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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동 Mar 01. 2023

쾌락과 행복의 차이

삶 #16. 도파민네이션 - 애나 렘키

1. 나도 혹시 도파민 중독인가?

어느 날 문득 길을 걷다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예전만큼 하늘과 나무를 보지 않고 걷는 것 같다. 걷다가 약간의 공백이 있으면 핸드폰을 꺼내어, 볼 것도 없는 유튜브를 계속 새로고침한다. 아니면 인스타를 켜본다든가. 포탈 기사를 검색한다든가. 근데 막상 봐도, 별 재밌는게 있지는 않다. 근데 잠시간의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손이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으로 간다.


또는 회사에서 일할 때. 일하다 갑자기 짜증이 나면 내려가서 간식을 사올 때가 있다. 일하면서 얻는 스트레스에 대한 보상이겠지. 케익 한 조각에 커피 한잔 하면 기분이 갑자기 확 좋아진다. 온몸에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확 돌면서 살 것 같다. 그런데 다 먹고 나면? 생각보다 그렇게 좋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더 안 좋다. 더 이상 설탕이 없어!!! 카페인과 밀가루도! 하지만 또 내려가서 케익을 하나 더 사올 수는 없잖아? 나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


누구나 유사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정말 내가 원해서 회사가 끝나고 맥주와 야식을 먹는 걸까? 내가 정말 원해서 유튜브와 인스타를 계속 새로고침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정말 원해서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꺼내나?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닌데, 그러고 나면 기분이 더 안 좋아지는 이유는 뭘까? 혹시 나도 도파민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이 불만족의 근원은 무엇일까?



2. 행복을 위한 전략

2년전 쓴 글(https://brunch.co.kr/@hjd0620/11)에서, 나는 서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을 바탕으로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 나의 생각을 정리하였다. 글에서는 내가 행복의 기원에서 찾아낸 4가지 핵심적인 결론을 제시하였다.


1. 돈이나 물질적인 조건은 나의 결핍과 불편을 줄여줄 수는 있지만, 나를 결정적으로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다.
2.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이며, 소소한 행복들을 자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3. 내 삶의 주인은 타인이 아닌 자신이다. 비교는 행복의 적이다.
4.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은 연인, 가족, 친구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 행복과 불행은 이 장면이 가득한 인생 대 그렇지 않은 인생의 차이"다. 이 문장이 내 가치관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행복의 기원을 읽은 후로, 조금 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조금 더 작은 즐거움들을 많이 느낄 수 있도록 행동하고 있다. 내가 그런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에서, 사소한 즐거움에서 얻는 행복이 크다는 것을 새삼 자각하게 된 것이다. <행복의 기원>으로부터 나의 생각과 행동의 뿌리에 깊게 영향을 끼친 중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행복의 기원>에서는 인간의 동물성에 대해 집중한다. 인간은 100% 동물이다. 그러니 자신의 본능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내가 왜 행복을 느끼는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랑비에 젖듯 작은 즐거움들을 자주 느끼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한다. 최근에 애나 렘키의 <도파민네이션>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은 것인데, <행복의 기원>에서 내가 놓친 것이 하나 있었다. 쾌락과 행복은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쾌락과 행복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동물이니까. 나의 본능대로 행동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나의 욕구를 지나치게 억누르지 않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긍정적인 감정을 자주 느끼자.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호모데우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우리의 현대적 가치관과 행동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인본주의"는 일종의 종교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고유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모두 내 안에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가 중요하다. 네 삶의 주인은 너다! 예전에는 삶의 고통이 찾아왔을 때 교회나 성당에 가서 신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했었지. 그런데 지금은 고민을 얘기하면 다들 이런 얘기를 하지 않나.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세요. 스스로를 믿으세요.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고유한 신이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섬기는 것이 인본주의다.


...이러한 책자들에 적힌 문구는 개인의 행복을 좇는 것이 "좋은 인생"을 둘러싼 다른 정의들을 밀어내고 어떻게 현대의 처세술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종교인은 구원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심리학적 인간은 기뻐하기 위해 태어난다. 행복을 추구하라고 재촉하는 메시지들은 심리학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현대 종교 역시 자기 인식, 자기표현, 자아실현의 신학을 최고의 선으로서 알린다... "놀랍게도 내면의 신 관련 문헌을 들여다보면 도덕적인 권고가 거의 없다. '친절'과 '온정'은 자주 요구하지만, 실제로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위한 지침은 거의 없다. 그나마 있는 지침은 '느낌이 좋으면 하라'식으로 끝나기 일쑤다... - 도파민네이션, 50pg, 애나 램키


나의 가치관 역시 인본주의의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다. 힘든 일이 생길 때, 나는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잘 모르겠으면, 내 마음을 따르자. 내가 카톡 프로필 뮤직인 심규선의 <Inner>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네게 정말로 필요한 그 모든 것들은 그대의 안에 다 있어요." 그러니 나는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 위로, 대화, 모두 어찌 보면 인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을 수도 있겠다.


행복을 위한 나의 구체적인 전략, 역시 이런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내 감정이 제일 중요해. 내가 지금 뭘 원하는지가 중요해. 이런 의미로서의 인본주의. 그 부작용으로, 쾌락에도 가치 있는 쾌락이 있고 그렇지 않은 값싼 쾌락이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그래서 유튜브 보는 시간이 너무 많다든가, 디저트를 너무 많이 먹는다든가, 너무 게임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았다. 분명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쾌락을 얻기 위해, 자연스럽게 행동했는데 그 과정에서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왜일지 생각했다. 내가 쉴 줄 몰라서 그런 건가 생각도 했다. 너무 이 사회의 열심히 살라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까? <피로사회>에서 말하는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 그리고 자기 착취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까?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서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 피로사회, 29pg, 한병철


나는 항상 내가 쉬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물어 왔다. 뭐하자고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가? 왜 쉬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할까? 이런 고민을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행복의 기원>의 교훈들을 나의 삶에 적용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냥 자연스럽게 해. 먹고 싶으면 먹고, 쉬고 싶으면 쉬어도 돼.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너무 매사를 네 삶에 도움이 되는 일만 하지 않아도 돼. 이런 말을 스스로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 부산물로서 너무 쾌락주의적으로 생각하게 되면서, 오히려 내 삶의 주도권이 흔들리게 되는 맹점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행복을 위한 고민의 기나긴 길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를 찾았는데, 쾌락과 진정한 행복은 다르다는 것이다.


쾌락과 행복은 모두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지만, 쾌락은 이게 좋으니 계속하고 싶다는 감정이고, 이로 인해 중독될 수 있으며 단기적인 감정이라면, 좀 더 구체적인 의미에서의 행복은 만족이다. 이게 좋으니 이대로 충분하다는 감정. 쾌락과 행복의 차이, 단기적인 즐거움과 장기적인 즐거움의 차이이고, 도파민적 즐거움과 세로토닌적 즐거움의 차이이다. 그러니 쾌락과 행복은 엄밀히 말하면 다른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행복(이라고 착각한 쾌락과 자극)에 중독된 것이 아닐까? 행복이라는 신앙조차 나를 옭아매는 관념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3. 쾌락과 고통의 저울

글을 시작하면서, 회사 끝나고 맥주와 야식을 먹고 나면, 또는 유튜브와 인스타를 계속 새로고침하면서 내내 보고 나면 잠깐 기분 좋다가 왜 다시 기분이 안 좋아질까 물었다. 이 불만족에 대한 근원을, <도파민네이션>의 저자 애나 렘키는 "쾌락 이후에 찾아오는 갈망", Dip After이라고 설명한다. 어느 날 밤, 출출하고 공허함을 느껴서 오늘 하루 고생한 나를 위한 보상으로 치킨을 시키고 혼맥을 한다. 맥주 한 캔 팍 따고 얼음같이 차가운 첫 번째 한 모금 벌컥. 그 순간 도파민은 쭉 올라간다. 이거다. 즐겁다!! 다 먹고 나면? 도파민 분비량은 기존의 아무 일도 없었을 때의 평형상태. Baseline보다 더 아래로 내려간다. 그리고 오히려 고통을 관장하는 호르몬 디놀핀이 분비된다. 공허함은 더 커진다.

친구를 즐겁게 만나고 난 뒤의 공허함, 좋은 주말을 보낸 뒤의 공허함, 성취 뒤의 공허함. 큰 즐거움을 느낀 뒤의 우리의 이런 마음은, 우리의 뇌가 쾌락을 느낀 뒤에는 고통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그리고 누구나 경험하는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 "쾌락과 고통은 쌍둥이다."


...신경과학자들은 도파민의 발견과 더불어, 쾌락과 고통이 뇌의 같은 영역에서 처리되며 대립의 매커니즘을 통해 기능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쉽게 말해 쾌락과 고통은 저울의 서로 맞은편에 놓인 추처럼 작동한다... 그 저울은 평형을 유지하려고 한다. 한쪽이나 다른 한쪽으로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울이 쾌락쪽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저울을 다시 수평 상태로 돌리려는 강력한 자기조정 매커니즘이 작동한다. 즉, 항상성. 쾌락쪽으로 기울었던 저울이 반작용으로 수평이 되고 나면 거기서 멈추지 않고 쾌락으로 얻은 만큼의 무게가 반대쪽으로 실려 저울이 고통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이러한 쾌락과 고통의 상호 관계를 리처드 솔로몬과 존 코빗은 대립-과정 이론이라고 칭했다. "쾌락적 혹은 정서적 중립으로부터 오랫동안 혹은 반복해서 벗어나면 그만큼의 대가를 치른다." 그 대가란 자극과 반대되는 가치를 갖는 이후 반응이다. 그러니까, 옛말처럼 올라가는 건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는 뜻이다.

쾌락 이후에 찾아오는 갈망은 누구나 겪는 경험이다. 감자칩에 다시 손을 대든 비디오 게임을 한 판 더 하려고 클릭하든, 그런 좋은 느낌을 다시 갖고 싶어 하거나 간직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이다. 이 욕구를 해결하는 손쉬운 방법은 계속 먹거나 놀거나 보거나 읽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어떤 쾌락 자극에 동일하게 혹은 반복해서 노출되면, 초기의 쾌락 편향은 갈수록 약해지고 짧아진다. 반면 이후 반응, 즉 고통 쪽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갈수록 강하고 길어진다. 과학자들은 이 과정을 신경 적응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쾌락을 추구할수록 우리의 그렘린들은 점점 더 커지고 빨라지고 많아지며, 우리는 이와 동일한 효과를 얻기 위해 앞서 선택한 쾌락을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쾌락을 느끼기 위해 중독 대상을 더 필요로 하거나 같은 자극에도 쾌락을 덜 경험하게 되는 것을 내성이라고 한다. 내성은 중독의 발생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다... 오랫동안 과도하게 중독 대상에 기대면, 쾌락-고통 저울은 결국 고통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우리의 쾌락 경험 능력이 떨어지고 고통에 대한 취약성이 높아지면 우리의 쾌락 경험 능력이 떨어지고 고통에 대한 취약성이 높아지면 우리의 쾌락 설정값도 바뀐다.

고통 쪽으로 기울어진 쾌락-고통 저울은 앞서 상당한 절제 기간을 거친 사람들도 다시 중독에 빠지게 만든다. 왜 그럴까? 우리의 저울이 고통 쪽으로 기울어 있으면, 기저 평범한 기분(수평 상태)을 느끼려 해도 중독 대상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경과학자 조지 쿱은 이러한 현상을 "불쾌감에 따른 재발"이라고 표현한다. 중독 대상에 과거와 같이 다시 의존하게 되는 이유는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랜 금단에 따른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완화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 도파민네이션, 69pg, 애나 램키


그러니까, 쾌락과 고통은 사실 뇌의 동일한 영역에서 처리되며, 마치 저울의 양팔처럼 평형을 유지하려는 대립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쾌락을 크게 느끼면 그 저울은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을 관장하는 호르몬인 디놀핀을 분비하게 되고, 쾌락의 반동으로서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커다란 성취를 하고 나서 느끼는 공허함을 느꼈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현상 역시 이러한 뇌의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앞에서 쾌락을 중독될 수 있는 단기적인 긍정적 감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독의 기전 역시 이런 쾌락-고통 저울로 설명할 수 있다. 쾌락과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쾌락-고통 저울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 쪽으로 기울어진다. 같은 자극에도 고통은 더 많이, 쾌락은 더 약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즉, 쾌락에 내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면 좀 더 명확해진다. 뉴런들은 시냅스를 통해 전기신호와 신경자극물질을 주고받으며 소통하는데, 도파민은 다음 뉴런을 흥분시킴으로써 쾌락을 느끼게 하고 보상과 동기부여를 관장하는 신경자극물질이다. 그런데 도파민이 지나치게 분비되어 만성적인 과도한 자극이 계속 전달되면, 도파민으로 인한 흥분이 신진대사적으로 부담이 되기 때문에 지쳐서 뉴런이 죽게 된다. 따라서 도파민수용체가 있는 다음 시냅스에는 생물학적 안전장치가 있는데, 그것은 도파민 수용체를 하향조절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같은 도파민 자극에 동일하게 반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계속된 쾌락에 내성이 생기는 이유다.   


막연히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즐거움과 관련된 호르몬이니 하는 이야기는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도파민과 세로토닌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도파민은 쾌락을 주고, 세로토닌은 만족을 준다. 장기적인 행복은 세로토닌과 관련된 것이고, 중독될 수 없는 것이다. 도파민과 달리, 세로토닌은 전달됨으로써 다음 뉴런의 반응을 억제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충동을 조절하고, 만족을 준다. 도파민과 달리 다음 뉴런을 흥분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응을 억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주지 않고, 생물학적 안전장치가 필요 없다. 중독도, 하향조절도 없는 이유다. 다만 세로토닌을 하향조절하는 물질이 있는데, 그게 바로 도파민이다. 도파민이 지나치게 분비되면, 세로토닌이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게 된다. 이걸 우리가 쓰는 말로 풀어서 말하면? 더 쾌락과 자극을 추구할수록, 더 만족할 줄 모르고 행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까 쾌락과 행복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그리고 이를 통해서 나의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나의 행동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을 느끼기 위한 나의 행동은 도파민적인 행동일까, 세로토닌적인 행동일까?



4. 값싼 도파민

이러한 뇌에 대한 과학적 발견을 이해하는 것이 나에게 중요한 이유는 결국,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다. 내가 그 순간 즐거움을 느낀다고 해서 좋은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도파민은 눈이 멀어있다. 도파민은, 즉 쾌락은 장기적으로 이 행동이 나에게 도움이 될지 아닐지를 판단하지 않고, 그냥 자극과 즐거움을 줄 뿐이다. 이걸 먹으면 내가 살이 찔지, 다음날 술에 절어서 몸이 힘들지, 도파민의 일시적인 피크 이후에 오는 공허함 때문에 오히려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질지는 고려하지 않고 일시적인 자극을 줄 뿐이다. 행동의 전, 중, 후의 나의 반응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술, 유튜브, 디저트 이런게 땡길 때 내가 이 행동을 하고 나면 도파민 레벨이 Baseline 아래로 떨어져서 다시 공허함이 올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 나의 행동과 감정을 이해하고 관리하는데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은 다를 수 있다. 지금 치킨을 먹고 싶어도,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날씬한 몸매일 수 있듯이. 도파민중독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내가 그렇게 볼 것도 다 떨어져서 재미도 없는 유튜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새로고침하고 있다면, 그래서 늦게 잠에 들고 다음날 영향을 받는다면, 다이어트를 원하면서도 야식을 참지 못한다면, 어쩌면 내 자율성에 반해서 나의 뇌와 도파민이 나를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나의 행동과 동기부여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다루는 것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데 중요한 능력일 수 있다. 그래서 값싼 쾌락과 지나친 도파민을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도파민과 자극의 굴레에 빠져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아닌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5. 나의 평형을 유지하는 법.

도파민은 우리 뇌에서 쾌락과 동기부여를 관장하는 물질이다. 그리고 도파민은 한정된 자원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의 행동을 이끌어가기 위해 함부로 도파민을 사용하지 않는 버릇을 갖고 싶다. (*1) 도파민을 아예 죄악시하고 피하자는게 아니다. 지금도 딸기케익에 아이스라떼를 먹으며,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으니까, 이런 순간들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다.  다만 과도한 자극을 너무 좇지 말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어쩌면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신경과학적인 이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평안함, 절제, 덤덤한 하루, 심심함. 이런 것들이 나에게 오히려 더 큰 행복과 감사를 가져다주지 않을까?


과학은 모든 쾌락에는 대가가 따르고, 거기에 따르는 고통은 그 원인이 된 쾌락보다 더 오래 가며 강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즐거운 자극에 오랫동안 반복해서 노출되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감소하고, 쾌락을 경험하는 우리의 기준점은 높아진다. 우리는 순간적이고 영원한 기억을 뇌리에 새기기 때문에 쾌락과 고통의 교훈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물론 희망적인 소식은 있다. 우리가 오랫동안 충분히 기다리면, 우리의 뇌는 중독 대상이 없는 상황에 다시 적응하고 항상성의 기준치를 정상 수준으로 되돌린다. 저울이 수평을 이루는 셈이다. 뇌의 저울이 수평을 이루면, 우리는 산책하기, 해돋이 구경하기, 친구들과의 식사 즐기기 등 일상의 단순한 보상에서 다시 쾌락을 맛볼 수 있다. - 도파민네이션, 87pg, 애나 렘키


내가 무의식적으로 걸을 때마다 핸드폰을 뒤적거릴 때마다 정말 내가 원해서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나의 자유의지를 알고리즘과 도파민에 양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정말 원해서 핸드폰을 보고 있나? 또는 내가 정말 원해서 야식을 먹고 있나? 설탕을 먹고 있나? 자극에 중독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스크롤을 내리고 유튜브를 새로고침하면서 느끼는 불만족의 원인이 아닐까? 도파민의 중독에서 벗어나고 평형을 되찾고 싶다. 요즘 어플리케이션 별로 사용시간을 제한하고, 하루에 한 번은 핸드폰을 두고 10분이라도 걸어보려고 한다. 제대로 휴식하기 위해서. 핸드폰과 SNS를 사용하는 것이 하루에 수백 번씩 뇌에 도파민 주사를 맞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표현한다. 물론 인터넷과 핸드폰 없이 살자는 건 아니다. 나도 유튜브에서 좋은 정보를 정말 많이 얻으니까. 다만 정도껏 잘 쓰도록 관리를 해보자는 거다. 강박적인 핸드폰과 SNS의 사용이 우리의 삶을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될 땐, 잠시 떨어져 있는 것도 괜찮을 수 있다.


도파민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은 운동, 나의 경우에는 헬스다. 쾌락과 고통은 쌍둥이이고, 저울에 양편에 놓여있는 것이라고 했다. <도파민네이션>은 반복적인 자극으로 기울어져있던 쾌락과 고통의 저울은 아무리 심각한 경우라도 일반적으로 4주면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운동이 저울의 반대편, 고통에 무게를 올려둠으로써 균형을 되찾는데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근 일 년 정도 일주일에 적어도 두세 번은 꾸준히 운동해오고 있는데, 몸도 마음도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것이 마음에 든다. 몸의 움직임에 집중하면서 오히려 잡생각이 줄어들고 머리가 맑아졌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 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적으로 조종하는 것이다... - 피로사회, 48pg, 한병철


우리는 과잉 사회에 살고 있다. 인터넷, 광고, TV, SNS, 이런 것들로부터 끊임없이 자극을 받고, 이것이 인간을 번아웃과 우울로 이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넘치고 끊임없이 자극이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쉬지 못한다. 새로운 정보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자극에 대해 무의미하게 반응할 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가짜 활동성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나아가는 진정한 활동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이리저리 자극과 쾌락에 휩쓸려 관성대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 핸드폰에 눈을 두고 걸어가며, 자신의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람들, 그 사이에 내가 있다. 자극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도리어 아무것도 채우지 못한다. <피로사회>에서 한병철은 해답으로서 "깊은 심심함"을 제시했다. 깊은 심심함을 느끼지 못하고, 즉각 반응하며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몰락이며 탈진이다.


자극으로부터 벗어나 심심해지기 위해 노력해봐야겠다. 그리고 나의 그 비어있는 공간에 무엇이 채워지는지 관찰하고 싶다.




(*1) 한편으로는 성과주의, 성취 역시 도파민의 영역이고, 과도한 성취에 대한 욕심이 나를 괴롭힐 때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의 평안함을 깨트리고, 자극적이고, 스트레스를 준다. 하지만 성취를 위한 도파민은 어느 정도는 좋은 도파민이 아닐까? 내가 어떤 모양의 삶을 살고 싶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아무튼 나는 누워서 유튜브나 인스타 뒤적거리면서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모습의 삶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자극과 스트레스와 욕심을 피해 산으로 들어갈 수는 없잖아. 모든 스트레스와 욕심이 나쁜 걸까?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나의 중요한 생각의 주제 중의 하나다. 언젠가 글을 이곳에 글을 쓰게 될지 않을까?

(*2) 최근 이런 고민을 하면서 안데르스 한센의 <인스타브레인>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 아래 두 영상도.

https://youtu.be/1WZwzy9rCDk                                 

https://youtu.be/A3svaOilI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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