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시미이나리 여우의 비밀
(훗날 변동이 생길 가능성을 대비하여 제가 방문한 날짜를 올립니다)
유홍준 교수는 JR선을 타셨으나, 나는 간사이 패스 때문에 케이한본선(京阪本線, けいはんほんせん)을 탔다. 장거리 여행을 계획했다면 한국에서 미리 JR 패스를 구입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다. 속도도 빠르며 신칸센도 탈 수 있고, 역의 위치가 관광지에서 대부분 더 가깝거나 좋은 위치에 있다. 그러나 오사카나 고베, 교토를 기점으로 간사이 일대만 돌아다닌다면 간사이 주유패스가 훨씬 경제적이다. JR을 제외하고 대부분을 탈 수 있고 교토는 버스가 매우 편하므로. 물론 자신의 코스에 맞게 선택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후시미이나리(伏見稲荷, ふしみいなり) 역에서 내리면 된다. 바로 출구를 따라 가면 후시미이나리신사가 나온다. 책에도 나왔지만, 그냥 한자로 후시미이나리대사(伏見稲荷大社)라고 한다. 그냥 이나리대사라고 되있는는 곳도 많다. 애플에서 동명으로 검색하면 도쿄에 있는 절을 알려주기도 하는데, 이곳은 당연히 교토다.
역을 상당히 잘 꾸며놓았다. 붉은빛에 우리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일단 그 도시에서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버스터미널이나 역을 그 지역의 특색에 맞는 테마로 꾸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자연스럽게 역이 너무 이뻐서 나처럼 사진을 찍어 올리는 이들이 있으니 말이다. 저절로 홍보가 되지 않는가.
신사 입구까지 아기자기한 식당가와 노점들이 줄지어 있다. 야끼소바부터 고구마튀김, 오코노미야끼 등 금방이라도 침이 고이는, 그러나 가격이 좀 있어 선뜻 먹기 망설여지는 음식이 양편으로 있다. 대부분 다른 축제나 관광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라 지나치는데 메추리구이는 요즘 한국에서도 보기 힘들어 눈에 띄었다. 신사는 절과 달리 주변이 개방적인 느낌이다. 일본에서는 스님들도 고기를 먹기 때문에, 신사라면 더욱 고기에 대한 반감이 없을 것이고 명승지 앞에 음식들이 즐비해도 이상함이 없다. 어릴 때 동네에 메추리 고기를 파는 곳이 있어 종종 먹었기에 지나쳤지만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추천한다. 뼈까지 꼭꼭 씹어먹으면 되는데 닭고기보다 훨씬 더 고소하다. 여러 군데 가게가 있는데 가격이 다르다.
교토에 가면 후시미이나리신사를 가지 않더라도 전부터 지하철 내부 광고나 포스터 등에서 이 여우 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여우는 이나리신사의 상징이다. 보통 신사나 절에 양편으로 해태, 개, 여우 등이 놓인 석상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코마이누(狛犬,こまいぬ) 라 한다. 이누(いぬ)는 개를 뜻하지만 개가 아닌 원숭이나 닭 등 다른 동물인 경우도 많다. 보통 코마이누는 신을 통하는 사자, 매개 역할인데 이나리 신사의 여우의 차이점은 여우 자체가 신격화된다는 것이다. 곧 신을 여우화 한 것이다. 왜 수많은 것들 중에 하필 여우인지 너무 궁금하여 물어도 일본인 역시 잘 아는 이가 없다.
짧은 일본어로 찾아보니 일단 '이나리'는 농업(농작물)의 신이다. ('이나리'라는 발음이 백제의 벼'나락'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으나 불상처럼 형상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여우가 된 이유는 여러 설이 있는데 원래 농업의 신의 다른 이름이 '미케츠'인데 여우의 발음 역시 '미케츠'여서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고는 하나, 지금 여우는 일본어로 키츠네(狐, きつね)라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장의 시작인 헤이안 시대 초기(810∼824).
[수도 헤이안쿄 북쪽 산에 백여우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 백여우 부부는 마음씨가 착해 항상 인간 세계에 도움을 주고자 기원했다. 그러나 짐승의 몸인지라 뜻을 이루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자식 다섯을 데리고 이나리 신사에 참배하기를 오늘부터 이나리 신사의 식구가 되기를 바란다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중 신단에서 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나리신이 감응하여 이들을 한 식구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때부터 백여우 부부는 참배하는 인간들을 도와 그들의 뜻을 이루게 하는 데 힘을 쏟았다.]는 전설.
또 다른 설은 여우의 털 색깔과 꼬리 모양이 익은 벼를 닮아서라는 것과, 농작물을 먹어치우는 해로운 쥐를 사냥하는 동물이므로 여우가 되었다가 농업의 신이 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공감이 간다.
또 이나리 신사에서만 제단에 음식을 바칠 때 유부 초밥을 올리는데, 유부를 일본에서 '이나리(いなり)'라고 한다. 원래부터 동명이어서 일부러 제단에 유부를 올리는지, 아니면 이나리 신사에 유부를 올려서 이름이 이나리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어 사전을 보면 '이나리'가 '여우'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되어 있다.
또 옆으로 새지만, 우동 중에 큰 유부가 올려진 우동을 키츠네우동(きつねうどん)이라고 한다. 전부터 왜 여우우동일까 했는데 이것을 찾으면서 명쾌하게 궁금증이 풀렸다. 여기에 하나 쓸데없는 덧붙임. 튀김을 하고 남은 부스러기(텐카스,天かす)로 만든 우동은 타누키우동(たぬきうどん)인데 타누키는 '너구리'를 뜻한다.
가급적 인파를 피해 조용히 즐기려고 평일에 가는데도 일본의 유명 명소는 주말이나 차이가 없다. 유명 관광지에 가면 한국/중국인들이 어디를 가든 가장 눈에 띄는 반면에, 그나마 신사는 일본인들이 훨씬 많게 느껴진다. 일본인들만이 갖고 있는 신사의 기복신앙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식민지 영향으로 신사에 대한 반감이 있어 경험으로도 참배를 올리는 이가 한중 양국에는 거의 없어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신사에만 가면 행동이 더 빨라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호텔 일을 하면서 수많은 외국인들과 타지의 일본인을 만나면 대부분 후시미이나리신사는 빠지지 않고 가는 것 같다. 지인들도 간사이 여행을 오면 SNS에 항상 후시미이나리의 토리이(鳥居, とりい) 사진이 업로드돼있다. 내가 체감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데 역시나 관광객 인기 순위 1위란다. tripadvisor사에서 조사한 결과지만 다른 곳도 큰 차이는 없을 듯. 이렇게 보면 한 곳에 몰리는 건 우리나라 사람만은 아닌 게 분명한데 왜 답답함이 느껴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 역시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다르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기도 하고.
거금을 주고 부적이나 명패 같은 걸 구입하여 소원을 쓰고 걸어두는 것은 어느 신사나 가면 볼 수 있는 공통된 모습이다. 절도 마찬가지. 철저하게 기복 신앙을 기반으로 엄청난 액수의 돈이 움직인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이사하라 사토미 주연의 <5시부터 9시까지>라는 드라마에, 남자 주인공은 스님이다. 일본에서는 연애도 결혼도 자유롭게 하고 전용기까지 갖고 있는 갑부로 등장한다. 일반적으로도 스님 하면 엄청난 갑부로 인식되고, 방송에 출연하여 맛있게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도 있다.
처음에 사진으로만 봤던 후시미이나리의 명물, 붉은색 토리이가 수백수천 개 줄 서 있는 것을 보고 아주 오래전부터 세워져 있던 것인 줄 알았는데 지금도 공사가 한 창이다. 회사, 가문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홈페이지도 있어 상세하게 볼 수 있지만, 올라가는 도중에도 안내판을 볼 수 있다. 토리이 세우는 가격을 알아보니 가작 작고 저렴한 것이 5호 사이즈인데 175,000엔. 가장 크고 비싼 것은 10호로 1,302,000엔~이라고 돼있다. ~이 의미하는 것은 정상부에 가는 운반비용까지 포함된 것일 터. 토리이 하나에 한국 돈 1,300만 원이 넘는다. 이 돈을 다른 곳에 쓰는 게 더 현명한 것 아닐까? 토리이를 설치한 회사는 모두 잘 되었을까.
영구히 보존되는 것도 아니다. 나무로 만들다 보니 아래가 썩어서 부서지는 것 또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넓은 신사 본당을 지나쳐서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가면 번뇌가 쌓이고 다리가 아픈 지옥도(?)의 시작이다. 토리이 자체로는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 다 똑같이 생겨서 형식적으로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게 수천 개가 모이면서 보기가 좋아진 것뿐이다. 역사유적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일본은 굉장히 개방적이다. 대부분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복원된 것들이다. 후시미이나리 역시. 섬나라로 외침이 없었음에도 유명한 고적들이 거의 재건된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가짜인데, 개의치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아무리 오래되고 유서가 깊다고 하더라도 찾아주는 이가 없으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일본에서 드는 생각. 돈이 우선은 아니지만, 어제 만든 것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지속된다면 이미 문화재가 된 것은 아닐까.
사람이 없는 사진을 찍으려면 최소한 중간 이상은 올라가야 한다. 두 시간 이상 걸린다. 다행인지 겨울이라 오르는데 그리 힘들지 않았지만 이내 외투를 다 벗어야 했다. 체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정상에 특별한 목적이 있는 사람만을 권한다. 반드시 음료수를 미리 챙겨가야 한다. 그러나 그 음료수의 무게 때문에 또 힘들어질 때가 있다. 그냥 산을 오를 때와 계단을 계속 오르는 것은 차이가 크다. 중간 지점에 다다를 때까지 지겨울 만큼 토리이만 이어진다. 길은 잘 정비되어 있지만 신발을 잘못 신었다면 절대 올라가서는 안된다. 다 왔다 싶은데 겨우 중간인 것을 알면 허탈할 것이다.
유홍준 교수님이 아직 발길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고 하는데, 계속 미치지 못하시기를 바랄 뿐. 내가 수고를 대신했으니 사진을 교수님이 봐주셔서 대리만족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간중간 식당과 슈퍼들이 있다. 국내 등산로에는 옆에 작은 레일이 있어 동력으로 물자를 운반하는 것은 봤는데 이곳은 그런 것도 하나 없다. 별도로 길이 있는 것인지 차도 올 수 없는 길인데 어떻게 물건을 가져올까, 출근은 어떻게 할까 궁금증이 들었다. 당연히 가격도 배로 비싸다. 아이스크림도 판매한다.
그러나 자판기는 안 되는 게 많고. 그다지 내키지 않아서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그냥 정상까지 올랐다.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존경하면서.
오를 때마다 번호로 위치를 알려주는데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어디로 갈지는 본인의 선택이나 아마 대다수가 같은 길로 갈 거라 확신하며.
중간 지점에서 한 번 전망대처럼 탁 트인 곳이 나온다. 안타깝게도 전망이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중간 부분이라 개운하지도 않고 더 올라야 한다. 산속에 호수가 있어 신비한 분위기를 내는데 이것이 나름 매력이 있다.
신사 초반에는 수백 인파가 바글바글했는데, 정상 부근에서 만난 사람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아이를 데려온 아버지의 울먹이는 표정이 지금도 선명하다.
정상에 오르면 반겨주는 것은 돌로 만든 토리이. 뭔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밤에 오면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약간의 오싹함도 있다. 큰 기대를 해선 안되고 정상을 정복했다는 쾌감도 덜하다. 그리고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 날 판단을 잘못하여 다른 곳 한 군데를 더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그래도 이 또한 다른 이는 흔히 할 수 없는 경험이 아닌가. 일본인들도 모두 와보지 못한 곳을 가봤다는 즐거움. 사람들이 일부만 아는 곳을 전부 보고 왔다는 즐거움. 여행에서의 실수가 주는 행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