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언제나처럼 실패하겠지
어머니는 언제나 말씀하셨다.
너는 뭐하나 진득하니 하는 게 없고 싫증을 너무 잘 내는구나.
라고. 그 말씀이 딱 맞았다.
내 인생에서 학위가 지상 최대 목표이던 때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침대에 눌어붙어 몇 개월을 보내고 나니, 박사 학위 같은 건 이제 스테이크 접시 귀퉁이에 놓인 파슬리 같이 느껴질 뿐이었다.
최종 논문 심사에서 합격했을 때, 심사위원 교수님 중 한 분이 악수를 청하며 "이제 동등한 연구자가 된 것을 축하합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벅찬 감동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헌터X헌터 32권 출간보다 중요하지도 않았다. 아, 헌터X헌터 32권 출간은 너무 엄청난 일이니 애초에 비교가 안 되는구나.
이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해보고 싶었다. 내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일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었다.
예전에 내 단편소설 하나가 출판되기도 했지만 그 책의 성격상, 작가가 되었다는 걸 공인하기엔 부족했다.
당당하게 작가라는 말을 하려면 적어도 작품 제목을 거론하며,
"저는 '티리스팔 숲의 파수꾼'을 썼어요. 아마 별로 안 유명해서 모르실 거예요. 검색하면 나오려나? 핳하핳!"
하며 부끄럽다는 듯이 말할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출판이 됐든 웹툰이 됐든 영상물이 됐든 공식적인 제품의 형태로 나온 것이, 검색 엔진 첫 페이지에 걸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스마트폰을 열어 검색해 본 상대가 미안한 표정으로 '저기... 작가님 성함으로 검색하니까 산부인과 원장님이 나오는데 이 분은 아니시죠?'라고 말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작가호 공식 출항으로 삼을 만한 일이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아는 분한테서 "콘텐츠진흥원에서 단편 장르영화 제작지원사업이 떴는데 함께 내보지 않겠는가? 선정되면 네가 작가, 나는 감독." 이란 제안을 듣게 되었다. 당연히 내 대답은,
"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원했는데, 무려 됐다. 거기에 지원하여 최종 5인 작가로 선정되기까지의 과정은 흔하고 지루하므로 생략한다. 다만 많은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내 시놉시스를 설명해야 했던 일은 무척 고역이었다는 것과, 꼭 붙고 싶은 마음에 시놉시스 표지를 괜스레 공들였던 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내가 쓰기로 마음먹은 장르는 SF 액션이었다. 아이템은 내가 뽑았고, 이제 감독님이 된 분과 함께 <아톰팩스>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했다.
나는 시작부터 기대에 크게 부풀어 있었다. 특별히 더 기뻤던 이유는 또 있었다.
나한테는 배우, 성우, 뮤지션 등의 직업을 가진 친한 지인들 단챗방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을 모델로 해서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이다.
그 친구 이름이 곽진석. 이번에 영화 <대호>에서 대호를 연기한 배우이다.
당시 진석이는 내가 쓴 시나리오라면, 그리고 자신이 주인공이라면 무료로 출연해주겠다고 단챗방에서 엄숙히 공언했다. 단챗방의 예술가 지인들이 모두 축하해주는 와중에 다른 한 명이 연애를 선포하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우리들은 모여서 밤새 술을 마셨다.
우린 고추잡채를 곁들여 카스를 마시며 막혀 있던 아이디어에 대해 열정적으로 토론했고,
나는 고민 중이던 액션 씬을 진석이에게 상담했으며,
진석이는 스턴트맨과 액션배우로서 쌓은 경험을 살려 꽃빵을 이용해 노련하게 동선을 설명해주었고,
그렇게 치열한 회의 끝에 완벽한 솔루션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난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다.
작가는 배우 섭외 권한이 없었다.
감독님과 피디님이 알아서 다 잘 하시고 계시뮤ㅠ
게다가 시놉시스를 여러 번 엎으면서, 처음에 내가 구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완성된 시나리오가 나빴다는 것이 아니다. 감독님이 독불장군이었다는 것도 아니다. 설정이나 아이템은 다 내가 처음에 생각한 것이 맞다. 다만 그저, 그저 내가 생각했던 대로 안 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비루하지만 설명을 좀 해두고 싶다.
많은 갑들의 세세한 요구 사항을 들어주다가, 결국 처음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곤 하는 것은 나한테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간 해왔던 많은 디자인 프로젝트가 당연히 그래 왔다.
공무원들을 상대해서 콘텐츠를 개발하던 정부 과제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내 의도는 화성의 물자국처럼 흔적만 남는 걸 매번 겪어왔다.
처음에는 그것이 너무도 괴로웠었지만 나중에는 으레 그러려니, 굳은살이 박혀 덤덤해졌다.
이건 모든 회사러들은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도 그런 프로젝트다. 작가는 감독의 의도를 반영하는 텍스트 노동자에 가깝다.
물론 이런 작업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끝까지 자기 손으로 작품을 책임지고 완성해야 하는 류의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다. 소설가나 화가 등.
다시 말하지만, 처음부터 작가가 아니었던 나한테는 매우 익숙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너무 익숙했기 때문에 문제였다.
내가 v작가v가 되고 싶었던 것은, 그런 일이 익숙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내 이름을 걸고, 내 생각을 조금은 더 표현하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실망하자 좀 더 프로처럼 처신하란 말을 듣기도 했는데, 내가 프로답지 못해서 실망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영화가 그런 일이라도, 내 아이템과 내 이름으로 선정된 사업이니 조금은 내 의도를 더 반영할 수 있을 거라 순진하게 기대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기대는 쉬이 좌절되고, 그래서 다시 지긋지긋해졌고, 무기력해진다.
시나리오는 내 손을 떠났다. 감독님의 손으로 최종고가 마무리되어, 일은 일사천리 진행되었고, 배우도 섭외되고, 촬영까지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가는 걸 그냥 보기만 하면서 침대에 껌딱지처럼 누워 있었다.
게다가, 완성된 아톰팩스 영화에는 대재앙이 벌어졌다.
촬영 당시, 한 초보 스태프가 초고속 카메라의 데이터를 잘못 다루는 바람에 공들여 만든 액션씬이 대거 날아갔다. 액션씬을 빼고 편집하는 바람에, 나중에 시사회 때 보니까 내가 썼는데도 내용이 이해가 안 됨 ㅋㅋㅋ
보는 사람들도 모두 어리둥절 ㅋㅋㅋㅋㅋ
엄청나게 고생해서 촬영했던 감독님 역시 매우 우울해하며 고통스러워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현재 아톰팩스는 내 컴퓨터에 잘 보관되어 있다. 아니지, 봉인되어 있다.
캡처는 조금 공개한다.
대재앙의 아톰팩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