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후기
눈물의 여왕 드라마 후기.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삶의 전환을 꾀할 때 흔히들 여행이나 독서, 수다를 말하곤 한다. 이번에는 드라마를 선택했다. 저간 혼란스럽고 불편했던 생활을 던져버리고 싶었다. 새로운 국면으로 탈바꿈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 판단하고 고른 드라마는 ‘눈물의 여왕’이다. 며칠 전, 모임에서 누군가 강력히 추천했다. 김수현의 연기가 무르익었고 김지원의 모습도 예뻤다는 평이었다. 새로 들인 소파에서 주말 이박 삼일을 뒹굴뒹굴 즐겼다.
첫 회부터 신박했다고 해야 할까. 전통 관습대로라면 며느리들이 모두 준비하던 제사음식을 재벌가를 배경으로 사위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했다. 주방에서 전을 부치고 나물을 제기에 올리는 등. 이 드라마 문제 한 번 제대로 건드리겠다는 기대를 안고 집중했다. 제사음식은 남자들이 원래 준비하는 거라면서도 아들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중에는 자기 아버지 생신날과 처가 제사가 같은 날이라서 아버지 회갑잔치에도 가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어 여때껏 며느리들이 얼마나 가사로 새댁에 속박된 삶을 살았는지 보여준다. 남녀 성을 바꾸어 연출하면서 더욱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효과가 컸다.
주인공은 당연 드라마의 중심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 밀당과 오해, 신뢰와 배신, 방해꾼의 악역... 흥미로운 요소와 장면이 많았지만 드라마가 끝날 즈음엔 악역은 모두 뒤집어쓴 모슬희에 생각이 머물렀다. 이 드라마에서는 그녀를 지나치게 악마화했다. 어린 아들을 보육원에 맡기거나 해외로 입양보낸 엄마.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이 따듯한 사랑으로 품는 쪽이 아니라 성장한 아들이 경제적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하는 엄마. 방향은 그랬지만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은 잔인했다. 사고로 위장하여 주인집 아이를 고의로 죽이고 계획적으로 재벌가의 자금을 횡령하는 등이다.
반면, 이런 행위를 빼면, 그녀는 늙은 회장 수발을 이십오 년 동안 들었던 여자다. 아내의 자리를 대신했던 여성이다. 요즘 부모 봉양 문제가 심각하다. 자녀가 많으나 적으나, 십 남매나 오남매나 무남독녀나 모두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는 힘들어하지 않아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귀찮아하니 그렇다. 이런 세태에 모슬희는 정식 결혼하고 호적에 오른 사람이 아님에도 그런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살인과 탐욕을 씌워 자칫 우리 사회에서 귀감이 될 역할과 희생이 한낱 탐욕으로 치부될까 우려되는 드라마 설정이다. 조심스럽다. 마치 몇 년 전, <품위있는 그녀>에서 배우 김선아가 연기했던 젊은 시어머니 모습이 겹쳐지는 듯했다.
회장의 옆자리에서는 여자였고, 재벌가에서는 시어머니 역할을 했지만 대접은 받지 못했다. 나름의 사랑법으로 아들을 키우고 챙겼지만 그 또한 아들한테는 먹히지 않는 방법이었다. 씁쓸하고 안타까운 인물이었다.
<눈물의 여왕>은 백현우와 홍해인의 운명적 사랑, 필연적 인연이 주된 멜로다. 현우가 고등학교 전학가는 날 학교 운동장에서 넘어진 해인 무릎에 밴드를 붙여주고 그 자리에서 엠피쓰리를 주어서 간직한 사건. 훗날 홍애인이 백현우집 책상 서랍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음악을 듣게 되는 운명적 만남과 필연성. 게다가 홍애인의 H이니셜이 새겨진 것까지 넣어 부정할 수 없는 물증이 된다. 그보다 더 이른 시점으로 사건을 옮겨 그 운명적 연결고리를 만든다. 여름 휴가에 가곤했던 바닷가에서 장손 수완을 잃은 보트 전복 사건. 모슬희가 보트를 일부러 고장내서 난 사고지만 수호천사 백현우가 해양소년단 체험활동 중 홍애인을 구해낸다. 데스티니.
운명적 사랑이니 이들을 방해하는 인물은 악역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악역에는 모슬희의 아들 윤은성이 있다. 그도 그만의 방식으로 홍해인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어놓고 위기에서 구한다. 바람직한 사랑법이 아닌 줄은 이미 시청자들은 안다. 그 이면에는 그런 삐뚤어진 사랑법을 익히고 터득해 온 인생 여정이 눈물겹다. 결국에는 죽어야만 하는 인물이라니.
홍해인의 비서가 재미있는 캐릭터다. 마냥 순종적이지만 않고 상사인 사장을 뼛속까지 들여다보는 것처럼 조언하고 조력하는 지혜로운 인물이다. 간간이 중요한 대사도 날린다. 주인공들의 러브라인이 꼬일 때는,
"사랑, 운명, 충성, 의리 이런 단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명사인 이유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야!!"라며 강하게 부정하다가
"사랑, 믿음, 봉사, 의리가 추상명사라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힘은 가장 세다."
라며 결말 부분에서 마무리한다.
이 드라마는 재벌집 사위가 겪는 처가살이의 힘듦을 말하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동안 남성중심의 사회가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일방적인 제도적 폭력이었는지 고발한다. 저녁마다 마련하는 사대가 모인 대화모임에서 태어날 손녀의 이름을 지으면서 아내의 성을 붙이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공표하는 처조부와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처가 식구들 모습이 그렇다. 이걸 바꾸어서 아이의 성을 남편의 성, 시가의 성을 잇는 것에 여성들은 이토록 불편, 불쾌하게 생각했던가. 아니,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기나 했을까?
운명지어진 사랑과 만남, 악역에 대한 가슴 아픈 애정, 우리 사회 남녀 역할의 공정함에 대해 생각해 본 이박 삼일 시청 기록이다. 일상을 전환시키는 가장 강력한 해법임이 이번에도 증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