데, 어설피 자고 일어난 아침엔 속옷이 젖어 있었다. 여전히 빨간 피였다.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초음파를 보기도 전에 의사선생님이 질을 보자마자 말씀하셨다. "출혈이 많네요..." 초음파 속 아기집은 엊그제 보다 작아져있었다. 무조건 커야 했는데. 게다가 아기집 안팎으로 뭔가 흐르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유산 위험성이 높아졌네요.." 프로게스테론 주사(일명 '유산방지주사')를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누워 프로게스테론 주사 맞은 후기를 검색했다. 여러 사례가 많았다. 아기를 지켜냈다는 사람도 많았다. 주사 덕분인가? 배가 덜 아프다! 아직 희망이 있다!하며 화장실에 갔는데, 


마주해버렸다.

세마디 정도 되는 희끄무리한 것을.

그리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정말 그 속엔 배아가 있었다. 내 엄지손톱의 3/4 정도 크기의 아주 작은 흰, 생명을.

280days 어플에 생긴 5주차 아기 생김새랑 똑같아서 도저히 모를 수 없었던.

벌써 태명까지 만든 나의 아기였다.


  앞서 엄마는 무서운 존재라고 했던가. 난 그 순간 직감했다. 나는 유산했음을. 아기를 잃었음을. 

  더이상 배가 아프지 않았던 건 아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정말 작디 작은 소(小)출산이었다. 유산방지주사를 맞은지 3시간 여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는 병원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린 화장실에서 타원형의 동그란 형체까지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검붉고 빨간 것이 섞여 있는 형체가... 


따뜻했다. 방금 전까지 살아 있었음이 분명한 따뜻함이었다. 


차라리 차가웠으면 덜 슬펐을까...


  일요일이었지만 다행히(이젠 사소한 것도 다 다행으로 느껴진다) 내 주치의 선생님이 당직이셔서 그 분께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아기집이 탈락된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실제로 초음파 상으로 자궁 내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나마, 그나마, 그나마의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는


- 임신 5주차 4~5일 내의 극초기 유산이었고 (임신 주수가 높아진 상태에서의 유산은 몸에 더 큰 상흔을 남긴다고 한다)

- 그렇기에 몸에 남는 피해가 '거의 없는' 수준에 가깝고 (유산 뒤 찾은 한의원에서도 비슷한 대답이었는데, 극초기 유산이어서 몸은 그저 '혼란'스러운 상태라고 했다. 다만 내가 평소 생리통도 없는 건강한(?) 자궁이었음을 참고)

- 아기도, 아기집도 '자연배출' 되어 수술 요법이 필요하지 않았으며(임신 주수가 높은 상태에서의 유산은 대부분 자궁 내에 남은 흔적을 긁어 없애는 '소파술'을 동반한다. 소파술을 하면 최소 3~6개월은 임신 시도를 쉬어야 한다고 한다)

- 다음 생리가 오면 자궁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는 증거이니 그 다음달부터 임신을 시도할 수 있다


는 답변을 받았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던 나는 진단서를 요청했다. 난 쉬어야만 했다. 내가 어떤 직급이든 뭐든지간에 난 쉬어야 했다. 그게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바였다."1주간의 절대 안정"이 담긴 진단서가 나오마자자 회사에 보냈다. 그걸 받는 담당자가 내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여서 조금 힘들었지만, 나는 일단 나를 생각해야 했다. 역시나. 가해자의 위로의 말은 시덥지 않았고, '다음주에 보자'는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5일 간의 유산 휴가를 받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진단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다음에는 무조건 더 잘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을 강하게 받았지만, 슬프지 않은건 아니었다. 산부인과에서부터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엉엉 울었다. 엉엉 울며 문득 거울을 마주하니 세상 못 생긴 내가 서있었다. 그러나 이러나 저러나해도 나였다. 아기집을 확인하고 4일 만에 유산 진단을 받았더라도 나는 나였다. 내가 지켜야 할 나였다. '나를 위협하는 스트레스에서 나는 나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글을 쓴 게 9월이었는데, 3개월 동안 보호하지 못했던 나였다. 나는 정말 나를 방치했을까. 일을, 회사 구성원들을 좋아한다는 여러가지 이유로 나를 설득하며 출근길에 올랐던 나는 스스로를 정말 기만했을까. 무엇보다, 의학적 소견들이 '처음부터 유산될 가능성이 높은 아기'를 가리키고 있음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회사에서 받은 무지막지한 스트레스가 아니었으면 아기를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더 좋은 환경에서 품어주었을텐데. 훨씬 따뜻하고 너른 품에서 널 지켰을텐데. 나의 스트레스가 아니었다면. 결국 나는 나도 못 지키고, 아기도 못 지킨 꼴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직장 내 괴롭힘 증거를 수집하는 때보다 더 비참하다. 

  그렇지만, 내 두 눈으로 배아를 본 그 순간은 비참을 넘어 참담했다. 나는 그 참담함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기에, 지금의 나의 비참함을 글로 남긴다. 




 *임신 5주 출혈로 인한 유산 사례는 인터넷에도 많지 않아 다소 상세히 남깁니다. 저도 많은 기사 및 사례를 찾아보았는데, 임신 초기에 출혈과 복통은 무조건 좋지 않은 예후입니다. 혹시라도 출혈을 겪으면서 이 글을 보시는 분이 계시면 바로 병원에 방문하시기 바랍니다. (없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의 사례는 과연 유산 산재가 될 수 있을까요? 조금 더 냉정한 마음으로 찾아보았습니다.

- 직장에 다니는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유산 경험 많고 : 최근 5년간(17~21년) 유산한 여성 노동자(국민건강보험 직장가입자 기준)는 평균 45,710명으로, 비직장 여성보다 높다(직장가입자와 피부양자 유산 비율 비교 시, '17년 기준 55.8% -> 64.1%까지 증가)
- 그러나 최근 5년간 유산 산재 신청은 10건. 업무 상 질병으로 인정된 사례는 단 5건
- 직장 내 괴롭힘으로 유산했음을 입증해서 처음으로 공무상 재해 판정을 받은 김씨의 사례는 직장 내 괴롭힘이 먼저 인정이 되어서 업무 관련성을 비교적 수월하게 입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저의 경우에는 : 직장 내 괴롭힘의 절차인 인사위원회 -> 대표이사 면담 -> 고용노동부행(대표이사 면담을 하지 않으면 반려처리된다고 한다) 중 인사위원회도 열리지 않고 동료의 퇴사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고, (그렇습니다. 제 동료는 결국 퇴사했습니다.)
- 연구진에서 제안된 유산 산재 인정 기준 중 저의 경우는 '업무 관계에서의 폭력·폭언·기타 괴롭힘 행위' 및 '업무 관련 돌발적이고 예측 곤란한 정도의 긴장·흥분·공포·놀람'에 해당되겠으나, 정식 유산 산재 인정 기준이 확인 되지 않기 때문에 정말 큰큰큰 마음 먹고 신청하더라도 유산 산재로는 인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겠지요. (또한 본 기준을 제안한 연구진은 자연유산은 임신 초기 흔하게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 또한 보고서에 담았다고 합니다.)
기사 출처 : https://shorturl.at/gpDG1


***안되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글이라도 쓰며 이겨냅니다. 


작디 작은 아가야, 다음에 우리 꼭 만나. 다음에도 꼭 엄마한테 와.


눈 오는 남산에서 빌었던 아기. 아주 큰 눈송이 꿈을 꿔 태몽으로 생각했지. 널 잃은 뒤 또 큰 눈이 와서 널 생각하며 걷기. 네가 있으면 정말 좋았겠다.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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