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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물 Mar 05. 2016

쿠바에 두고 온 당신이 그리운 이유  

'미 아미가mi amiga'를 부탁해, 아바나의 그레이스 아줌마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쿠바가 여전히 그리운 이유는 두고 온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바나의 그레이스 아줌마와 뜨리니다드의 차메로, 아니따와 그의 아들들, 할머니, 동네 친구들. 나의 퍼커션 선생님 데이비드. 나에게 시를 지어 선물한 시인 엑토르 미란다. 그리고 이름은 모르지만 내게 순수한 미소로 행복을 전해준 많은 사람들.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아바나에서 외로웠던 나는 우연히 만난 한국 여행자에게 아바나로 다시 돌아오는 날 같은 까사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날짜를 정했고, 혹시라도 방이 없을 수 있으니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내 친구(mi amiga)가 올 거니까 침대 하나만 비워 달라고 까사 주인에게 말해주기로.


그런데 일이 좀 꼬여버렸다. 나는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아바나로 돌아가지 않고 뜨리니다드로 향했으며, 전에 뜨리니다드에서 우연히 만난 중학교 동창에게 너도 아바나의 어느 까사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하루쯤 늦어질 수도 있겠다는 말과 함께. 결국 나는 뜨리니다드에서 하루를 더 머물고서 약속한 시간보다 하루 늦게 아바나의 약속된 까사로 찾아갔다.


처음에 까사 주인은 나를 보더니 방이 없다고 했다. 지금은 만실이라서 다른 곳을 알아봐야 겠다고. 나는 아바나에서 갈 곳이 없었다. 모기 많은 호아키나의 까사는 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하룻밤만 자면 집에 갈 거라 다른 까사를 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까사 주인을 보고 애걸복걸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내 친구를 만나기로 했어. 혹시 내가 숙박자 명단을 볼 수 있을까. 한국인 여자인데 내 친구야. 우린 여기서 만나기로 해서 나는 다른 데를 갈 수가 없어.


처음엔 안 되는가 싶더니 이내 숙박자 명단을 보여준다. 아, 있다. 내가 만나기로 한 한국인 여행자. 이사람 내 친구야. 내 친구. 어디 갔어. 언제쯤 올까. 여기서 만나기로 해서 일단은 다른 데 갈 곳이 없어. 마음은 점점 더 급해졌는데 오히려 까사 주인은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니가 바로 그 미 아미가구나.


약속했던 한국인 여행자는 아바나에 예정대로 도착해서 까사에 도착하자마자 주인인 그레이스 아줌마에게 내 친구가 올 거다. 침대 하나만 비워달라. 부탁을 했고, 내가 도착하기로 한 그 날 뜨리니다드에 있는 나 대신 중학교 동창이 그 까사에 도착을 했다. 한국인 여자 여행자. 그렇지만 이 친구도 '미 아미가'의 침대 말고는 다른 자리가 없기 때문에 까사에서 쫓겨날 뻔했다고 했다. 검증된 '미 아미가'가 아니었기 때문.


어찌어찌 사연을 잘 말하여 나 없이 나와 만나기로 했던 두 여자는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미 아미가인 나를 기다리며. 아마도 하루쯤 늦게 오는가보다 생각하며 둘이 아바나 시내를 여행하고 맥주를 마시고 했단다. 내가 그때 말한 그 진짜 '미 아미가'인 걸 알게 된 그레이스 아줌마는 굉장히 반가워 하면서 짐을 풀고 기다리라고 했다. 목 말랐겠다며 음료수도 주고, 망고도 썰어 주고.


침대는 있었다. 그들이 머무는 방에 세 개의 침대가 있었고 나를 위해 비워둔 그 침대 말고는 정말로 다른 방은 사람이 가득 차 있었는데 약속된 날짜에 도착하지도 않은 생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나를 어떻게 믿고 다른 손님을 받지 않을 생각을 한 건지. 그레이스 아줌마의 의리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그레이스 아줌마와 친구들은 잠깐 외출 중인 친구들을 기다리는 내가 심심할까봐 쿠바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기도 하고, 내 시퍼런 원피스의 디자인에 관심도 가져주고, 다음 날 공항까지 갈 택시까지 예약해줬다.


그날, 오후 내내 나는 쿠바산 티스푼을 사려고 돌아다녀도 찾지 못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쿠바에서는 스푼을 만들지 않는다는 상인의 말을 듣고 긴가민가하여 그레이스 아줌마에게 묻고 싶었지만 아줌마는 영어를 못하고 나는 생존 스페인어 말고는 그렇게 디테일한 건 물을 수 있는 능력이 안 됐다. 그치만 아줌마는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는지 다음날 공항에 가기 전에 같이 스푼을 사러 가 주겠다고 했다. 잠깐만 나가도 땀이 줄줄 흐르던 그 날에.


나는 그레이스 아줌마를 따라 아바나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쇼핑센터를 몇 군데 들렀다. 해외에서 수입한 온갖 가전제품이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스푼은 없었다. 그 흔한 스프 숟가락도 찾지 못했다. 아줌마도 의아해 하면서 어떻게든 찾아주려고 했지만, 공항 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포기해야 했다. 비록 원하던 쿠바산 스푼은 끝내 구경도 못했지만 그레이스 아줌마의 정만큼은 차고 넘치게 느낄 수 있었다.


멋쟁이인 그레이스 아줌마는 한국을 좋아했다. 우선 한국 여자들의 흰 피부를 예쁘다고 생각했고, 몇 년 전에 유행했던 그래서 여행 가서 입고 버릴 생각으로 가져간 원피스를 보며 이런 걸 만들어 입고 싶다고 관심도 보였다. 한국 남자랑 결혼하는 것을 상상하기도 하는 그레이스 아줌마. 단 하루 동안 만난 그레이스 아줌마의 의리와 정은 아직도 아바나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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