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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비오는 날의 뜀박질

by 버들


집에 다녀왔다. 친정이라는 말을 쓰는 게 결혼 5년 차인 지금도 어색하다. 집이나 본가라는 말이 정감있고 괜히 좋다. 집에 내려가면 꼭 챙겨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수영복이다. 본가에 엄마가 다니는 수영 센터가 있는데 50미터 트랙이 있는 경기용 수영장이다. 시에서 관리하는 곳이라 그런지 갈 때마다 늘 깨끗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본가에서 맞이한 토요일 아침에는 엄마와 함께 감자를 삶아 제철 과일과 함께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고 수영장에 간다. 남편도 수영을 좋아해서 함께 본가에 가는 날이면 셋이서 씩씩하게 물에 놀러간다. 어릴 때는 수영을 하고 중간 시간에 먹는 컵라면의 맛이 좋아서 수영장에 가는 게 기다려졌는데 이제는 다 커서 남편과 수영장도 가고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늘 수영복만 챙겨가던 내가 이번에는 러닝 복장도 챙겼다. 짧은 반바지와 민소매 티셔츠, 그리고 쫙 달라붙어 가슴을 고정해주는 스포츠 브라. 아, 양말과 운동화, 러닝 모자도 챙겼다. 러닝화는 헬스장 용이라 바닥이 더러워지면 곤란해서 (또 닦기 귀찮아서) 러닝화로 나온 일상화를 챙겼다. 수영장은 엄마랑 늘 같이 가는 곳이라 약속이 되어있으니까 일어나서 가기 싫어도 가게 되는데 러닝은 과연.


토요일 아침에는 엄마와 약속대로 수영장에 가서 700미터를 돌고 왔다. 일요일에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날 밤 조카들이 옆에서 조잘거리는 걸 애써 모른 척하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녘에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는데 닫힌 창문 너머 베란다로부터 흙냄새가 스민다. 비가 오면 나는 냄새인데 에어컨 바람에 묻힐 뻔 했다. 살짝 창문을 열어보니 아뿔싸, 비가 오고 있다. 화면을 가장 어둡게 만든 핸드폰을 켜서 날씨를 확인한다. 이 지역에는 오후 세시까지 비가 올 예정이란다. 우중 러닝은 힘들지, 더이상 잠이 깨지 않길 바라며 눈도 비스듬히 뜨고 화장실에 다녀와서 다시 잠을 청했다.


비가 오면 잠이 잘 온다. 여섯 시 반에 맞춰둔 알람소리를 못 들은 건지 같은 방에서 잤던 새언니가 나보다 잽싸게 알람을 끈건지 일곱시반에 일어났다. 얇은 커튼 사이로 해가 예쁘게 스미는 게 이 방의 매력인데 밖이 어두컴컴하다. 더 누워있을까 거실에 나갈까 고민하다가 더이상 잠이 오지 않아 밖에 나가보았다. 어라, 비가 오긴 하는데 밖이 제법 환하다. 안방 창문이 어두컴컴했던 이유는 베란다에 널어둔 빨래 때문이었다. 베란다에 나가 창밖으로 손을 뻗어보니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비가 제법 내린다. 러닝하고 감으려고 어제 밤에 머리도 안 감고 잤는데… 귀찮지만 조카들이 일어나기 전에 샤워부터 잽싸게 마쳤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흐린 날이지만 선크림도 꼼꼼히 바르고 나오니 에너지 넘치는 초딩 조카들은 벌써 일어나서 거실 구석에 놓인 실내 자전거를 타고 있다. 실내 자전거를 쉬지 않고 타는 조카들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고양이나 다람쥐 쳇바퀴가 생각난다. 넘쳐나는 에너지를 빼려고 애쓰는 것 같단 말이지. 그건 그렇고 밖을 슬쩍 보니 비가 그친 것 같다? 설마 하며 손을 내밀어 보니 정말 비가 안 온다. 덜 마른 머리는 촉촉하고 선크림을 바른 얼굴은 번들거리고. 무슨 정신인지 모르겠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주섬주섬 러닝복장을 챙겨 입고 있다. 머리가 덜 말라서 모자는 쓰지 않고 대충 허벅지와 허리 스트레칭을 해주고 밖을 나갔다.


나가서 발목을 돌려주고 나이키 앱을 실행한 후 뛰기 시작하니 생각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온다. 내가 왜 나왔지? 뭐가 날 나오게 만들었지? 뛰고 나면 또 씻어야 하는데, 얼마나 뛰어야 그게 아깝지 않을까. 강변으로 내려갈까? 어느 방향이 좋을까. 아니 근데 대체 왜 씻고 이러고 있는거지. 그런데..


지금 이런 생각들이 다 무슨 소용이지?

나는 이미 달리고 있는데.


큰 거리를 지나 강변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다시 바닥이 촉촉하게 비가 내린다. 덕분에 날이 아까보다 더 시원해졌다. 어항에 들이차는 물 같았던 생각이 온데간데 사라지고 피부에 사뿐히 앉는 빗물을 느끼며 한발한발 쉬지않고 번갈아 뛰었다. 최근에는 트레드밀 위에서 뛰는 게 익숙한 터라 야외 러닝이 어색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고보니 한파주의보가 떨어진 날에도 한강변을 달릴 때가 있었는데? 맞아, 그때는 집에서 준비 운동을 하고 뛰면 5분 거리인 자양나들목으로 나갔지. 성수대교 방향으로 뛰는 밤의 한강을 잊고 있었네. 너무 추워서 멈추지도 못하고 너무 추워서 핸드폰이 뻗기도 하고. 30분 가량 달리면 느끼는 러너스 하이가 좋아서 매일을 달릴 때도 있었네.




그보다 더 전에 열심히 뛰던 시절에도 우중 러닝은 해본 기억이 없는데 하필 오늘 하필 어릴 적 살던 동네의 강변을 뛰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어릴 적 매일 걷던 강변길을 30년 후인 지금은 달리고 있다. 그 시절에는 높은 아파트가 없어서 앞을 가로막는 게 없었다. 지금도 몇 개 생기긴 했지만 ‘시’라고 부르기엔 여전히 수줍은 동네다. 초등학생 시절 이 강변을 따라 혼자 걷다가 구름이 내 앞으로 쏟아질 것 처럼 빠르게 흐르는 것을 보며 왠지 모를 공포심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연을 향한 경외심을 처음으로 느낀 날이었던 것 같다. 자꾸만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30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내가 된 게 아니라, 그때 그 아이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강변을 걷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뛰었다. 걷고 있는 아이를 만나면 뛰던 걸음을 멈추고 나란히 함께 걷고 싶은 아침이었다.


어릴 때는 그렇게 길게 느껴지던 강변길이었는데 10분을 채 안 달려서 계획했던 반환점에 당도했다. 우산을 쓰고 산책하는 몇몇 어르신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그렇잖아도 촉촉했던 머리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채도가 낮은 하늘색 민소매 티는 짙은 색으로 번지고 있었다. 속력을 내고 싶어서 내키는 대로 달렸더니 꾹 닫고 뛰던 입이 절로 열리고 콧구멍을 부풀려가며 호흡하게 된다. 20분 정도 달려 3키로를 채우고 들어왔다. 늘 3키로만 달리고 들어오자고 나를 꼬셔가며 러닝을 해왔다. 정말 3키로만 뛰고 들어온건 처음이지만.. 뭐 뿌듯하다. 다시 씻고 나오니 만사가 다 귀찮아진 나는 누워서 게으른 스트레칭을 했다. 다리를 들어올려 햄스트링을 풀어주며 강변에 혼자 남아있을 아이를 생각했다. 비도 오니 걸음을 빨리 옮겨 집에 갔으면 싶은데. 마주치게 되면 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다독여주고 싶었는데... 아,


마주쳤던 것 같다. 말도 해준 것 같다.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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