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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동 Dec 05. 2021

우리는 왜 소외된 존재들을 살펴야 하는가

삶 #9.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1. 걸을 수 없어 안락사당하는 경주마와 이용 가치를 잃어 폐기 직전인 로봇 기수


천선란 작가의 <천 개의 파랑>은 머지않은 미래 과천의 경마장 트랙 위를 달리는 경주마 투데이와 휴머노이드 로봇 기수 콜리의 이야기이다. 머지않은 미래 경마산업 관계자들은 침체된 경마산업을 되살릴 묘안을 생각해내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 기수들을 휴머노이드 로봇 기수로 대체하는 것이다. 좀 더 가벼워 경주마에 부담도 덜하고, 말에서 떨어져 부서져도 로봇 기수 따위 폐기하면 그만이니 보다 저렴하고 효율적이며, 그러니 속도를 한도 끝도 없이 올릴 수 있어 재미는 배로 올라갔다. 덕분에 경마장은 스피드의 짜릿함과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해졌으나 빨라진 속도에 따른 신체적 부담 때문에 경주마들의 수명은 점점 짧아졌다. 한 때 에이스 경주마였던 검은 말 투데이의 연골도 태어난 지 1~2년 만에 모두 닳아버렸고, 더 이상 트랙에서 뛸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된 투데이를 경마공원 경영진은 안락사시키기로 결정한다.


달리지 못하는 말은 말이 아니다. 공부하지 않는 학생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복희도 듣고 자랐지만 그 안에 내포된 박탈의 의미는 천지 차이였다. 인간 역시 이따금씩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할 때가 있었으나 언제나 회생 가능했다. 하지만 말은 말 취급을 받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었다. 달릴 수 없는 말은 지구에서 살아갈 이유를 얻지 못했다... 경주마의 수명은 1년에서 1년 반 정도였다. 그 시기가 지나면 관절의 연골이 다 갈린 말들은 서 있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운 좋은 몇몇의 말들은 제주도나 강원도의 초원지대로 팔려 갔으나 대부분의 말들이 처리 불가로 안락사를 당했다.


투데이의 파트너인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말들에 가해지는 하중을 최소화하기 위해 카본으로 만들어진 작은 초록색 휴머노이드 콜리는 제작 과정에서 실수로 다른 로봇 기수들과 다른 칩이 삽입되어, 호기심이 많고 인간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이상한 로봇이 되었다. 콜리는 투데이와 함께 트랙 위에서 달리던 도중 경기를 계속하면 영영 걷지도 못하게 다리가 망가지고 말거라는 것을 깨닫고 투데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낙마한다. 하반신이 박살 나 이용가치를 잃은 콜리는 폐기 직전에 연재를 만난다. 로봇에 강한 흥미를 가지고 있던 연재는, 걷지 못하는 자신의 언니 은혜를 찾으러 경마장에 왔다가 하반신이 부서져 건초 위에 누워있는 하늘을 이야기하는 이상한 로봇 콜리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을 느끼고, 전재산 80만 원을 주고 콜리를 집으로 데려온다.


은혜는 어릴 적 앓은 병으로 걷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된 연재의 언니다. 은혜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걷지 못하는 다리나 휠체어가 아니라, 자신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동정이다. 이 몸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다면 애초에 생겨나지도,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니 고쳐야 할 것은 자신의 다리가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세상의 모든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를 바꾸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 장애인들이 적응해야 한다는 세상의 효율논리와 배제이다. 그러다 보니 이용가치를 잃은, 달릴 수 없는 비정상적인 말로 규정된 투데이의 처지에 공감한다. 투데이를 살리고 싶다. 방법이 없는 걸까?


"나도 너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면 좋을 텐데. 너나 나나 이게 무슨 고생이니." 한탄하듯 내뱉던 은혜가 곧 아무렇지 않게 뱉은 말을 물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리를 고치고 싶다는 건 아니야. 물론 고치게 된다면 좋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하지는 않아. 꼭 같을 필요는 없잖아. 그러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으니까."
투데이가 은혜의 머리에 코를 박고 킁킁, 바람을 뿜었다. “그저 불편하니까 그렇지. 이 바퀴로는 오를 수 없는 계단과 밟지 못하는 땅이 너무 많으니까. 기술이 발전해서 로봇이 말도 타는데 왜 나는 아직도 이걸 타고 있는지 몰라. 안 그러니?”
"너도 나도 알아서 잘 살아갈 수 있는데, 반드시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도움받지 못하면 살아가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기들 멋대로 생각하는 게 꼴 보기가 싫다...

...보경이 은혜에게 괜찮다고 말할 때마다, 이 사소한 불편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할 때마다 은혜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정상적인 사람에게 너의 정상성은 괜찮은 것이고, 그것이 너를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은혜도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보경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가 가끔은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음을 확인시키는 차갑고 날카로운 창살 같다는 것을. 휠체어 덕분에 걷지 못하던 이들이 움직일 수 있게 된 게 아니라, 버스와 지하철, 인도, 계단, 에스컬레이터 때문에 이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기술의 발달과정에서 은혜는 철저하게 삭제되었다. 사람들은 지하로 가라앉은 은혜를 모르는 척 외면하더니 어느 순간 휠체어에 앉혀놓고 측은하고도 안쓰러운 눈빛으로, 이 기술이 너를 구원했다는 듯이 굴었다. 이 몸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다면 애초에 생겨나지도,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였다. 우주는 자신이 품을 수 있는 것만 탄생시켰다. 이 땅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가 각자 살아갈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정상의' 사람들은 모르는 듯했다.



2. 경마장 레인 위에 선 우리


<천 개의 파랑>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주인공들에 대한 기시감은 어디서 온 걸까 생각을 해봤다.


나 역시 경쟁 때문에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항상 뭔가 해야 할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 역시 정해진 레인을 달리는 경마장의 말 같았다. ‘정상적인’ 속도에서 벗어나면 경쟁에서 패배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웠다. " '너 지금 뭐하니? 너 지금 이럴 때야? 네가 이러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뭐라도 열심히 하고 있을 텐데, 이러고 있어도 되겠어? 그러면 서서히 내가 너무 안이한 것은 아닌가, 너무 뒤처지고 있지는 않나 하는 불안감". 하루를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보내지 못한다면 죄책감이 느껴졌다. 휴식을 낭비라고 생각했다. 나는 사회가 규정한 트랙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생산적인가?


그러니 <천 개의 파랑>의 주인공들처럼 우리 역시 경쟁과 효율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편의점 관리 휴머노이드보다 유지비용이 비싸서 잘린 편의점 알바 연재처럼, 달리지 못하니 이용가치가 없어져서 안락사당하기 직전인 투데이처럼, 폐기 직전인 콜리처럼, 장애인들의 불편에 눈감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에 배제된 은혜처럼, 우리는 경마장의 경주마다. 생산적이지 못하면 비정상으로 규정되어 배제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워 달리고 있는. 우리의 속도가 아닌 세상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연골이 나갈 때까지 미친 듯이 달린다. 하지만 이게 당연한 걸까. 경쟁, 효율, 정상, 돈...


3.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에서 저자 김누리 교수는 독일과 우리나라 사회의 여러 모습을 비추어 보며 대한민국 사회의 불행이 다른 나라에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겼던 고통스러운 경쟁과 승자독식 논리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해왔지만' 당연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던 많은 것들이, 그러나 우리가 마치 '자연의 이치'인 양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던 것들이 독일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의 경쟁도, 등수도 없었고, 죽도록 매달리는 대학 입학시험도, 학비도 서열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젊은 날을 옥죄던 그 모든 것들이 없는데도 이 사회는 잘 굴러갈 뿐만 아니라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독일 사회를 보면서 서서히 우리 사회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살인적인 경쟁과 승자독식의 정글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보게 되었지요. 우리의 삶이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 우리 머릿속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다른 형태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 우리도 행복할 권리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해 온 많은 것들이 혹시 비정상이 아닌가'라는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된 것이지요... 독일 사회는 그 구성원에게 최대한 많은 기회를 제공하려고 하는 반면, 한국 사회는 그 구성원에게 최소한의 기회마저 박탈하려고 합니다. "독일은 텐샷 사회인데 반해, 한국은 원샷 사회이다.".. 한국은 기회를 박탈하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사회이기도 하지요...


'독일은 텐샷 사회인데 반해, 한국은 원샷 사회이다.' 우리는 모두 경쟁에서 패배하면 죽음뿐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다. 사업하다 실패하면? 빚더미에 파산 신청. 사회적 안락사. 대학 입시에서 실패하면? 너는 지잡대야. 20대 후반 30대 초반에 제대로 된 회사에 취업 못하면 평생 백수행이든 좇소행. 수도권 자가 막차 못 탔으면? 무주택자로 평생 월세행. 우리나라에서 2020년 작년에만 13,195명이 자살했다. 이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안락사당하지 않기 위해 경마장 위에서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다.



4. 우울사회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경쟁과 효율 만능주의는 취직, 입시 등의 경주에서 패배한 경주마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안락사시킬 뿐만 아니라, 간신히 살아남은 경주마들의 소진과 우울의 원인이 된다. 우리 경주마들의 다른 이름을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성과주체'라고 부른다. 과거의 사회가 '규율사회', 즉 채찍으로 노동을 강제하는 사회였다면, 지금의 사회는 '성과사회'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성과주체에게 그 누구도 노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를 착취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과주체는 자유롭지 못하다.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성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성과주체는 스스로를 착취한다. 개인의 자아실현이라는 명목 하에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서점에서는 수많은 자기계발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된다. 활동과잉과 멀티태스킹이 미덕이 된다. 이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지만 성과주체는 실제로는 경쟁/성과/효율/정상성의 노예이다. 성과사회라는 경마장의 경주마들은 연골이 다 닳을 때까지 스스로를 착취한다. 연골이 다 닳으면, 그는 우울증과 소진(Burnout)에 압도당한다. 모든 에너지를 소진했기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을 수 없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5. 우리는 왜 소외된 존재들을 살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사라져 가고 학대받는 동물들에게 관심을 나눠줘야 할까? 우리는 왜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을 살펴봐야 할까?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받고 죽어가는 이유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옥죄는 이유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육식과 애완산업에 대한 수요가 있기 때문에 동물들은 효율적으로 생산되어 좁은 우리 안에서 죽어간다. 세상의 모든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를 바꾸는 것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의 세계의 속도에 맞춰야 한다. 우리의 세상은 효율적이고, 정상적이고, 생산적이다. 그리고 경쟁에서 밀려난 것들은 배제하고 차별한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은 효율이나 경쟁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존재는 약간의 비정상성을 가지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세상의 획일적인 속도와 약간씩은 다른 속도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동물들에게, 장애인들에게, 소수자들에게 세상의 정상적인 속도에 맞춰갈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 '정상인'들도 세상의 속도에 맞춰가기 버거워하고 있다. 모두가 번아웃이 온 것 같다. 나도 마찬가지로 경쟁 때문에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항상 뭔가 해야 할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달리고 있을 때 내가 쉬고 있으면 경쟁에서 패배하는 것이 아닐지. 그래서 세상의 '정상적인' 속도에서 벗어나면 이 세상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 아닐지 두려웠다. 우리는 경마장의 말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투데이처럼 세상이 정한 쓸모가 없어지면 안락사당할까봐, 콜리처럼 폐기당할까봐 두려웠던 게 아닐까?

이제는 '정상'이나 '효율'이니 하는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우리의 속도로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할 때다. 잠깐 멈춰서 사색해봐야 할 때다. 내가 정말 원해서 달리고 있는 것인지 경마장 레인 위의 관성 때문에 스스로를 착취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콜리가 투데이에게 남긴 이 말이 우리에게 하는 말 같다.


"너무 아프면 뛰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이미 주로에 섰으니까 그걸로 됐어요. 당신은 당신의 주로가 있으니 그것만 보고 달려요.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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