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아래 다리를 건너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의 문화재는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이상 불교 유적지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부족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남이 봐주었으면 하는 글을 쓰면서 조금이라도 나은 글을 쓰고자 한다. 일을 계속하는 가운데 다시 지난 사진을 정리하고, 기본적인 불교 공부와 유홍준 교수의 책을 다시 살피는데 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변명의 여지없이 스스로의 게으름 때문이지만, 정신을 집중해서 길지도 않은 글을 쓴다는 것이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다. 오롯이 글 쓰는 데 집중하고 그것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작가라는 삶이 순탄치 않은 것을 알면서도 부러워지는 때.
처음부터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같은 코스를 답사했다면 훨씬 순탄했겠지만 그것은 남의 여행이지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으므로. 덕분에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가는 지난 추억을 돌이켜볼 수 있어 행복하다.
아라시야마는 교통편이 잘 되어있어 가기 편리하다. 교토역에서 바로 가는 버스도 쉽게 찾을 수 있고, 각 전철 회사마다 각자 아라시야마라는 이름의 역을 갖고 있다. 헷갈릴 수도 있는데, 대부분 비용 절감을 위해 패스를 사용한다면 더 운치 있게 구경할 수 있도록 케이후쿠선(京福線,けいふくせん)을 추천한다. 케이후쿠선의 아라시야마 역에서 이동하는 것이 가장 동선 면에서 효율적이다. 오사카에서 온다면 한큐선(阪急線,はんきゅうせん)을 타면 빠르다.
아라시야마는 嵐山(あらしやま)으로 쓴다. 국내에도 꽤 유명한 아이돌 '아라시嵐'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쉽게 읽을지도 모르겠다. 평온하기만 한 곳인데 왜 태풍을 의미하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겠다. 해발 381m의 산이 존재하지만, 보통 아라시야마라고 하면 도월교 일대 가쓰라 강이 흐르는 지역으로 인식된다. 유홍준 교수의 책의 나온 설명은 일본 현지와 동일하다. 벚꽃과 단풍의 명소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책을 다 읽었어도 흘려넘기고 머리가 나쁜 탓에 기억하지 못하고 가 볼 생각도 않았다. 여자친구가 일본 여행을 왔을 때 가이드북을 읽고 가장 가고 싶은 한 곳을 선택하라고 맡겼는데, 아라시야마의 대나무 숲이었어서 그 덕에 뒤늦게야 움직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벚꽃이 다 지고, 단풍도 끝날 시점에 가서 소문처럼 그렇게 수려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지만, 도시화된 한강과 4대강 공사로 딱딱하기만 한 국내의 강변만 보다가 도월교를 건널 때의 신선함이 있다. 어딜 가나 사람은 많지만 이곳도 만만치 않다. 종점임에도 전차역이므로 역사가 아담하다. 그 때문에 사람들로 더 복잡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타 관광지보다 가운데 도로가 넓은 편이라 답답한 느낌은 없다. 주변의 사찰까지 관람한다면 반나절 정도면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규모여서, 유 교수 일행이 광륭사를 거쳐 왔듯이 나와 여자친구도 이곳저곳을 돌다가 해질녘에 도착했는데 그게 미안해서 겨울에 혼자서 한 번 더 왔다. 유 교수와 함께 답사한 이들은 30분의 자유시간을 할당받았지만, 난 3시간을 넘게 있어도 문제가 없었기에.
케이후쿠선 아라시야마 출구를 가운데로 놓고 좌측(서쪽)으로 가면 도월교(渡月橋,とげつきょう)가 있고, 우측으로 가면 천룡사가 있다. 우측 지역은 별도로 '사가노'라고 한다. 천룡사(天龍寺,てんりゅうじ)는 대나무 숲(竹林, ちくりん)과 연결되어 있다. 천룡사는 입장료를 받고 역시 대부분의 절들이 그렇듯이 오후 5시면 입장이 마감된다.
유홍준 교수는 지리의 원근 거리가 아닌 역사적 이유를 근거로 유적지를 구분하고 답사를 하셔서, 바로 옆에 천룡사가 있음에도 나 역시 원래 책의 순서대로 다음으로 미룬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의 광륭사부터 아라시야마 편의 핵심은 '하타씨'인데, 무지한 상태로 가면 그와 관련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진짜 그것만 보려고 결심한 채 이곳을 향하는 이도 없을 것이고 이번에도 역시 책에 있는 것은 제하고 나의 이야기만 하기로 한다.
가운데 길게 펼쳐진 도로를 기준으로 각종 기념품 가게와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한 두군데를 제외하고는 거의 겹치지 않기에 가게만 하나씩 둘러보는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먼저 천룡사가 있는 방향으로 가면 음식점의 비중이 좀 더 많다. 끝까지 가면 민가가 밀집한 마을이라서, 대나무숲에서 굳이 더 나아가라고 추천하고 싶지 않다.
전체적으로 전통적, 고전적인 느낌으로 꾸며놓았다. 교토 전체에 녹차를 활용한 음식이 많아서 아라시야마 역시 존재하지만, 상대적으로 콩으로 만든 음식이 더 자주 눈에 띈다. 두유 아이스크림, 콩 도넛 등이 있는데 300~500엔 정도로 하나씩 맛보기 무난하다. 그중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유바(湯葉, ゆば)를 추천한다.
겨울이라면 유홍준 교수가 좋아하시는 젠자이(ぜんざい)도 좋지만 한국에도 단팥죽이 있기에 새로움은 덜하다. 젠자이는 자판기에도 캔음료로 판매한다. 쌀 입자가 살아있고 밀가루 새알심을 넣는 팥죽과 달리 팥 알갱이가 살아있어, 팥빙수에 들어가는 팥소를 죽으로 만든 느낌에 달달한 맛이다. 거기에 구운 찹쌀떡. 안 먹어봐도 맛이 상상되지 않는가? 여행에서는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는 경험도 좋지만, 새로 접하는 음식으로 혀를 즐겁게 해주는 경험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바는 두유의 얇은 막을 굳혀놓은 것이다. 전자레인지에 우유를 오래 데우면 위에 뜨는 막처럼, 단백질인 콩물에도 생긴다. 간수를 넣어 굳히는 두부와는 달리, 미끈하고 쫄깃한데 식감 때문에 비리게 느껴질 수도 있어 호불호는 갈릴 듯하다. 고추냉이를 곁들인 간장과 함께 주는데 회를 씹는 식감도 나고, 오래 씹을수록 고소함이 더해져 같은 재료임에도 두부와 두유와 또 다른 차원의 맛이다. 오히려 치즈에 가깝다.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고, 간식으로 다른 식사 먹기 전후로도 양도 적당해서 좋았다. 물론 유바는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교토 다른 지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유바를 활용한 요리도 많다.
이 밖에 밥에 뿌려먹는 후리카케(ふりかけ)도 마트에서 파는 인스턴트가 아닌 자연산으로 만드는 곳이 있고, 비단으로 만든 인형과 장신구들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처음 봤던 '요지야' 화장품 매장은 교토 브랜드였다. 우리나라는 지역 특산물과 음식점을 제외하면 지역색이 뚜렷한 기업을 떠올리기 힘든데, 일본은 수십 년을 넘어 수백 년 전통의 회사도 많지만 분야를 가리지 않고 각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많은 듯하다. 교토만 하더라도 마리오와 포켓몬스터로 유명한 '닌텐도', 전자기기와 최근엔 세라믹 칼로 유명한 '교세라' 등. 전통적 이미지가 강한 곳에서 최신의 아이템이 나오는 역설. 광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요지야 화장품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있으니 마케팅의 능력은 아닌 듯하다. 이곳에는 화장품 매장도 있지만, 요지야의 마스코트 여성 캐릭터를 라테아트로 해주는 카페도 있다. 연인과 함께 간다면 지갑을 더 두껍게 해가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다시 도월교(토게츠쿄이나 독자의 혼동을 줄이기 위해 책의 표기법을 우선한다) 방향으로 거꾸로 간다. 일본 방송에도 자주 소개되는 곳이어서 처음 봐도 낯이 익었다. 가게들의 규모가 커지고 차들과 사람들이 더 늘어난다.
서기 836년에 흥법대사의 제자 도창이 만든, 천 년 이상의 역사가 있는 다리라고 한다. 책 속의 유홍준 교수의 설명이 하나도 틀림이 없다. 설명이 적힌 팻말을 보면 법륜사 앞에 있어 당시에 '법륜사교(法輪寺橋,ほうりんじばし)'라 불렀다고 되어있다. 다리(橋)는 일본어로 '하시(はし)'인데, 한자음으로 읽으면 '쿄-(きょう)'가 되고, 앞에 다른 글자가 붙으면 발음하기 편하기 위해 '바시(ばし)'라고도 읽는다. 언제나 어려운 일본어. 도쿄와 오사카에 둘 다 존재하지만 '일본교(日本橋)' 역시 같은 원리다.
또 글이 옆길로 새지만, '일본'은 일본어로 '니혼(にほん)'이라고도, '닛폰(にっぽん)'이라고도 한다. 보통, 아니 거의 '니혼'을 더 많이 쓴다. 일본인이라고 할 때 '니혼진'이라고 하지 '닛폰진'이라고 하지 않는다. '닛폰'이라고 할 때는 아무래도 강한 발음이다 보니 주로 축구, 야구 등의 스포츠에서 일본에 강인한 이미지를 불어넣기 위한 의도일 때 사용된다. 살아본 경험으로 그러했고, 일본의 지인에게 물었을 때도 같은 답을 주었다.
그러나 같은 '일본교(日本橋)'를 도쿄에서는 '니혼바시', 오사카에서는 '닛폰바시'라고 한다. 간혹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 나라 언어를 더 궁금해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할 때가 있는데, 간사이 방언이 상대적으로 간토에 비해 강하므로 니혼도 닛폰으로 변한 것은 아닌가 혼자 근거 없는 망상을 해본다.
빠진 것은 원래 위치는 100m 정도 상류에 있었는데 1606년에 현재에 위치로 오게 되었다는 것. 현재 다리는 철근콘크리트를 기반으로 몸체를 제작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교토를 대표하는 명승지므로 풍경과 어울리게 일부러 나무로 만들었다는 것. 오사카성, 금각사 등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일본의 명소는 사실 불에 타서 재건한 것이 많다. 천 년 이상된 문화재로 알려져 있지만, 도월교 역시 다시 지은 것.
그렇기에 보존하는 방식에서 실제 원본을 대할 때와 차이는 있겠으나, 어쨌든 중요한 문화재 위를 다닐 수 있게 해놓았다. 다리를 다리 역할 그대로 사용하는 것. 가장 친숙하게 접근하는 것이다. 광륭사의 '국보 1호'를 대하는 자세와 180도 달라서 혼란스럽지만. 일본의 관광지 운용을 보면 늘 우리나라 국보 1호 숭례문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불이 안 나게 하는 게 첫 번째로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미 없어져 버려 모두가 재건한 것을 알았다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개방하여 성문 위에도 올라갈 수 있게 접근성을 높였다면 어떠했을까. 서울 도심으로 들어오는 진짜 문의 역할로서. 숭례문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복궁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외국인들이 좋아하지 않았을까?
도월교를 건너오면 건물의 규모가 커진다. 대부분 호텔이나 료칸이다. 강변을 따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기도 좋고, 풍광이 수려하기에 머물고 싶어 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시원하게 앞이 트여있어서인지 역 주변에 비해 음식점의 가격대도 비싸진다.
두 번을 갔는데 지쳐서 법륜사는 보지 못했다. 못 본 것이 있으면 다음에 그 핑계로 또 가볼 수 있으니까. 법륜사 대신 바보같이 전단지에 속아 법륜사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이와타야마 원숭이 테마파크를 갔는데, 잠을 거의 못 잔 상태로 급경사를 올라가 거의 죽을 뻔했다. 대신 그곳의 전망은 법륜사 전망대에서 유 교수님이 보셨을 경치보다 단언컨대 더 좋았다고 자랑하고 싶다. 번외편에 공개.
구경을 마치고 다른 교토의 관광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케이후쿠선으로 되돌아가지 말고 계속 길을 따라 한큐 아라시야마역으로 걸어가 보는 것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