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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동 Apr 29. 2023

불안

삶 #18. 불안 & 감정이라는 세계

1. 불안

얼마 전 바쁜 시기가 끝나고 며칠간 휴가를 가졌다. 사실 바쁠 때는 쉬고 싶다, 쉬고 싶다 찡찡댔는데, 막상 휴가가 되고 나니 그닥 좋지만은 않았다. 다들 그런 경험 있지 않은가? 시험기간에는 뭘 해도 재밌고, 심지어 평소엔 관심도 없던 다큐조차 블록버스터 보는 것 마냥 재미있잖아. 근데 시험기간이 끝나고 나면 다 귀찮고 재미없어서 그냥 늘어져서 쉬고 싶은. 그런 느낌을 이번에도 받았다. 막상 진짜 쉬게 되니까 심심하더라고.


오히려 나는 쉬면서 불안을 느꼈다. 왜? 사실은 불안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작년 내내 걱정했던 회사에서의 고민도 잘 해결이 되었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사람들과도 좋은 시간 보내면서 내 삶은 잘 굴러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나는 불안을 느꼈을까. 그 좋은 휴가에?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아래와 같이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는 원인을 정리했다.


1) 사랑결핍 : 우리가 스스로를 해석하는 방식은 다른 사람이 나를 해석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받는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나아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필요한 존중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2) 속물근성 : 이런 마음이 커질 때,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나 돈과 같은 하나의 가치 척도로 모든 인간을 평가하는 속물적인 마음을 갖게 된다. 속물근성 역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과 사랑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속물근성은 스스로와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더욱 불안하고 괴롭게 만든다. 속물근성은 조건적인 가치에 따라 인간을 평가하나, 인간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을 원형으로 간직하고 이를 희구하기 때문이다.

3) 기대 : 더불어, 삶에 대한 기대가 커질수록 우리는 더욱 큰 불안을 느낀다. 이룰 수 있는 것을 이루지 못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실패로 여긴다. 현대사회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잠재력의 최대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고 나아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이기도 하다.

4) 능력주의 : 근대에 들어오며 왜 사람이 가난하고 무엇이 사회적 가치를 결정하느냐를 설명하는 방식에 응보의 관점이 강력하게 개입하게 된다. 성공한 사람은 더 성실하고, 똑똑하고, 심지어 도덕적이기 때문에, 그런 성취를 이루지 못한 사람보다 실제로 나은 인간이라는 능력주의적인 관점이 팽배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낮은 지위에 처하거나 충분한 성취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더욱 큰 심적 고통을 느끼게 된다.

5) 불확실성 : 위와 같은 지위에 대한 갈망의 바탕이 되는 삶의 조건은 경제적 변동나 재능 운과 같은 요인에 따라 출렁인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을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요인에 따라서 큰 영향을 받다 보니, 이런 불확실성이 사람들의 불안을 부추긴다.


나의 삶에서 가장 큰 불안의 원인을 굳이 하나만 꼽자면, 알랭 드 보통이 꼽은 세 번째 불안의 원인, 기대일 것이다. 이전 글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나의 가장 큰 두려움 중의 하나는 나의 삶의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90, 100살 할아버지가 된 내가 죽기 직전이 되어 병상에서 삶을 되돌아보며 "아, 내가 원하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때 왜 용기 내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이런 후회를 하는 것이 두렵다. 그러나 역시, 자아에 더해지는 모든 것은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부담이기도 하다. 더 뛰어나고 싶고 더 많은 것을 얻고 싶다. 나의 커리어든 사랑이든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 늦어선 안된다라는 부담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인생은 레이스가 아닌 춤이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춤을 추며 살아가면 된다는 말을 하던데.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나는 나아가지 않는 순간에 불안을 느낀다.



2. 왜 우리는 두려움을 느낄까?

<감정이라는 세계>에서 레온 빈트샤이트는 두려움이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해 온 자기보호 매커니즘이라 설명한다. 아프리카의 스탭 지대를 가로지르는 우리의 조상들을 상상해 보자. 저 쪽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때, 가능성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저 수풀 안에 맹수가 있을 가능성. 잡아먹히기 전에 어서 도망가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그냥 바람에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를 내가 착각한 것일 가능성이다. 여기서 후자의 가능성이 훨씬 크겠지만, 만약 진짜 맹수가 저 수풀 안에 있는데 별일 없을 거라고 느긋하게 생각했다면, 우리 조상은 유전자를 퍼트리기도 전에 모두 잡아먹혔을 것이다. 두려움은 이처럼 자연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매커니즘이다. 야생에서 준비되지 않은 위험에 직면하는 것보다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대비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을 느껴온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도시에서 갑자기 맹수를 직면할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것, 통제할 수 없는 것, 특이한 것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과 불확실성이라도 우리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예를 들어 발표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맹수가 나타나 잡아먹힐 가능성이 없는데도, 그 자극이 편도체를 자극하고 우리 몸의 경보 시스템을 울리기 때문에, 두려움이라는 신체적, 정신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혈압이 상승하고, 호흡이 얕고 빨라지며 근육이 긴장한다.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다른 모든 생각은 지워지고 머리가 하얘진다. 꼭 이렇게 맹수와 같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가 아니라도, 미래의 불확실성, 삶에 대한 기대 이런 것들 때문에 생각은 현재에 존재하지 못하고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불면의 밤이 계속된다. 우리는 이런 불안, 걱정, 두려움과 싸우려 한다. 가끔 내 생각이 너무 빙빙 맴돌고 불안을 느낄 때마다 나의 뇌에게 생각을 좀 멈춰! 가만히 좀 있어봐 제발 하고 짜증을 내고 싶기도 하다.



3. 내가 느낀 두려움의 본질

우리는 항상 상황이나 감정을 통제하려 한다.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있을 때, 마치 생각만 하면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처럼 하루종일 생각하고, 물어보고, 찾아본다. 내가 두려움을 느낄 때, 이성으로써 그런 두려움을 통제하기 위해 글을 쓰든, 산책을 하든, 맛있는 먹든 어떻게든 그런 감정을 이기려 든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 행동의 결과와 마음은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생각만 빙빙 맴돌 뿐.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억누르려 할수록 부정적인 감정은 더욱 선명해진다. 코끼리 생각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코끼리 생각을 하게 되는 것처럼. 불안 역시 마찬가지다.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나쁜 감정이라고 이기려고, 통제하려고 하다 보니 더욱 나의 머릿속에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


작년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회사에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기존에 하던 일에서 벗어나 회사의 디지털 혁신을 담당하는 팀으로 파견 아닌 파견을 나오게 되었는데, 사정상 기존 본부와 새로운 팀의 일을 병행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는 내가 바라던 방향이기도 했던 것이, 본업도 잘하면서도 5년, 10년 뒤 나만의 강점을 갖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두 본부의 일을 모두 병행하면서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양쪽 본부 선배들에 눈치도 많이 보였고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양쪽에 발 걸치고 있으면 티오는 차지하고 있는데 한쪽 일에 집중하지 못하니까 탐탁지 않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열심히 해서 양쪽 본부에 내 존재가치를 입증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지금 내가 하게 된 일이 내가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고, 즐거움을 느끼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안이 더 커졌던 게 아닌가 싶다. 나의 불안의 가장 큰 원인. 삶에 대한 기대. 지금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더이상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떡하지. 후회하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선택의 결과를 내가 온전히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회사의 상황에 따라,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들 생각은 어떤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불확실성도 나를 불안하게 했다.



4. 모든 부정적인 감정은 나쁜 걸까?

작년에 A팀의 선배들에게, B팀의 선배들에게 양쪽 일을 병행하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을 얼마나 많이 상상했는지 모른다. 말 그대로 수백 번을 상상했다. 어떻게 말해야 기분이 덜 상하게 할까, 어떻게 말해야 내가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도 많이 배우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스트레스도 정말 많이 받고 많이 불안했다. 이 생각을 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 많았다. 다행히 대화가 잘 풀려서 내가 원하는 비중으로 병행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회사 내의 불확실한 거취와 관련해서 작년에 느낀 두려움은 좋은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업무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게 도와주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하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을 느꼈던 이유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항상 원하던 일을 하고 있다는 어찌 보면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니었을까? 내가 직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고, 내 5년, 10년 뒤에 바라는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느꼈던 근거 있는 불안이었던 것이다.


불안이나 걱정, 슬픔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사람들은 모두 억누르고 피하려 한다. 하지만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나쁜 것은 아니다. 모든 감정은 우리가 느끼는 이유가 있다. 감정은 내가 지금 처한 상황에서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가장 좋은 지표다.


우리는 항상 불쾌한 감정의 싹을 미리미리 잘라버린다. 그리하여 긴급한 상황에서 우리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고통이나 두려움과 같은 신호를 듣지 못하게 한다. - 감정이라는 세계


내가 작년에 회사에서 느낀 불안은 지금까지 내가 항상 바래왔던 일을 하고 있으니, 더 최선을 다해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만약 새로운 곳에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이 두렵다면, 준비가 하나도 안된 채 낯선 곳에 떨어져 고생하지 않도록 언어도 미리 배우고 여행 준비도 철저히 하라는 의미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갈까 두렵다면, 그만큼 그 사람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니 마음을 다해 아껴주면 된다. 내가 이번 휴가에 불안을 느꼈던 것? 이제 하나의 문을 열었을 뿐이니 자만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보자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우리는 두려움을 통제하고 억누르려 할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언어로써 나의 마음이 이성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5.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부정적인 감정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다. 느껴지는 불안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불안에 너무 매몰되어서 하루종일 스트레스받을 필요는 없는 거니까.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틈이 있다. 이 틈새에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라고 정신과 의사이자 강제수용소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은 기록했다. 하나의 자극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때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깨닫고 감정에 질문을 던지도록 도와준다.


불안, 두려움과 같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마주하고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는 것이 중요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이 하는 걱정이라는 게 일어나고 실제로 일어나고 보면 별게 아닌 경우가 많으니까. 또는 즐거운 일에 몰입함으로써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산책이나 명상을 통해 마음의 평온함을 찾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부정적인 감정의 본질에 무엇이 숨어있는지 알고, 당당히 대면할 수 있어야 나의 중심을 지킬 수 있다. 여전히 내게는 아직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두려움들이 있다. 이런 무거움들을 한꺼풀 한꺼풀 벗어던지고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게 전하고자 하는 말을 차분히 들어보는 것이 올해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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