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강남역 12번 출구, 오래 올려다봐야 하는 빌딩 사이에 껴 있는 조그마한 건물로 들어선다. 건물만큼이나 좁은 로비를 오른편에 두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한편에 적힌 오늘 가야 할 모임의 세미나룸 번호를 확인한다.
‘503호’
시작하기 10분 전에 도착해 행거 앞 의자에 착석한다. 모임 총원은 15명이고 나까지 5명이 미리 와서 앉아 있다. 핸드폰을 보거나 앞에 놓인 종이나 명찰을 확인하는 둥 어떻게든 서로의 눈을 피하는 분위기다. 첫 모임답다.
모임장이 도착해 블루투스 스피커와 모니터 리모컨이 놓인 앞에 앉고 하나둘 나머지 자리도 채워진다. 내 옆에 누가 앉지 않기를 바라며 가방을 올려뒀지만, 정말 아무도 앉지 않으면 왠지 오늘 나의 인상 착의를 다시 확인하고 와야 할 것만 같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빈자리가 가득 차기 전에 내 옆에 누군가 앉으려는 의사를 비춘다. 얼른 가방을 가지런히 모아 허벅지 위에 올린 후, 다시 집어든 펜을 쉬지 않고 굴리며 낯선 공기의 어색함을 모면해 본다.
세 시 정각이 되어 모임이 시작된다. 파트너라고 불리는 모임장이 모임의 정해진 규칙을 가볍게 설명하고 난 후, 그의 오른쪽으로 돌며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한다. 한 명 한 명 눈을 맞춰 가며 인사하는 유형이 있는가 하면, 오직 파트너만 쳐다보며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도 있다. 아예 시선을 테이블에 고정한 채 말하는 이도 있으니 수줍음으로 따지자면 그건 양반이다.
나이나 직업을 첫머리에 밝히는 이도 있다. 모임의 규칙상 먼저 묻는 것은 실례가 될 수 있으나 밝히는 건 자유다. 모임을 꾸준히 하다 보니 여러 번의 모임 첫날도 겪었다. 제법 자연스럽게 모임에 나온 이유로 나의 소개를 대신한다.
“혼자 일하는 직업이다 보니 사람을 만날 일이 많이 없어서요, 사람들이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 궁금해서 나왔어요.”
모임이 시작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 탐구에 돌입한다. 책은 혼자 읽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내가 관찰하고 싶은 것은 같은 책을 읽고 만나게 될 다양한 인간 군상이다. 궁금증을 안고 이 커뮤니티 독서 모임에 참여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그러다 보니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매 모임을 할 때마다 멤버들을 보면 둥근 테이블을 두고 다양한 역할 모델로 나뉘는데, 그 카테고리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고 역할이 나눠 먹는 파이 크기도 비슷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모임에 가도 진지한 사람, 소심한 사람, 투덜대는 사람, 외곬수 등 사람만 바뀔 뿐이지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 한 유형에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균형감 있게 분포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부분 첫 모임 때 자기소개에서 주는 인상에서 크게 비껴가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네 번의 모임을 이어가는 동안 그 역할 모델을 서서히 이해하게 되거나 바라보는 내 시야가 달라지는 경험도 하는데, 그게 꽤 흥미롭다.
예를 들어 ‘왕투덜이’로 몰래 별명을 붙인, 매사에 불만이 많은 이가 있었다. 첫날은 그 사람 때문에 모임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불편했다. 그러나 모임이 거듭될수록 그 사람이 어쩌다 삶에 그리도 불만을 가지게 되었는지 듣게 되면서, 내 안에서 왕투덜이였던 그 사람이 입체적인 투덜이로 진화하는 것을 목도한 적이 있다. 이 경험은 훗날 내가 낯선 이들과 독서 모임을 이어가는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둥근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나를 새의 눈으로 지켜보자면 나의 역할은 말 많은 괄괄이 유형일 것이다. 많은 인원이 돌아가며 말을 하기에 1인당 물리적인 발언 시간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그 테이블에는 마이크를 받아 강제로 말을 시켜야만 말을 하는, ‘대체 왜 비싼 돈을 내고 모임에 와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을까’ 역할을 담당하는 유형도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말 많은 나 같은 유형의 인간이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좀 더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날은 좁은 빌딩으로 들어서면서 ‘오늘은 말수를 줄이고 많이 듣겠노라’ 다짐하고, 또 어떤 날은 ‘차분한 톤으로 말을 천천히 이어가던’ 역할을 맡은 이를 흉내 내기로 다짐도 한다. 하지만 일단 모임에 들어가서 읽고 본 것에 대해 나누다 보면, 엘리베이터에서 했던 수많은 다짐이 공중에 흩어지고 만다.
자려고 누워도 마음에 구멍 뚫린 듯 허전한 날이 계속되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내가 오늘도 말을 많이 해서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돌아보면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음을 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와 점점 친해졌다. 어딜 가나 크고 작은 괄괄이 역할을 맡는 내가 그 자체로 괜찮아졌다. 다른 역할을 하는 내가 되고 싶다는 욕망 또한 자연스레 사라졌다.
인간 군상이라는 테이블에 오늘도 앉는다. 다양한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킨다. 어떠한 기준에 의해 하대받아야 할 사람도 없고, 비난받아야 마땅한 사람도 없다. 모두가 자신의 역할이기에 빛난다. 소심이도 반짝반짝. 투덜이도 반짝반짝. 괄괄이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