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u des Merveilles Hermès
향수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함보다는 나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뿌리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같은 향수라도 뿌리는 이의 체취와 섞이면 완전히 다른 향을 내기 때문에, 향수의 가장 큰 매력은 ‘오직 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향’으로 여겨왔다. 그렇기에 향수에서는 시향이 아닌 착향이 굉장히 중요하다. 단순히 향만 맡았을 때는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나와 어우러진 향을 타인이 맡았을 때 아주 좋은 피드백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로 인해 그 향수에 대한 나의 인식과 생각이 완전히 바뀌기도 한다. 내게 있어 그러한 향수는 에르메스 오드 메르베이였다.
이 향수도 아버지가 사다 주셨던 수많은 향수 중 하나였다. (이쯤 되면 대체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향수를 사주셨을지 의문이 들 것 같은데, 일일이 기억을 다 못할 정도로 많은 향수를 사다 주셨었다.) 사실 이 향수는 처음 맡았을 때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이 향수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보니 정확한 이름도 알지 못했고 나중에 찾아보고 나서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에르메스 오드 메르베이는 비터 오렌지, 엘레미(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Canarium luzonicum 나무의 수지에서 얻는 향), 앰버 등의 향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트러스 향조가 들어있지만 마냥 상큼한 느낌은 아니고 시트러스+스파이시가 결합되어 굉장히 독특한 향이 난다. 딥티크의 오데썽과 비슷한 느낌 같기도 한데 딥티크가 좀 더 여름에 어울리는 상쾌한 느낌인 것과 달리 에르메스 오드 메르베이는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한 느낌으로 가을, 겨울과 같은 계절에 잘 어울린다.
그렇게 향에 대한 주관도 없이 그저 습관처럼 뿌리던 향수였지만, 정작 이 향수를 통해 내게 다가온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어느 날 이 향수를 뿌리고 친구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랑 영등포 지하상가 거리를 걷고 있는데 문득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오늘 향수 뿌린 거 너랑 잘 어울린다 “ 정확한 워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비슷한 뉘앙스의 말이었다. 이러한 피드백을 잘하지 않는 친구이기에 이 말을 들었을 때 사실 놀라고 기쁘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타인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타인이 해준 칭찬에 유난히 꽂혔던 것일 수도 있다. 그보다도 내게 크게 매력적으로 와닿지 않았던 향이 타인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놀랐다. 이렇게까지 향이 주관의 영역이었나 싶다가도 타인의 취향을 통해서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던 향에 대해 지경이 훨씬 더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친구랑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 향수의 이름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익숙한 단어가 아닌지라 핸드폰으로 영어 스펠링 하나하나 치면서 찾아본 향수의 이름은 ‘에르메스 오드 메르베이(Eau des Merveilles)‘. 이 향수 이후부터 유니섹스 계열의 향수에 눈을 떴고, 더 나아가서는 흔히 남자 스킨이라고 하는 향까지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사람의 취향은 가장 주관적인 영역처림 보이지만 타인의 피드백을 수용하게 된다면 닫힌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도 있다. 내게 에르메스 오드 메르베이가 그랬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