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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동 Mar 13. 2023

어떻게 사람이 그래

삶 #17. Thirsty & 헤어질 결심

1. Thirsty

내가 아끼는 친구가 검정치마를 너무 좋아는데도 Thirsty만은 이 악물고 듣지 않았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검정치마의 3집은 사랑을 주제로 한 3부작으로 구성되어, 3집 Part 1 <TEAM BABY>(2017), 3집 Part 2 <THIRSTY>(2019), 그리고 마지막으로 3집 Part 3 <Teen Troubles> (2022)를 마지막으로 완성되었다. 왜 Thirsty를 듣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나 역시 그랬으니까.


처음 검정치마를 듣고 조휴일의 음악을 즉시 사랑하게 된 건 이런 아름다운 가사들이 나의 마음의 깊은 곳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내 사랑은 자로 잰 듯이 반듯해
한 번도 틀리지 않아
실처럼 가늘 때에도
절대로 엉키지 않아
- Big Love
변하지 않는 건 다이아몬드하고
널 사랑하는 나밖에는 없다고
- Diamond
붉은 장미로 한껏 치장해도 모자를 우리는
변화가 필요하지 않은 걸
완벽하지 않아 기쁜 걸
내가 모자르는 만큼 너는 조금 모나있거든
- Love is all

https://www.youtube.com/watch?v=QJ4fmVJOuxU


<TEAM BABY>의 예쁘고 아름다운 가사는 자연스레 빛이 난다. 반면, <Thirsty>를 채운 것은 <TEAM BABY>의 정제되고 아름다운 가사가 아닌, 거칠고 날것인 가사들이다.


그녀가 나의 간을 봤을 때
난 눈 감고 살구색만 칠해댔죠
왜 지금은 검은 방안에
혼자 짜게 식어있느냐고 물어보면
나 부끄러워요 - 상수역
신경 쓰지 않는 니가 신기할 뿐이야
사랑 빼고 다 해줄게 더 내밀어봐
다른 데서 퇴짜 맞고 와도 넌 오케이
- 광견일기
사랑의 세례를 세 번 입고
더러워질 대로 더러운 영혼
내 여자는 어딘가에서 울고
넌 내가 좋아하는 천박한 계집아이
- 빨간 나를

https://www.youtube.com/watch?v=JoC2a3-3mms


사랑의 아름답고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TEAM BABY>와 달리 <Thirsty>는 사랑의 추악한 면과 권태, 욕망, 갈증을 주제로 한다. <TEAM BABY>에서 보여줬던 말랑말랑한 노래들을 원했던 많은 팬들은 실망하고 떠나갔다. 가사가 더럽다, 여성의 대상화 아니냐 온갖 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여섯 번째 곡인 Bollywood는 마치 사람들의 실망과 논란을 예상했다는 듯이, 번지수 한참 잘못 찾아왔다고 놀리는 것 같다.


뭘 기대 하는지 알아 어디서 들어봤겠지
먼 별들의 고향
넌 근데 잘 못 온거야
여긴 춤과 눈물에 순서가 없는 걸
- Bollywood



 2. 헤어질 결심

작년 내게 최고의 영화를 꼽는 것은 정말 어렵다. 멋진 영화를 많이 만난 한 해였다. 지난번 글을 썼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헤어질 결심>,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듄>, <애프터양>... 그중에서도 <헤어질 결심>은 내게 정말 많은 여운을 남긴 영화다. 정서경 작가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다고 하는데, 그 끝에 있는 작품이 헤어질 결심이 아닐까? 지금도 수많은 대사와 장면들이 머릿속에 생생하다.


작년에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보고 나서의 사람들의 반응에 <Thirsty>에 대한 이러쿵 저러쿵이 떠올랐다. 길게 얘기할 것도 없이, 그거 결국에 불륜영화 아니냐는 거였다. 아니 아내가 있는 남자가 심지어 살인 용의자랑 사랑이니 뭐니 하는데 그거 결국 불륜 옹호하는 영화 아냐? 아무리 예술적으로 훌륭해도 그 소재가 비도덕적이라면 용인이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어떻게 불륜을 소재로 영화를 써? 그냥 불쾌해서 보고 싶지 않다. 이런 말들이었다.


나는 이런 단정적인 말로 가득한 흑백의 세상이 두렵다. 길거리는 세상과 인간의 어두운 면을 덮기 위해 눈을 감고 걸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이 그래? 이런 말에 담겨있는 조악한 도덕주의와 회피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야를 쪼그라드게 만든다.



3. 울타리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자극적인 연예기사의 제목들과 댓글로 달린 그 반응들을 보면서, 이 웹페이지는 인간의 어떤 측면을 보여주는지 생각해본다. 연예인들, 정치인들이 행한 수많은 잘못과 여론의 단죄... 수많은 쯧쯧쯧. 과연 공인들을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도덕적일까?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자신에 대해서 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일까?


공인들이 정말 윤리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면 비판을 해야할 것이다. 공인이 됨으로써 감수해야 하는 책임의 무게는 무겁다. 도덕은 사회적 약속이고 사회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에 걸맞은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이 요구됨은 당연하다. 근데 그와 별개로 온갖 가십을 쫓아다니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사람들의 댓글을 보며, 이것이 다른 사람들의 도덕적 수준을 끌어내림으로써 자신의 수준을 올리는 일종의 스포츠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나아가 자신의 부정적인 가능성에 대해 눈감는 모습.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더더욱 불완전해지는 모순. 그냥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고 치부해버리는 편협함. 그 좁은 울타리에 숨어서 지내는 것은 편안하고 재미있다. 이 울타리 밖에 있는 놈들은 전부 다 괴물이야. 휴 나는 안전한 이 울타리 안에 있어서 다행이야. 하지만 혹시 나도 저 울타리 밖으로 넘어가면 어쩌나 불안하고 두렵다. 하지만 그 울타리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끔 궁금하다. 이 울타리는 어떻게 세워진 것일까? 울타리 밖은 정말 괴물로 가득한 지옥일까?



4. 우리의 감각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색깔만으로 표현하면 어떤 색일까? 아무튼 흑과 백만으로 표현하기엔 부족할 것이다. 봄은 벚꽃의 분홍색, 새 잎의 연두색일 수 있겠다, 여름은 울창한 숲의 초록색, 또는 동해의 파란색일 수 있다. 가을은 노란색일까? 겨울은 눈의 흰색, 또는 시베리아 공기의 진한 파랑색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실 지 모르겠는데, 사실 세상을 색깔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치자색의 피부에 남색 옷을 입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으로는 우리의 목소리가 굵은지 얇은지는 알 수 없다. 커피의 향이 어떤지는 코로 맡아보기 전에는 모른다. 음식의 맛이 단지 쓴지는 먹어봐야 안다. 사실 다섯 번째 감각도 있다. 촉각이라는 것인데,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이 부드러울지, 거칠지, 차가울지, 따뜻할지는 잡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사람이 어떻게 그래"의 울타리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세상을 정지된 흑백사진으로만 감각하는 것이다. <헤어질 결심>이 불륜영화라는 이유로 보지 않는 사람들. <Thirsty>의 사랑의 어두운 모습이 모두에게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이 수많은 색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세상의 온전한 절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로막는 울타리가 누구의 마음에나 있다. 언젠가 우리는 그 울타리를 뛰어넘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예술은 우리가 상대방의 마음을 감각할 수 있는 여섯번째 감각, 공감을 확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세상이 이래야 한다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인간의 수많은 색상을 그저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예술을 통해 세상이 흑백사진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내 안에 어떤 색이 있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5. 예술의 쓸모

<불안>에서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불안을 느끼는 원인들을 파헤치고,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을 잃을까봐, 사람들의 속물근성 때문에,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또는 삶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불안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이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사람들이 선택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예술이다.


예술적 매체는 사람이 찾지 않는 무덤에서 쉬고 있는 모든 드러나지 않은 삶의 가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술이 사람의 공감을 확대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처음 생겨날 때부터 위대한 실패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조롱이나 심판은 삼간 특별한 예술 형식이 있다. 비극의 장점은 파국을 맞이한 사람들 - 불명예스러운 정치가, 살인자, 파산자, 감정적으로 강박감에 사로잡힌 사람 - 의 행동의 책임을 면제해주지는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어떤 수준의 공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이 마땅히 이런 공감을 받아야 하지만, 실제로 받는 일은 드물다... 비극을 본 관객은, 주인공에게 닥친 것과 비슷한 상황이 닥쳤을 경우 자신도 언제든지 파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겸손해진다... 변태와 정신병자, 실패자와 패배자를 이야기하는 신문이 이해의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 있다면, 비극은 반대편 끝에 있다. 비극은 죄지은 자와 죄가 없어 보이는 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이며, 책임에 대한 통념에 도전하고, 인간이 수치를 당한다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까지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존중하면서 그 사실을 심리학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해낸다.


예술, 그중에서도 비극은 보통 더럽고 어두운 것을 소재로 한다. Thirsty와 헤어질 결심은 그런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우리와 같은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 그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불운으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비극적 감정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 면밀히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비극은 편협함의 울타리를 무너뜨려준다. 결국 악은 너무나도 평범한 것이고, 우리 모두의 내면에 실재한다는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비극은 그 소재가 거북하고 더럽더라도. 세계의 어두운 반쪽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럼으로서 우리는 "춤과 눈물에는 순서가 없다는 걸"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춤이 상징하는 밝은 세계와 아름다운 사랑. 눈물이 상징하는 어두운 세계와 더러운 사랑 모두 우리의 것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술의 공감을 통해 소설, 영화에 등장하는 죄 지은 자와 죄가 없어보이는 자가 사실은 큰 차이가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패배자와 승자, 성인과 죄인으로 지칭되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의 수많은 가능한 스펙트럼의 중간에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대로 괜찮다.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공감은 우리 역시 어떤 상황에서는 그들과 같은 재앙에 말려들 수 있다는 느낌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이 우리에게 가능한 범위 바깥에 놓인 것처럼 보일수록 공감은 줄어든다... 질투심에 사로잡혀 애인을 죽이거나, 고용주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돈을 훔치거나, 탐욕스러운 기질 때문에 신세를 망치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멀쩡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렇게 우리의 성격이나 상황을 그들과 나누는 강철 벽에 자신감을 가진다면, 관용은 사라지고 대신 냉담과 조롱이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러나 비극 작가들은 저항할 수 없는 진실로 우리를 이끈다. 역사상 인간이 저지른 모든 어리석은 일은 우리 자신의 본성의 여러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내부에도 최악의 측면과 최선의 측면을 아울러 인간 조건 전체가 담겨 있으며, 따라서 적당한, 아니 엉뚱한 상황이 닥치면 우리 역시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플로베르에게 예술은 조악한 도덕주의의 정반대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다. 예술은 인간의 동기와 행동을 깊이 탐사하는 영역이고, 이 영역에서는 어떤 사람을 성자나 죄인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조롱했다.


모든 인간은 인간의 가능한 최악의 모습과 최고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 인간이 처한 상황이나 경험한 것에 따라 발현되는 부분이 다를 뿐이다. 인간에게 그런 최악의 모습이 있음을 부정하고 덮어두는 것이 더 위험한 일이다. 언젠가 나의 가치관과 도덕이 시험받는 순간이 왔을 때, 나에게 이런 갈증과 결핍이 있어. 하지만 나는 어떠한 인간이니, 그러지 말아야지, 라는 선택을 하는 사람과,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 미친거 아냐? 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사람. 동일한 선택에 도달하더라도 너무 다른 종류의, 다른 깊이의 인간이다. 과연 어떤 사람이 더 단단히 자신의 중심을 지킬 수 있겠는가?



6. 헤아린다는 것

<Thirsty>의 CD 속지 첫 장에는 마태복음이 적혀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남을 헤아리는 만큼 우리 스스로를 헤아릴 수 있다. 그 이해의 범위를 넓혀가는 것은 내게 평생의 숙제이다. 사실 편협함의 울타리는 우리의 마음에 세우는 것이다. 울타리를 세움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좁혀가는 일이다. 어찌 보면 뉴스나 영화에 나온 인물, 가사를 쓴 사람을 이해하고 못하고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람이 그래? 라는 날카로운 창의 방향이 나의 심장을 향하는 순간이다. 내가 울타리 밖에 서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벌거벗음이다. 나의 부정적인 모습을 목격했을 때 스스로를 온전히 품어주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가?


내 시대는 아직 나를 위한 준비조차 안된 걸요
- 난 아니에요


어쩌면 <Thirsty>의 거칠고 날것의 가사들에 거부감을 느끼던 그 시대의 나는 인간과 나아가 나 스스로의 어두운 모습까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Thirsty>에 위선을 전부 벗어던진 솔직한 인간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더욱 애정이 간다. 그것이 인간의 솔직한 감정을 보듬어주는 거칠지만 따뜻한 가사인 것 같아서. 그런 날 것의 모습이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존재함을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싶다.


<TEAM BABY>, <Thisrty>에 이은 사랑 3부작의 마지막인 3집 Part 3 <Teen Troubles>는 요란한 매미소리와 함께 아래와 같은 나래이션으로 시작한다.


그때는 알 수 없었지요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어쩌면 저주가 아닐까?'라고도 생각해 봤지만
난 그저 열일곱을 살던 중이었어요
귀가 찢어질 듯 매미가 울던 1999년의 여름밤
혹독하고 푸르던 계절이 깊게 긁고 간 자리
만약에 그때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다면
난 당장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하지만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아마 같은 실수들을 또다시 반복하겠지요
그래도 괜찮아요
전부 다 내가 원했던 거에요
이 모든 게 다 내가 원했던 거라구요
- Flying Bobs


https://www.youtube.com/watch?v=PlDudxUMAho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더라도 아픔을 다시 온전히 느끼고 싶어하는 동물이다. Part 3를 조휴일이 이렇게 시작한건, 가장 순수하던 17살의 여름의 사랑하는 감정에서, <TEAM BABY>와 <Thirsty>의 상반된 모습의 사랑 모두 자신의 안에 있었다는 인정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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