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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Aug 23. 2017

Episode 06. Venice (1)

저녁 노을을 등지고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역에서 내려 새로운 풍경을 맞이하는 순간이 가장 즐겁다. 그 중 첫 인상에 가장 많이 감탄한 도시는 아마 베니스가 아닐까 싶다. 여느 역 앞에 있는 넓은 광장 대신 잔잔한 바다가 찰랑거리고 있었고, 그 위에는 각양각색의 보트와 곤돌라가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바다 위에 도시가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감도 안왔었는데, 상상 그 이상의 도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시원한 바다 바람과 함께 베니스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이탈리아에서의 잊지 못할 순간 중 하나다.

베니스 본섬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대운하를 따라 보트 구경을 하다가. 숙소를 찾아 골목길로 접어 들어갔다. 베니스는 웅장한 대운하보다 좁은 골목이 더 인상적이었다. 차도가 있는 대신 길게 뻗은 수로가 자리잡고 있었고, 중간중간 양 쪽을 연결하는 크고 작은 다리들이 놓여있었다. 수로와 보도의 사이에는 사진처럼 난간이 있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렇게 가까워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난간도 없이 바다와 맡닿아있었다. 기차까지 놓치고 급하게 베로나를 떠나오느라 분주했던 머리 속은 생경했던 베니스의 거리를 다니며 한층 평화로워졌다.

혼성 4인실이이었던 숙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배낭 몇 개만이 나를 맞이해줬다. 방에서 조금 쉬다가 야경을 보러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여행객 두 명이 들어왔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다음, 친목을 다져볼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결국 가던 길을 가기 위해 방을 나왔다. 이번 여행에서 친구 만들 복은 없나보다. 내게 만들 의지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괜히 대화를 시작하거나 동행을 해서 어색하고 무의미한 대화를 나눌 바에, 누구도 신경쓸 필요 없이 마냥 걷는게 마음에 들었나보다. 언젠가 만날 좋은 인연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만큼은 나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에게도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혼자 어둠이 찾아온 베니스의 거리로 향했다.

악명 높은 이탈리아의 치안에 두려워하던 것도 잠깜이었다. 며칠 지내다보니 밤늦게까지 돌아다녀도 별로 위험하단 생각은 들지 않아 겁없이 다니곤 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워낙 저녁을 늦게 먹어서 그런지 늦은 밤까지 도시는 잠이 들지 않았고, 가로등 불빛도 밝아 마음 놓고 다녔었다. 그러나 베니스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큼직큼직한 수로변과 대비되는 작은 섬 위의 골목길들은 사람 한 명이 겨우 다닐 정도로 비좁은 곳이 많은데다가 제대로 된 가로등 또한 많치 않았다. 지금까지는 지도만 있으면 꽤나 길도 잘 찾아다니는 편이었는데 미로같은 베니스의 골목길은 길을 찾기도 참 어려웠다. 다시 이 길을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소름끼칠 정도로 캄캄한 길도 많았다. 어둠을 헤쳐 나와 대운하와 가까워지니 차츰 밝아지기 시작했다.

야경을 보러 찾아간 곳은 리알토 다리이다. '베니스 야경'이란 키워드로 검색해 제일 먼저 나온 곳을 찾아간 것인데 베니스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한 쪽에는 신선한 해산물을 진열해놓은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었고 건너편에는 바포레토라 부르는 수상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곳곳의 가로등과 조명으로 인해 도시는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고, 이따금 보트도 몇 척 지나가며 시원한 바람도 만들어주었다. 더 짙은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그리 여유롭게 즐기지는 못했지만 만족스러운 첫 날 밤이었다.

이튿날은 이탈리아에 오고 처음으로 하루종일 구름 낀 날씨였다. 아무리 사진을 찍어도 흐릿한 하늘 때문에 도저히 색감이 안살던 끔직한 날씨였지만, 용케도 하루종일 무라노, 부라노, 리도섬을 떠돌아다녔다. 다시 본섬을 찾은 것은 전날과 같은 오후 6시경이었다. 리도섬에서 저녁 노을을 끝까지 보고 오려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해 바포레토에 올랐는데, 본섬에는 비가 오지 않고 있었다. 그 사이에 비가 그친 것인지 다른 섬이라 원래 안오던 것인지는 모르겠었지만 리도섬을 금방 나온 것은 좀 아쉽긴 했다. 본섬이 그 아쉬움을 채워주리라 기대하고 또 정처없이 걸어다녔다.

보일듯 말듯 구름낀 하늘의 노을이 참 답답해 높은 곳을 찾아보았다. 높은 종탑이 보이던 산마르코 광장으로 가서 전망대에 올랐지만, 높은 곳에서 본다고 해서 답답한 하늘이 맑아지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날씨 탓은 그만하기로 하고 하늘에서 시선을 좀 내리니 끝내주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피렌체랑 베로나와 건물들은 다 비슷했지만 베니스만의 매력이 있다면 당연히 바다와의 조화였다. 베로나에서 도시 사이로 넓게 흐르던 강줄기와 함께 볼 때가 다르고, 베니스에서 도시를 감싸고 있는 바다와 함께 볼 때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제 좀 색감이 질릴 때가 되면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이탈리아. 오길 참 잘했다.

종탑에서 내려와 갈 곳 없이 이리저리 걷다가 경치 좋은 곳에 걸터 앉아 해가 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보이지 않는 해가 만든 붉은 빛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했다. 그렇게 노을이 지고 두 번째로 맞이한 베니스의 밤에 별로 특별한 것은 없었다. 무리해서 섬을 3개나 돌아다니느라 아침에 느꼈던 바포레토의 낭만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고, 베니스의 바다도 어느덧 익숙하게 느껴졌다. 무미건조하게 바다 건너를 바라보다 간단하게 피자로 저녁을 해결하고 숙소에 들어갔다. 피렌체 첫 날 이후로 오랜만에 힘든 일정이었다.

여행와서 거의 처음으로 늦은 시간에 일어났다. 원래 아침 일찍 일어나 못봤던 본섬 명소들을 찾아가보고 베니스를 떠날 예정이었지만, 기차 시간까지 세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아서 많이 둘러보기 애매한 시간이었다. 전날에 그냥 외관만 보고 지나쳤던 성당이나 박물관에 들어가볼까 생각하다가, 어제보다 맑아진 하늘을 보며 거리 구경이나 더 하기로 마음 먹었다. 또 아무 생각 없이 걸어다녔다. (여행 에세이를 쓰며 '걸었다'라는 단어를 얼마나 많이 쓰는지 모르겠다.)

골목골목을 누비다 한 공터에 이르렀는데 비둘기 사이에 갈매기 두 마리가 어색하게 서 있었다. 한 놈은 흰 색, 다른 한 놈은 갈색(갈매기가 맞는지 모르겠다)이었는데, 멋지게 서 있다가 관광객이 주는 과자 부스러기를 두고 아옹다옹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날카로운 눈매와 부리를 갖고 있던 흰 갈매기는 기품있게 서 있다가 자기 근처에 떨어지는 과자 조각만 잽싸게 채갔다. 반면 산만하게 공터를 누비던 갈색 놈은 저 멀리 떨어진 부스러기 하나도 뺏기기 싫었는지 날갯짓하며 비둘기를 다 쫒아버리곤 했다. 같은 새라도 어찌 저리 다를까. 이탈리아에 와서 다 똑같은 자세로 구구거리던 비둘기만 잔뜩 보다가 다른 새들도 만나서 반가웠나보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켜보다보니 어느새 기차 시간이 다 됐었더라.

베니스에서도 좋은 힐링의 시간을 보냈다.

2017.08.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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