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에 걸린 공주를 구하려는 왕자님 같았다.
효과가 있다는 로션을 공수해서
주문을 외우듯이 읊조리며
"우리 마누라 나아라. 좋아져라"
기도하듯 노래하는 목소리를 말없이 듣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랑이었다.
이른 저녁을 함께 먹고 산책을 나서는 게 일상이었다.
맞잡은 손으로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함께 걸을 때면
으레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눈썹 산도 없이 아래로 순하게 늘어진 짙고 굵은 눈썹 밑으로
그의 눈동자가 굳은 결심을 드러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가로수 불빛에 의지한 거리가 하나의 길로
쭈욱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것처럼
그이를 따라가면 좋은 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 전세를 사는 우리에게
언제 올려달랄지 모르는 전세 보증금은
예측 불가능한 공격이었고
그것을 방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은
가진 것 없이 시작한 신혼부부의 숙명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꿈은 새로운 것을 그려나가는 이상이라기보다
가진 것을 지켜내기 위한 방어에 가까웠다.
그래도 그의 원대한 수비와 방어 작전 속에
내가 있었고 미래에 올 아이가 있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실의 즐거움을 덜어내는 것이
달가웠다.
기꺼웠다.
다들 그렇게 살겠거니
어디로 가게 될지는 몰랐지만
나보다 먼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의 손을 잡고 묵묵히 같이 걸어가 보고 싶었다.
나는 신랑의 벌이에서
살림비 30만 원 한도 카드 한 장과
한 달 용돈 7 만원으로 생활을 했다.
푼돈을 모아 큰돈을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다.
돈을 모으는 것 만이 목표는 아니었다.
내 절약이 그이의 기쁨이기에
그런 그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한 달 용돈 7만 원 중 2만 원가량은
커피를 좋아하는 신랑과 취향을 찾아가는 여정에 사용했다.
나머지 5만 원이 실제 내가 사용하는 것이었다.
안 쓰는 게 버는 거라는 당시의 철학은
그 5만원을 쌈짓돈으로 만들었고
빌라로 이삿짐을 나르던 유난히 하늘이 맑던 날
양문형 냉장고를 우리의 적은 살림에 보태었다.
서울 외곽 오피스텔에서 시작한 우리는
3년 뒤 서울의 용산구 후암동 한 낡은 빌라로
전세 살림을 옮겨왔다. 작은 트럭을 한대 빌렸을 뿐
도배부터 장판까지 직접 깔며 이사했다.
아이가 아직 없었기에 가능한 이사 형태였다.
우리는 입주 전 직접 도배를 했다.
도배라곤 해본 적 없었지만 3년 차 신혼의 로망은
생각보다 힘이 세고 진취적인 것이었다.
전문가의 도움 없이 우리 두 사람은
1주일에 걸쳐 도배를 직접 해냈다.
그리고 방 두 개와 거실 장판을 하루 만에 함께 깔았다.
24평 빌라는 우리의 새로운 궁전이었다.
믿을 수 있었다.
나의 꿈속에서처럼 마법에 걸린 듯
한 아이가 찾아올 거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제로 그곳에서 우리의 아이는
우리가 꿈꾼 모습 그대로 찾아와 주었고
궁전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 되었다.
힘든 줄도 모르고 일을 사서 하던
신혼 3년 차의 첫 확장 이사.
이삿날 공식 메뉴 짜장면을 먹어 까매진 입가를
가을바람이 스윽 말려주던 그런 날이었다.
다정한 햇살이 빌라의 넓은 둘레 창 사이로 들어왔다.
우리의 새 보금자리 첫 방문객이 되어 이방 저 방
휘휘 둘러보고 나갔다.
오늘처럼 서늘한 바람이 불고 하늘이 푸르렀던 가을날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배우자인 나를 감동시켰었다.
유일한 한명의 타겟을 대상으로 한, 사랑의 마케팅
너무나 당연하게도 나는 그가 가진 브랜드에 매료되었다.
이후 나의 행보는 그 브랜드를 추종하는 것이었다.
그가 생산하는 것을 소비하고
그가 내세우는 가치관을 쫓았다.
그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보고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탈이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