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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Aug 21. 2017

Episode 03. Florence (2)

너무 바쁜 여유로움

두 번째 숙소는 끔찍하게 더웠다. 로마에서 묵었던 숙소도 선풍기가 달랑 하나 있었지만 2명이서 썼기 때문에 지낼 만 했는데 이번 숙소에는 비좁은 8인실에 선풍기가 달랑 하나였다. 다행히도 8명이 모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선풍기 한 대로 큰 방을 커버하려니 여간 더운 것이 아니었다. 땀범벅으로 맞이한 이탈리아 아침 더위에 딱 하나 고마운 것이 있다면 일찍 일어나게 해준 것이랄까. 피곤해서 알람도 안 맞추고 골아떨어졌었는데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오전 6시 30분 정도였다. 어제도 그렇고 여행을 오고 나서 나름 부지런해졌나보다. 이번 숙소도 하룻밤만 묵는 것이라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카운터에 맡긴 다음, 조식으로 제공된 빵 몇 조각을 입에 문 채 우피치 미술관을 향했다.

이탈리아의 태양은 정말 뜨겁다. 뭐 하러 여기까지 왔나 싶을 정도로 끔찍하게 뜨거운 햇빛이 내리쬔다. 그러나 해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하면 언제 그렇게 더웠냐는 듯이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해가 중천에 뜨기 전인 아침도 마찬가지로 꽤나 시원하다. 한여름의 아침이지만 산책하기 딱 좋은 정도의 기온이다. 숙소가 주택가에 위치하여 걸어가는 길에 나무도 많이 심어져 있어서 공기도 굉장히 상쾌했다. 아이폰 만보기로 어제 22km나 걸은 것을 확인하고 오늘은 대중교통을 조금 이용해볼까 싶었지만, 아침 공기를 크게 한 모금 들이쉬니 그냥 걷고 싶어졌다. 그렇게 또 40분을 걸어갔다.

더 빠른 길도 있었지만 어제 아르노강에서 받은 감동을 잊지 못하여 강변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길로 조금 돌아갔다. 숙소가 있던 주택가와 다르게 그늘을 만들어줄 나무가 하나도 없던 아르노 강변은 생각보다 더웠다. 햇빛 쨍쨍한 길을 조금 걷다 보니 어제 내 발목을 멈추게 했던 풍경들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푸른 하늘 아래의 풍경이었지만 해질녘 직전의 풍경과 동이 튼 직후의 풍경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또 다시 발목을 잡힌 나는 오늘도 투어 미팅 시간에 늦어버렸다.

원래 내 관람 스타일은 마음에 드는 것은 뚫어져라 쳐다보고, 별로다 싶으면 제대로 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입맛대로 골라보는 식이다. 이런 스타일은 가이드가 유명 작품 위주로 설명해주는 투어의 성격과 조금 안맞을 것 같았지만, 우피치의 엄청난 줄을 기다리는 것은 물론 미리 내가 예매를 하는 것도 귀찮아 투어를 신청하게 됐다. 오전에 진행된 투어답게 인원이 모이자 별도의 대기 시간 없이 바로 미술관에 들어가 관람이 시작되었다.

우피치 미술관은 원래 사무실로 쓰이던 건물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것이라 그런지 들어가자마자 딱딱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3층부터 시작하여 2층, 1층의 순서로 관람을 하였는데 메디치 가문 인물들의 흉상들로 가득찬 3층 입구부터 비좁고 여유가 없어보였다. 중세 미술부터 르네상스, 그리고 매너리즘 작품들까지 시대 순으로 쭉 관람을 했는데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비좁은 전시실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품 간의 간격은 넓은 시야에서 거리를 두고 작품을 관람하기에 부적합했다. 아직 미술관에 전시되지 못하고 지하 창고에 있는 작품들도 셀 수 없이 많다 하니 왜 이리 미술관이 꽉 차 있었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미술관이나 전시회를 그렇게 자주 방문하지는 않지만 내 취향은 확고하다. 한 작가의 작품들을 일대기 순으로 전시해놓은 단독 전시회를 좋아한다. 초기 작품부터 시작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작품들을 관람을 하다보면 어떤 시대적 배경이나 개인적인 경험이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 작가가 그것을 어떻게 작품에 어떻게 녹여냈는지를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피치에도 중간중간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다빈치 등 유명 작가의 작품만을 모아놓은 전시실이 있었지만 어떠한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그림 관련 스토리 설명을 들은 것도 나름 흥미로웠고 유명 그림 몇 개 본 건 신기하긴 했지만, 세 시간의 미술관 투어는 내게 너무 길게 느껴졌다.

우피치 미술관은 아르노강과 베키오 다리 바로 옆에 위치하여 창문을 통해 아침에 걸어온 길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사실 설명을 들으며 작품을 볼 때보다 중간 중간 이동할 때 미술관 창문과 테라스를 통해 바라본 바깥 풍경이 더 좋았다. 3층에 있던 창문을 통해서는 어제 야경으로 보았던 베키오 다리를 볼 수 있었고, 테라스에서는 바로 앞에 있는 베키오궁전의 종탑과 저 멀리 두오모성당이 보였다. 테라스에서 아이스 카푸치노를 한 잔 시키고 테이블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려니 자리값을 내라더라. 이탈리아는 따로 팁이 없는 대신 이렇게 자리값을 받거나 테이블 서비스 이용료를 영수증 가격에 포함시킨다. 장시간 투어로 다리가 아팠지만 좋은 뷰를 놓칠 수 없어 자유시간 내내 테라스에 서 있었다. 미술관을 나가면 이보다 좋은 전망대를 꼭 하나 올라가봐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그렇게 오래 보았는데도 가이드의 인솔에 따라 절반도 채 관람하지 못한 채 투어가 끝이 났다. 개인적으로 그림보다 조각 작품을 좋아하는데 가이드가 그림 위주로 설명을 하고, 또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매너리즘적 그림들도 다른 그림들에 비해 빠르게 넘어가서 아쉬운 부분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시간을 딱딱한 건물 안에서 보냈다가는 숨이 막혀버릴 것만 같아 더 관람하지 않고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점심으로 먹을 파니니 하나를 산 다음 또다시 목적지도 안 정한 채 뚜벅뚜벅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다.

점심을 먹으며 길을 걷다보니 또 한 번 피렌체의 명소를 쭉 둘러보게 되었다. 두오모 성당, 조토의 종탑, 아카데미아 미술관, 산 조반니 세례당, 레푸블리카 광장, 산 로렌초 성당 등이 이틀 돌아다녔다고 꽤나 익숙하게 느껴졌다. 피렌체를 떠나기 전 또 어디를 가볼까 고민하다가 먼저 미술관 테라스에서 생각한대로 괜찮은 전망대를 찾아나섰다. 조토의 종탑은 철장으로 인해 탁 트인 뷰를 감상할 수 없으니 넘어가고, 베키오 궁전의 종탑도 비싼 돈주고 걸어올라가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그러다 어제 야경 투어를 하다가 가이드가 알려준 한 건물 옥상의 카페가 떠올랐다. 레푸블리카 광장에 있던 건물이었는데, 5층까지 에스컬레이터도 있고 카페 옥상에 올라가면 두오모와 조토의 종탑이 코 앞에서 보였다. 나처럼 돈과 시간과 체력이 아까운 사람에게는 제격인 장소였다.

카페 옥상을 마지막으로 피렌체의 전망 감상은 끝내는 것으로 하고, 밖에만 돌아다니다 못들어가 본 곳들 중 두 곳을 가기로 정했다. 선정 기준은 단테의 신곡으로, 단테 박물관과 그를 소재로 한 인페르노에 나왔던 베키오 궁전에 갔다. 단테라는 작가는 댄브라운의 인페르노가 출판된 2013년에 처음 알게 되었다. 댄 브라운의 소설은 밀레니엄 시리즈와 함께 가장 가장 좋아하는 소설인지라 제대로 읽어보려고 책의 주된 소재였던 단테의 신곡 세 권을 함께 구매했었는데, 결국 둘 다 제대로 못읽고 손에서 놔버렸던 기억이 있다. 신곡은 당시 중3이었던 내게는 버거운 책이었고, 신곡을 읽다가 인페르노까지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탈리아 여행을 다짐하고 인페르노를 다시 읽어야지, 읽어야지 미루다가 결국 비행기에서 영화로 보았다. 영화화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로버트 랭던이 미스테리를 풀어가는 섬세한 과정을 소설의 묘사가 아니라 두 시간의 영화 속에 녹이려니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진 부분도 있었고, 특히나 이번엔 단테의 신곡이란 하나의 작품이 메인 컨셉이라 더욱 더 그랬던 것 같다. 허나 이탈리아 여행을 앞둔 상태에서 본 것이라 영화가 그리는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끝내주는 풍경에 "나도 내일이면 저 속에 있겠지?"하며 재미있게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 나는 랭던이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방문했던 베키오 궁전의 문 앞에 똑같이 서 있었다. 베키오 궁전의 첫인상은 3일 동안 내가 들어가 본 이탈리아 건물 중 최고였다. 이틀 전에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이라 더욱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천장이고 벽이고 조각품이고 제일 마음에 들었다. 베키오 궁전은 영화에 비춰졌던 공간 이외에도 다양한 전시관이 있었다. 헤라의 테라스, 제우스의 방, 헤레클레스의 방 등 전시관 별로 여러가지 컨셉이 있었는데, 그에 맞는 천장화 아래 여러 조각과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어 방마다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종교 작품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차라리 우피치 미술관보다 신화적 작품들이 많이 있던 베키오 궁전의 전시관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 관람하기 편했다.

영화 인페르노를 보면 주인공 랭던은 기호학자답게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궁전의 비밀 통로를 통해 잘도 빠져나간다. 베키오 궁전에서는 지도의 방에 있는 아르메니아 지도를 문처럼 열고 빠져나가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지도의 방에 가보니 아르메니아 지도가 있었고 정말 이게 열릴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 문이 덜컥 열리고 안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옆에 있던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돈 내고 투어 신청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더라. 문 열리는 걸 본 것만으로 만족하고, 전시관을 몇 개 더 둘러보다가 그냥 나왔다. 베키오 궁전은 겉모습과 내부 모두 웅장하고, 다양한 전시실도 있고 비밀 통로나 전망대도 있는 종합선물세트 느낌이었다. 사람이 왜 이렇게 없는지 이해가 안갔다. 베키오 궁전을 끝으로 피렌체 관광은 마무리짓고, 짐이 있는 숙소로 향했다.

밀라노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숙소 가는 길에 있던 광장에 잠시 들러 시간을 보냈다. 벤치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던 그 짧은 시간이 참 좋았다. 관광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나처럼 잠시 쉬어가던 배낭여행객 한 명을 제외하고는 동네 주민들로 가득했다. 유모차를 끌고 아이와 산책하던 아빠, 벤치에 누워 낮잠을 청하던 아저씨, 무더위를 식히려 웃통을 벗고 맥주를 마시던 노인들까지 정말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공원이었다. 하도 사람들로 바글거리던 시내에만 있다보니 오히려 이런 여유로운 풍경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바쁨에서 잠시 벗어나려 떠나온 여행인데 욕심에 못이겨 너무 정신없이 보낸 것은 아닌지 잠시 생각해보며 피렌체를 떠났다.

201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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