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가 아니어도 볼거리가 넘치는 곳
나름 예습한답시고 닥치는 대로 일본과 관련된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일본어 교재는 당연한 것이었고, 가급적 역사를 잘 알아두고 가자는 생각에서 전국시대를 다른 만화(도저히 소설 '대망'은 분량 때문에 엄두를 낼 수 없었고, 그 원작을 잘 각색한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전집을 구입했다)부터 음식, 문화와 관련된 책을 섭렵했다. 모든 책을 통틀어 가장 인상에 남았고, 일본에 가기 전에 꼭 봐야겠다고 다짐한 것이 교토 기온의 축제를 보는 거였다. 마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도 나와서 일본에 도착해서도 날짜까지 다 알아뒀는데 금전적 문제로 일에 치이는 바람에 결국 보지 못했다. 두고두고 아쉬울 따름이다.
교토를 자주 갔으나, 유홍준 교수가 '1부 헤이안 시대' 이전 3장에서 언급한 곳은 매우 유명한 곳임에도 희한하게 한 곳도 가지 못했다. 그만큼 교토에는 볼거리가 넘친다. 지나쳐간 곳은 있지만 일단 이 책의 순서대로 따라가면서 안내하려던 의도는 이번에는 조금 빗나가고 말았다. 기온 거리만 조금 언급하는 걸로 대신한다.
기온(祇園, ぎおん)을 가기 위해서는 간단하게 한큐선(阪急線)을 타고 종점인 가와라마치(河原町, がわらまち)에서 내려서 걷는 게 가장 무난하다. 아니면 환승을 해야 하는데 게이한선(京阪線,けいはんせん), 카라스마선(烏丸線,からすません)등이 있는데 방향과 이름이 헷갈려 어렵다. 三,四,五 등의 숫자가 역 이름에 많이 보이면 그곳이 교토 중심부이자 기온이다.
오사카에서 교토로 바로 가게 된다면 보통 가와라마치 역에 내리게 된다. 아주 오래된 도시임에도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한 길이 교차로 이어지고, 큰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백화점은 물론, 유명 의류 브랜드들이 밀집해있어 명승지를 찾지 않더라도 쇼핑으로 하루를 족히 보낼 수 있다. 물가는 오사카보다 교토가 더 비쌌다. 관광지라서 정작 주거지역이 어떠한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현지 사람 말로도 교토가 더 비싸다고 했다.
사족이지만 유 교수 책에는 가와라정町이라고 돼있는데, 정町을 쵸우(ちょう)라고 읽을 때는 행정구역상 우리나라 동에 가까운 구분이다. 町는 다른 한자로 街라고도 쓴다. 종로 1가처럼 거리로 해석하면 된다.
교토를 다닐 때는 패스가 있으면 버스도 무료니까 굳이 힘들게 고생할 필요는 없지만, 니조성, 니시혼간지, 헤이안 신궁, 청수사(기요미즈테라)는 천천히 걸어가도 좋다. 일본에서는 지하철역으로 3 정거장 정도는 그리 멀지 않으니(지극히 주관적으로) 오히려 걸어가는 것이 더 많은 볼거리를 만날 수 있다.
오래된 문화유적과 전통스런 분위기만 떠올리면 교토역은 물론이고, 가와라마치에서도 당황하게 될 것이다. 상상력으로 멋대로 만들어진 이미지 때문에 간혹 실망할 때가 있는데 정보의 부족 때문이 아닐까 한다. 조금만 걸어 다니면 이내 원했던 풍경을 볼 수 있다. 절로 입에서 '교토다!'하는 탄성이 나온다.
기온 일대는 낮보다는 밤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4,5시경에 끝나는 문화재를 먼저 봐야 하는 시간적 제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채로운 조명들과 분위기는 단연 저녁이 압권이다.
중앙에 큰 도로를 등에 두고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저마다 아기자기한 간판들을 달고 늘어서 있다. 일본은 상점들이 상당히 문을 일찍 닫는 편인데 이 지역은 주로 술을 파는 곳이 많아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이 북적인다. 운이 좋으면 얼굴을 하얗게 꾸민 게이샤들도 볼 수 있다.
전국 1100여 개 베스킨라빈스 매장에서 유일하게 가와라마치 점에서만 먹을 수 있는 디저트. 말차(가루녹차)와 팥, 콩고물, 떡은 일본의 디저트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다 들어가고 원하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고를 수 있다. 맛은 국내 인절미 팥빙수에 얼음 대신 아이스크림이 들어갔으니 뭐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맛이지만.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한정'을 보면 가급적 해보려는 주의다.
디저트의 기본은 식도락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일본어라 소개한다. 맛챠(抹茶, まっちゃ), 아즈키(小豆, あずき), 키나코(きなこ), 모치(餅, もち)다. 메뉴를 볼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청수사 가는 길에 있어 기온보다는 오히려 청수사 범주에 넣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오중탑은 멀리서도 아주 잘 보인다. 여기를 청수사에도 비슷한 탑이 있어 이곳을 잘못 착각하는 경우도 우려되는데, 청수사 탑은 붉게 칠해져 있다.
정작 일본인은 법관사 오중탑이라고 하면 잘 모른단다. 이곳에서는 야사카노토우(八坂の塔, やさかのとう)가 더 유명하다. 산넨자카(三年坂, さんねんざか)는 청수사 가는 길의 언덕을 말하는데 한자대로 3년 언덕이다. 물론 1년, 2년 언덕이라는 이름의 길도 있다. 원래 이름은 임산부의 건강과 순산을 기원하는 산네이자카(産寧坂,さんねいざか)였다. 여기서 넘어지면 3년 안에 죽는다는 이야기 때문에 산넨자카로 불리게 되었단다. 다른 곳보다 조금 가파르긴 하지만 그다지. 이걸 액땜할 수 있는 호리병 모양의 기념품을 파는데, 곳곳에 이런 스토리텔링을 부여하여 물건을 파는 상술에 놀랍기만 하다.
화재로 탑만 덩그러니 남아서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이라 해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입장료는 500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개방하는데 2층까지 올라가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세네 번 이 앞을 지나가 봤으나 들어가는 이를 보지 못했다. 고구려 도래인이 세웠다는 것을 좀 더 강조하면 한국인들도 일부러 좀 찾을 텐데 아주 좋은 목에 잘 보이는 유적지면서 홍보는 청수사에 전념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과거의 '도쿄 타워'. 참 적절한 비유다.
긴 시간 준비해서 짧은 시간 많은 것을 봐야 하는 보통 관광객들과 거주하면서 천천히 구경했던 나의 패턴은 완전히 다르기에 내 방식으로 권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우리나라 관광객을 지켜보면서 서양인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안타까운 것이 눈에 띈다. 너무나 틀에 박힌, 마치 여행도 학원에서 배운 듯한 똑같은 순서, 똑같은 코스, 똑같은 음식만 먹고 같은 위치에서 사진을 찍고 같은 행동을 한다.
먹어보면 좋고 못 먹어도 다른 수많은 가능성들이 있는데, 그 가능성을 모두 외면하고 오직 정해진 곳만 보고 가는 듯하다. 길을 잘못 들어서 새롭고 더 멋진 경험을 할 수도 있는데. 물론 그 또한 개인의 자유이니 내가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늘 아쉽다. 기우이지만, 이 글을 쓸 때 가장 우려되는 것이 또 누군가가 고스란히 따라 했다가 내가 느낀 감정과 다르게 느껴 낭패를 보는 것이다. 참 어려운 문제다. 가이드북과 여행기의 경계란.
교토에는 청어로 만든 국수, '니신소바(にしんそば)'가 명물이다. 메밀이 일본어로 소바(蕎麦)다. '메밀 소바'는 '역전 앞'과 같은 격이지만, 우동이 면을 뜻하면서도 요리 이름이기도 하듯이 소바 역시 같다. 일본 국숫집에서 면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은 굵기나 익힌 정도를 고르는 것이지만 드물게 우동, 소바 중에 고르라고 할 때도 있다. 이럴 때는 밀가루, 메밀면 중에 고르라는 의미다. 소바를 시켰는데 왜 뜨거운 국물에 담긴 면이 나오냐고 황당해하면 안 된다.
니신소바는 온면이다. 차가운 것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청어의 맛이 약간 달짝짭짤새콤하기 때문에 뜨거운 국물에 푹 적셔 먹는 것이 훨씬 어울린다고 느낀다. 국물도 약간 새콤한 맛이 있는데 다른 날보다 추운 겨울에 몸을 따뜻하게 하는데 그만일 것 같았다. 청어가 올려져 있다는 것 말고는 아주 특별하지 않다. 일부러 골목 안을 돌다가 직장동료와 함께 노부부가 운영하는 아담한 곳을 갔는데 맛있었다. 가이드에는 또 니신소바 전문점이 있는 모양인데 한국 맛집 골목도 그렇지만, 같은 품목으로 골목이 형성된 경우는 어디를 가든 대동소이하다. 이곳저곳 더 봐도 부족한 시간에 줄서기로 허비하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여행을 갈 때는 여럿도 좋지만 혼자 가는 것을 선호한다. 마찰이 없기 때문이고 오롯이 내 판단으로 내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취향까지 배려를 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음식은 못 먹는 것이 있으면 넘겨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일부러 기온의 골목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보기로 하고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새우라멘이라는 간판을 보고 무작정 들어갔다. 하루 세 끼를 라멘으로 먹은 적도 있을 정도로 라멘을 좋아하기도 하고. 라멘 가게를 나중에 하고 싶은 목록에 넣어두고 있을 정도로 라멘에 관심이 많은 나도 새우라멘은 처음이었다. 보통의 돈코츠에 새우튀김이나 구운 새우를 올려주겠거니 했는데, 새우 전체를 그대로 갈아 넣었는지 붉은빛 국물의 라멘이 나왔다. 싱겁게 먹는 사람에게는 많이 짤 수도 있는데, 그 깊은 맛은 아주 일품이었다. 새우탕 컵라면은 새발의 피도 많게 느껴질 정도로 진짜 새우의 맛. 돼지뼈 육수에 수백 마리에 새우가 들어있는 맛.
1년의 일본 생활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기억에 남는 음식이다. 오사카, 교토로 출간된 가이드북을 전부 읽었는데 이 라멘을 소개한 책은 보지 못했다. 그냥 무작정 걷다가 발견한. 보석은 숨어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어 일부러 남긴다.
법관사 오중탑도 장관이지만,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서양식인지 동양식인지 알 수 없는 '퓨전'이란 말이 어울리는 독특한 모양의 첨탑이었다. 밑에서 위로 시선을 올리면 분명 일본인데, 다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유럽이 보인다. 미술에 문외한이라 이것도 고딕 양식이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기묘하면서 언뜻 불안정해 보이기도 하는 탑 위엔 새 한 마리가 양팔을 쭉 벌리고 서있다. 무슨 건물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 혼자 새 모양을 보고 교회 건물이라 생각했다. 예전에 천주교가 일본에서 박해를 받았으니 십자가를 직접 표현 못해서 새로 대신한 것으로 알았다.
뒤에 찾아보니 건물의 기온각(祇園閣, ぎおんがく)으로 대운원(大雲院, だいうんいん)이라는 정토종 사원 내에 있는 탑이었다. 그냥 탑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비한 느낌이 들어 들어가지 않고 여러 방향에서 사진만 찍었다.
대운원은 1587년 데라마치(1973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에 일본 전국시대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적자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절이다. 아케치 미츠히데의 반란, 즉 혼노지의 변으로 아버지 노부나가가 위기에 빠지자 구하러 갔으나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니죠 어소에서 농성 끝에 자결한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26세. 노부나가가 살아있었다면 다음 후계자는 당연히 노부타다였을 것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넘겨받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하는, 역사에서는 무의미한 가정을 해본다.
무튼 그 대운원 자리에 1928년 오쿠라 기하치로라는 '오쿠라재벌' 설립자가 만든 별장이 기온각이다. 높이는 약 36미터. 전망대 용도로 지은 것이나 내부는 한정된 기간에만 들어갈 수 있다. 오중탑 보다 이것이 순서로 먼저 눈에 띄게 마련인데 유홍준 교수 책에 언급되지 않은 것은 아직 만들어진지 100년이 되지 않았기에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함일까. 금각사, 은각사에 이어 동으로 만든 동각(銅閣)을 컨셉으로 했다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너무 독특해서 금각사를 처음 봤을 때 감동만큼은 와 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