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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조명이 꺼진 뒤, 몰려온 버석한 현실에서

<아노라> 단평

by 송희운 Nov 2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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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노라>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제77회 칸 국제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노라>가 11월 6일 국내 개봉하였다. 션 베이커 감독의 2017년작인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봤었기에, 이번에도 그의 작품을 관람하러 극장으로 향했다. <아노라>는 전형적인 신데렐라의 이야기를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이 이야기를 다룬 감독이 션 베이커 감독이라는 점에서 그 전형성을 어떻게 다르게 보여줄 것인가가 기대되었고 그 기대는 확실하게 충족되었다. 


뉴욕의 스트리퍼 바에서 일하고 있는 아노라는 우연히 그 바에 놀러 온 이반을 만나고, 그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와중 그가 러시아 재벌가의 2세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의 제안에 따라 1주일간 라스베가스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서 이반은 충동적으로 아노라에게 결혼하자고 프로포즈하고, 둘은 그곳에서 급작스럽게 결혼식을 올린다. 아노라가 스트리퍼 바를 떠나 이반의 집에서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시, 이반의 부모님은 이반의 집으로 하수인을 보내 결혼을 무효로 만들 것을 지시한다. 이반은 갑작스럽게 들어닥친 하수인들 때문에 당황해서 화를 내다가 자신의 부모가 곧 미국에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을 듣자 아노라를 그 집에 버려두고 도망쳐버린다. 아노라는 이반 부모의 하수인들과 함께 이반을 찾기 위해 밤새 도시를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매 장면 마다 감정이 최대한 절제되어 있어 삭막해 보이기까지 하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달리 <아노라>는 화려하고 환상적인 세계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아노라가 이반과 처음 만나 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들은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쓰이지 않았던 화려하고 시끄러운 배경 음악이 가득 찬 세계이다. 처음 아노라가 이반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그는 자신의 눈앞에 있었던 세상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이반의 초대를 받아 새해 파티에 갔을 때에는 이전과 달리 자신의 친구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세상에 대해 소개하고, 그가 이반과 함께 라스베가스에서 보낸 일주일은 그의 짧은 인생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처럼 묘사된다. 이러한 부분이 정점을 찍는 순간은 두 사람이 결혼을 하는 장면이다. 21살, 23살 세상이 보기에 너무나 어린 나이인 그들이 결혼하고 나서 라스베가스의 거리를 걸어 다닐 때에는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고 그들의 미래는 행복으로만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이러한 환상이 깨지는 시점은 바로 이반의 부모님이 이반의 결혼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반의 어머니는 이 결혼을 알게 되는 순간 이반을 감시하던 부하 토로스에게 바로 연락을 취하고 토로스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바로 집으로 쳐들어온다. 이반은 토로스 일당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그 과정에서 아노라는 그대로 그 집에 두고 가버린다. 아노라는 토로스, 이고르, 가닉과 한바탕 소동을 벌이다가 부하들에게 붙잡히고 사라져 버린 이반을 찾기 위해 부하들과 길을 떠난다. 영화는 이때까지도 비극적인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느낌보다는 코미디에 가까워 보인다. 아노라와 이고르, 가닉이 서로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도 슬랩스틱 코미디와 같이 비치며, 아노라가 토로스 일행과 함께 이반을 찾아 밤새 도시를 헤매는 장면은 마치 한 편의 로드 무비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가장 아이러니했던 장면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치고받고 싸우며 난리를 치던 캐릭터들이 이반이라는 한 인물을 찾다 지쳐서 음식점에 앉아 같이 음식을 먹고 있는 장면이다. 이들이 음식을 먹고 있는 장면에서는 말로는 다 표현 못할 아이러니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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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라는 자신과 함께 일했던 친구의 제보로 그토록 찾아 헤맸던 자신의 남편을 자신의 전직장인 스트리퍼 바에서 만난다. 이반은 2주 만에 아노라가 버려질 것이라고 악담했던 스트리퍼와 같이 있었다. 이반은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고, 아노라가 어떠한 말을 해도 그 말을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뻗어있을 뿐이었다. 결국 아노라는 이반과의 결혼을 취소하기 위해 라스베가스로 떠나게 되는데 라스베가스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라탈 때, 아노라는 그곳에서 잠깐 동안 같이 살았던 남편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된다. 사실 이러한 이반의 철없고 부족한 모습들은 그가 라스베가스 카지노에 도착해서 지배인에게 이상한 장난을 칠 때와 같이 영화 곳곳에 단서처럼 드러날 때가 있었으나, 아노라는 그와 함께 하는 환상에 취해 제대로 현실을 보지 못했었다. 이반이 아노라와 결혼했던 것은 단순히 억압적인 부모로부터 현실도피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반이 아노라에게 했던 청혼은 진실한 사랑이 아닌 순간적인 충동과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아내인 아노라를 지키기 위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부모에게만 휘둘리며 아노라를 매몰차게 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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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아노라는 항상 자신의 본명이 아닌, '애니'라고 불리길 원했다. 영화 속에서 아노라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그가 이반과 라스베가스에서 결혼을 올릴 때이다. 처음에 이 애니라는 이름은 아노라가 스트리퍼로서 일하는 자신의 삶과 평상시 자신의 삶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반과의 결혼 이후 아노라는 그야말로 스스로가 신분상승을 했다고 생각해 자기 자신 속에서 아노라라는 이름을 버리고, 애니라는 이름에 완전히 녹아든다. 하지만 모든 꿈에서 깨어난 뒤, 자신의 진짜 현실로 돌아올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아노라의 이름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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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가스에서 모든 소동이 끝나고, 아노라와 함께 이동했던 이고르가 그를 앞에 데려다준다. <아노라>의 엔딩은 잠깐 동안이지만 신데렐라를 꿈꿨던 아노라가 다시 자신이 처한 현실로 되돌아가게 되는 엔딩이다. 러닝 타임 내내 밝은 분위기로 전개되던 영화는 이 엔딩에서만큼 지독하리만치 차가운 현실을 보여준다. 자신의 이름을 찾은 아노라는 다시 스트리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가 경험했던 아름답고 부유한 순간들은 이제 다시는 그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반을 찾기 위해 독기 어린 모습으로 이고르와 가닉을 공격했던 모습은 마지막에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비로소 자신의 현실을 직면해야만 하는 처연한 그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아노라>의 엔딩은 감독의 2017년 작인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정반대의 엔딩처럼 보인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너무나도 리얼해 오히려 끔찍해 보이는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고 마지막 엔딩에 이르러서야 아주 잠깐 찰나의 환상을 보여준다면, <아노라>는 영화의 러닝 타임 절반 이상을 거짓과도 같은 환상을 보여주고 현실을 점차 받아들이는 꿈같은 과도기를 지나가다가 비로소 자신 앞에 닥친 진짜 현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그 현실은 이미 아노라가 지나온 과거이지만, 환상에 빠져본 사람은 알 것이다.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환상에서 깨어나 이전의 자신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 현실이 이전보다 얼마나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지. 


비록 <아노라>의 엔딩은 냉정하게 현실을 직면하게 하지만, 어딘가 한 구석에서 희망이 잠깐동안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이고르라는 인물이 아노라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마지막에 흐느끼는 그를 위로해 주었기 때문이 아닌, 캐릭터 자체를 바라보는 영화의 인간적인 시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흐느껴 우는 아노라의 모습을 음악이나 다른 요소들로 억지로 극대화시키는 것이 아닌, 관객들이 조용히 지켜보게 하는 것. 이러한 시선은 아노라가 받아들일 현실이 스스로에게는 버겁고 비참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화면 밖 관객들이 그를 바라봤을 때는 아노라를 동정하는 것이 아닌 앞으로 이어질 그의 현실과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게 해 준다는 측면에서 인간적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아노라>의 엔딩을 분명 슬픈 결말이지만, 그 씁쓸함 속에서도 남아있는 희망이 그나마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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