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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Oct 12. 2019

대중을 향한 정의롭지 못한 조롱, <조커>

토드 필립스 '조커(Joker, 2019)'

*모든 문장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고, 영화에 관한 부정적인/주관적인 견해들로 가득한 글입니다.


수작과 문제작의 위험한 경계

영화 <조커>는 수작이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이 전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웰메이드'이기는 하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를 필두로 1981년 고담시의 분위기를 담은 화면, 헛투루 쓰인 것이 없는 소품과 의상, 묵직한 선율의 OST까지 영화적 요소들에서 흠잡을 것이 없다. 동시에 <조커>는 문제작이다. 우리는 2012년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상영관에서 발생한 제임스 홈스의 총기난사 사건을 기억한다. 역대 코믹스 사상 최악의 악당으로 유명한 조커이기에, 조커의 캐릭터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자극해 과몰입하게 만드는 연출은 위험하다. 단순히 모방범죄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만을 우려하는 것이 아니다. 광기와 혼돈 그 자체였던 조커에 ‘탄생 서사’를 부여하는 것, 그 과정에서 사이코패스적 본능에 의한 행동과 사회적인 핍박에 의한 분노의 경계를 흐리는 연출은 충분히 문제적이다.

감독 토드 필립스와 호아킨 피닉스는 영화의 모든 장면에 대해 세세하게  논의하며 촬영했다고 한다. 의미부여가 되지 않은, 쓸모없는 장면이 없다는 뜻이다. <조커>를 처음 관람했었을 때 의도한 바가 긴가민가 했던 장면들이 꽤나 있었는데, 두 번째 관람을 하며 살펴보니 확신이 가는 듯 하면서도 더욱 혼란스러웠다. 감히 판단컨데, 영화 <조커>는 언급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조커’라는 캐릭터는 결코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결코 대변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하나에서 사람 300명씩 죽이는 ‘존 윅’과 자신의 ‘조커’가 뭐가 다르냐고 툴툴거리는 감독의 태도와, 징역 16년형을 받은 아동 성범죄자의 노래를 클라이맥스 씬에 삽입한 것을 보면 제작 의도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힘들다.  

사이코패스적 살인에 ‘그럴 수 있지’는 없다.

조커의 모든 살인과 폭력은 자기중심적인 욕망과 광기의 표출이다. 아니, 사이코패스적 살인이어야만 한다. 아서와 같은 정신 질환을 갖고 있거나 아서의 개인적/사회적 비극들을 겪으면 그럴 수 있다는 감정이입은 도덕적이지 않다. 그러나 영화 <조커>는 아서 플렉이 조커로 변모하는 과정에 공감할 수 있게끔 폭력에 대한 두루뭉술한 명분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그럴싸한 장면들을 살인의 전조 인양 배치하며 동정심을 유발한다. 조커가 닥친 비극의 순간들은 살인을 촉발하는 '순간의 트리거'였을 뿐,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가 절대 되지 못함에도 말이다.

지하철 살인의 발단에는 캣콜링 당하는 여성에 대한 시선이 배치되었지만, 그를 움직인 것은 자기 자신에게 가해진 멸시와 폭력이 가해지고 나서였다. (애초에 여성을 스토킹하고 섹스를 망상하는 아서가 캣콜링에 반응했을 리가 없다.) 아서는 자신의 정신병이 어머니의 학대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 후 그녀를 살해하지만, 총을 처음 잡은 이전 장면에서 이미 총구는 페니가 앉는 소파로 향했었다. 가장 끔찍했던 랜달의 살인도 두루뭉술하다. 애초에 아서에게 총기를 건넨 것은 랜달이지만, 그 사실을 랜달이 사장에게 말한 것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영화는 아서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를 관객에게 보여줄 뿐이다. 아동병원에 총기를 가지고 간 본인의 책임 소지는 지워버린 채 참혹한 시체만을 남겼다.


인셀히어로 ‘조커’와 여성혐오적 망상

아서 플렉은 이웃 여자를 스토킹하며 섹스하는 망상을 하는 ‘인셀’의 전형이기도 하다.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에게 보여준 잠깐의 호의를 성적인 호감으로 착각하는 남성이다. 호감을 느끼는 상대에게 택한 표현 방식 또한 직접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스토킹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스토킹에 호감을 느껴 집 문을 두드릴 것이라고 기대하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여성관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소피와의 망상이 깨지는 순간인, 그의 집에 무단 침입하는 장면에서 소피를 죽인 것인지 아닌지는 나오지 않는다.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의도된 생략이다.  

무엇보다 가관인 것은 소피와의 섹스를 망상하는 장면의 사용이다. 해당 장면은 아서가 지하철에서 첫 살인을 하고 화장실에서 춤을 추며 ‘조커’로서 각성을 한 직후에 배치된다. 여성과의 섹스를 ‘조커’로 각성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두었든, 각성한 이후의 성취 보상으로 두었든 장면의 배치 의도는 구리다. 망상 속 ’소피’는 아서 플렉이 가지고 있는 자아의 발현이다. 카타르시스적인 순간에 성적인 욕망을 끼워 넣는, 아서플렉의 여성혐오적이고 나르시즘적인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조크 노트에 테이핑 된 여성의 나체 사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위선적인, 대중선동가 ‘조커’의 탄생

영화 전반부 내내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아세워진 ‘아서 플렉’은 우발적 살인을 계기로 ‘조커’로서 각성한다. 그의 첫 살인의 대상이 토마스 웨인의 금융사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던 것도, 대중이 이를 오독하여 조커를 추앙하기 시작한 것도 우연이었다. 사회적인 문제에 분노하던 고담 시민들의 과도한 의미부여로 인해 ‘조커’라는 상징은 자경단 혹은 영웅으로 여겨지고, 한 순간에 대단한 혁명가라도 된 마냥 대중 앞에 궤변을 늘어놓는다. 조커페이스의 의미 대해 묻는 머레이의 질문에, 자신은 정치적인 관심은 없고 연기를 할 뿐이라고 말한다.

조커는 스스로의 말대로 정치적이지 않는가? 글쎄, 여러 요소들을 보면 조커는 충분히 정치적인 캐릭터로 그려졌다 생각한다. 조크를 개발해야 하는 그는 분장실과 거실에서 뉴스를 보고, 기차에서 신문을 읽으며, 머레이의 사회풍자적 조크에 웃음 짓기도 한다. 언론과 대중이 자신을 주목하는 것에 조커가 반응하는 이유는 그동안 끊임없이 사회에서 등한시되었던 그가 ‘관심’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본인을 ‘히어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커의 첫 살인 대상이 부유층이었던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는 망상 속 소피를 통해 스스로를 ‘히어로’라고 지칭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였던 머레이 프랭클린 쇼 출현에서 조커의 위선적인 정체성이 가장 잘 드러난다. 원래 조커는 머레이 쇼에서 자살함으로써 자신의 마지막을 장식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돌연 자신이 지하철 살인범임을 밝히며 세상에 나쁜 사람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며 시청자를 자극하는 멘트를 늘어놓는다. 아서는 지하철 살인 이후 ‘조커’가 가진  갖게 된 파급력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길거리에는 자신을 따라 가면을 쓴 사람이 넘쳐나고, 방송국으로 오는 길 따돌린 형사 두 명의 이야기가 바로 뉴스로 전파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가 자살하지 않고 돌연 프랭클린을 살해한 행위의 배경에는 순간적인 분노나 관심에 대한 갈망도 있겠지만, 대중에 의해 영웅화되면서 생긴 왜곡된 정의관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타락한 세계관의 정의롭지 못한 구현

영화 <조커>의 방식은 비겁하고 정의롭지 못하다. 영화의 제작 의도가 양극화 문제와 소외계층에 대한 문제제기였다면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고, 그저 이 모든 것을 ‘fucking comedy’로 생각하여 ‘조커’라는 캐릭터 탄생을 위해 사용한 것이라면 그것 또한 최악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고담시의 혼돈을 나타내기 위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이 언급된다. 이는 중반부에서 ‘청소노동자가 파업해서 쓰레기가 넘쳐난다는데, 그렇다면 쓰레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는 조크로 조롱당한다. 영화가 문제 제기하려는 사회적 혼돈의 원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빈부격차와 부패한 권력에 문제제기를 하는 듯하면서도, 파업하는 노동자나 매스컴에 선동당하는 대중들을 조롱하는 듯한 서술도 분명 존재한다.  

<조커>는 아서 플렉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자극하며 악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영화가 지켜야 할 암묵적인 룰을 부수었다. 정신질환과 망상 장면을 통해 ‘인셀 히어로’를 탄생시켰으며, 사이코패스와 아웃사이더로서의 행동 경계를 흐리며 폭력에 대한 두루뭉술한 변명을 만든다. ‘조커’는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히어로의 발끝도 못 따라오는 빌런일 뿐이다. 사회적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척 하지만 대부분의 폭력은 자기중심적 광기의 표출이었다. 영화에서 대중은 조커를 치켜세우는 장식품이었으며 모든 것은 코미디일 뿐이었다. 아서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거나 명확한 사회 비판 지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서 플렉이 당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설득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인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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