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 단평
※ <서브스턴스>의 결말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코랄리 파르쟈 감독의 신작인 <서브스턴스>가 국내에 12월 11일 개봉하였다. 지난 칸 국제 영화에서 큰 호평을 받기도 했었고, '여성 신체'와 '바디 호러'라는 두 단어의 흔하지 않은 결합에 대한 감상평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개인적으로 올해 가장 손꼽아 개봉을 기다려왔던 영화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개봉이 다소 늦은 감이 있었지만, 드디어 극장에서 개봉해서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이 영화를 스크린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올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만족스러운 영화였다.
<서브스턴스>는 엘리자베스라는 한 인물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스파클'이라는 이름처럼 한때 모든 이들이 그를 향해 환호하고 명예의 거리까지 입성한 대스타였지만,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이제 TV 에어로빅 진행자로 전락했다. 이마저도 프로듀서에게 해고당하고 집으로 가던 길에 차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한다. 슬퍼하는 엘리자베스에게 어떤 남자 간호사가 다가와 위로해 주며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권유한다.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에어로빅 쇼에서 자신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람을 뽑는다는 구인 광고를 보게 되자 그는 바로 그 약물을 집으로 갖고 와 자신의 몸에 주입한다. 자신의 몸에서 어리고 아름다운 매력이 넘치는 '수'가 태어나고 수는 에어로빅 오디션에 응모해 바로 당선된다. 놀라운 약물인 '서브스턴스'에는 딱 한 가지 규칙이 있었는데, 그것은 서로의 몸에 주어진 시간인 일주일을 지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의 인기가 치솟을수록 그 규칙은 점차 지켜지지 못하면서 엘리자베스와 수 사이의 균형에는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한다.
<서브스턴스>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참으로 명확하다. 그것은 '이 사회와 그 사회를 담아내는 미디어가 여성을 대하는 방식이 얼마나 폭력적인가?'이다. 영화가 메시지를 보여주는 방식은 참으로 극단적이다. 이러한 극단성은 그동안 여성이 미디어를 대하는 방식에 우리가 얼마나 익숙해져 왔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영화가 오마주 하고 있는 여러 영화들을 차지하더라도 이러한 극단적인 비주얼로 여성의 신체를 전시해 왔던 미디어를 비판하는 모습은 참으로 통쾌하지까지 하다.
이 영화의 미디어 속에서 여성의 신체는 말 그대로 '고깃덩이'와도 같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과거에 전성기를 누리면서 카메라 앞에서 매력적인 '고깃덩이'였지만, 나이가 들고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라들자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게 되었고 그를 대체할 다른 고깃덩이가 필요해졌다. 처음 이러한 부분이 드러내는 장면은 하비와 엘리자베스가 식당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엄밀히 말하자면 대화가 아닌 하비가 엘리자베스에게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하는 것이 가깝다. 그는 이제 엘리자베스가 더 이상 자신들과 함께 일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음식으로 나온 새우를 게걸스럽게 씹어먹는다. 담배를 하도 펴대 누렇게 되어버린 이로 새우를 씹어먹는 하비(이름마저도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이름으로)의 모습은 미디어 속 여성의 신체에 대해 끊임없이 씹어대고 안주거리로 삼아대는 남성들 모습 그 자체이다.(이 씬에서 지나가는 젊은 여성 종업원의 신체를 하비가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은 덤이다.) 엘리자베스는 그에게 어떤 이의제기도 하지 못하고 하비는 자신의 할 말이 끝나자 그를 두고 떠나버린다.
에어로빅 쇼가 여성의 신체를 보여주는 방식은 미디어가 얼마나 여성의 신체를 분절화하여 고깃덩이처럼 보여주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치이다. 어리고 매력적인 수는 하비의 마음에 단숨에 들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매력을 마음껏 뽐낸다. 이때 카메라는 수의 신체들을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그의 엉덩이, 가슴, 허벅지 등 등 등 그의 모든 신체 부위는 하나의 연결된 신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를 통해 끊임없이 절단된다. 전달된 신체 부위들은 카메라를 통해 대중들 앞에 전시되고 그 신체 부위들 그 자체가 욕망의 대상의 되어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게 된다.
영화의 엔딩에서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미디어 속에서 파편화된 신체에 대한 완벽한 역전이다. 새해를 축하하는 성대한 신년 전야제에 가기 전 자신의 본체인 엘리자베스를 죽여버린 수는 자신의 신체가 점점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자 엘라자베스의 집에서 '서브스턴스'를 맞는다. '서브스턴스'를 맞고 그는 다시 태어나지만 수처럼 아름답고 어리고 매력적인 신체가 아닌 끔찍한 괴물이 되었다.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수와 엘라자베스가 그토록 꿈꾸었던 무대에 가장 끔찍한 모습으로 올라선다. 이 장면에서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무언가를 토해낸다. 그가 토해낸 것은 '가슴'이다. 이는 미디어가 여성의 신체를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지, 여성의 신체에 대해서 기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섹스어필'이라는 것을 적나라게 드러내 보인다.
<캐리>의 완벽한 오마주로 보이는 마지막 엔딩에서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행사장을 빠져나와 걸아가던 중 다리가 부러지고 그의 신체는 터져서 고깃덩이가 되어버린다. 그의 괴물 같은 신체 뒤편에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기괴하게 붙어있었는데,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신체가 터져버리자 엘리자베스 얼굴은 그의 몸에서 빠져나와 바닥을 기어 다닌다. 그는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영화 초반 등장했던 명예의 보도블록 위로 올라간다. 그곳에서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한창이던 시절 환호받았던 환상을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몸이 녹아내린다. 그는 핏자국이 되어 사라지고 명예의 보도블록 위에 남아있던 그의 핏자국은 다음 날이 되자 청소부가 청소기 차를 돌리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영화 오프닝과 결말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수미상관 엔딩을 보고 나자 통쾌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슬픈 정서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미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엘리자베스가 새로운 수로 태어났을 때도 그는 다른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여성의 신체를 속박하는 굴레로 다시 들어갔다는 점 때문이다. 젊고 어린 몸매로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는 무한히 새로운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수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 자신의 신체를 파편화시키는 굴레로 들어가 결국에는 자신을 파멸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엘리자베스와 수의 파멸까지 영화가 비판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포함된다. 아름답게 비치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은 여성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닌 파편화시킨 고깃덩이를 보는 것과 다름없으며, 이는 결국 여성을 파멸시키는 결말 밖에 없다는 것. 그렇기에 <서브스턴스>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는 여성들에게 한 번쯤은 꼭 관람을 권해보고 싶다. 비록 "나 자신은 있는 그대로 소중해요"와 같은 다정한 말이 아니라,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영화에 충격을 받을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