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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Oct 05. 2021

(4) 흔들리는 리더라면 <스우파>의 허니제이처럼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요즘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보는 재미로 살고 있다. 한국의 내로라 하는 스트릿 댄서들이 모여 경연을 벌이는 이 프로그램에서는 화려한 무대뿐만 아니라 댄서들의 환희와 눈물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거친 말로 기 싸움을 벌이고 공격적인 댄스로 상대방을 잡아먹을 듯이 굴다가도, 막상 누군가가 탈락하면 뒤돌아서서 휴지로 눈물을 찍어내고, 짐 싸는 데 찾아가서 어색하게 안아주는 정 많은 여자들이다. 열정, 카리스마, 견제, 공격, 방어, 우정, 화해, 리스펙(존중이 아니라 리스펙!) 같은 단어들이 난무하는 댄서들의 드라마에 홀딱 빠져들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댄서는 홀리뱅의 리더, 허니제이다.


언니 하고 싶은 거 다해


허니제이는 박재범의 <몸매> 안무가로 알려진 댄서다. 유튜브를 검색해보면 <몸매> 무대에서 허니제이만 찍은 직캠 영상도 몇 개 뜨는데, 열혈 팬도 꽤 있는 것 같다. 그는 걸스힙합을 대중화시킨 안무가로, 박재범 외에도 춤신춤왕으로 손꼽히는 가수들의 안무를 짜고 무대에 서온 베테랑 댄서다. 힙합 베이스에, 절도 있는 동작과 섹시한 동작을 연결시킨 그의 춤을 추고 보고 있노라면 참말로 '물 흐르듯'하다. 홀리뱅의 춤은 졸졸 흐르는 개울물로 시작해 소용돌이 치며 합류하고, 굽이굽이 바다로 흘러가서 절벽에 내리꽂는 성난 파도가 되었다가 다시 심해로 내려가 정지한 듯한 씬으로 끝난다. 유려한 흐름 속에서 댄서 각자가 의도한 듯 아닌 듯 시간차로 미세하게 박자를 엇갈리며 타는데, 그들이 만들어내는 씬 하나하나가 멋져서 숨 죽이고 지켜보게 된다.  


그런 홀리뱅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기억에 남을 만한 포인트 안무를 짜는 것이다. 이들은 라치카와는 특히 상극이다. 라치카는 동작이 크고 화려하며 머릿속에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을 만한 포인트 안무를 잘 짜는 크루다. 라치카와 맞붙었을 때, 허니제이는 연습하는 내내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밀고 나가도 괜찮나, 우리도 라치카처럼 좀 더 뚜렷하게 보이는 포인트 안무를 넣어야 하지 않나, 이 동작을 고칠까, 저 동작을 고칠까? 이대로 과연 라치카를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그림자가 홀리뱅의 리더 허니제이의 얼굴에 드리웠다. 오락가락하는 그에게 팀원들은 말했다. "언니, 그냥 우리가 잘하는 거 보여줘요." 결과는 홀리뱅의 패배. 이때부터 허니제이는 이를 갈았던 듯하다.

그다음인 메가크루 미션 때 허니제이는 부를 수 있는 댄서를 최대치로 끌어모았다.(43명) 그리고 주특기인 입체적인 동선, 유려한 흐름으로 무대를 구성했다. 여기에 중간중간 춤의 무지렁이인 나 같은 사람도 알아챌 만큼 확실한 포인트 안무를 집어넣었다. 그렇게 구성을 잘 해놓고도 중간 리허설 때 다른 팀의 무대를 보고 허니제이는 또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각 팀원이 돌아가며 메인 댄서를 맡은 여타 팀과는 달리, 홀리뱅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니제이가 센터에 서도록 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욕심에 자기를 앞세웠는데, 팀원 하나하나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게 그제야 미안했던 모양이다. 본 무대 전날, 그는 대미를 장식할 메인 댄서를 제인으로 바꿨다. 그게 신의 한 수였다. 이날 홀리뱅은 말 그대로 무대를 찢어놨다. 미세한 움직임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의상까지 완벽했다. 심사위원은 "홀리뱅이 드디어 대중들에게 자기 춤을 보여줄 방법을 찾았다."며 극찬했다.


홀리뱅의 메가크루 미션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NVdnbioSbWE


그 말에 울컥 솟아오는 눈물을 참는 허니제이의 마음을 나는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춤을 좀 아는 사람에게는 바로 보이는, 그런 세련된 춤을 추는 댄서다. 이 말은 대중들은 그 세련됨을 알아채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허니제이는 홀리뱅만의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대중적인 방향으로 반걸음 걸어나와야 하는 위치에 있다. 한걸음 성큼 걸어가면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춤이 되어버린다. 그 미세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어디쯤인지 알기가 어렵다. 팀원의 말에 온전히 기댈 수도 없고, 의견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다. 적절히 들어주면서 끌고 나가야 한다. 적당한 지점이 어디인지 모르니 마지막까지 수정하고 또 수정한다. 전반적으로는 내 감각을 믿되 어떤 부분은 의심하면서 무대를 계속 보완해나가는 것이다. 흔들리는 리더는 그렇게 계속 흔들리면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크루에 도움이 안 되는 리더는 나밖에 없다."라며 자책하면서도 포기할 수는 없다. 리더는 책임지는 사람이니까.  



스파르타식으로 밀고나가는 모니카, 과정을 즐기고 위트 있게 안무를 짜는 아이키 등등 모든 리더는 각자의 스타일대로 팀을 끌고 나간다. 허니제이에게 감정이입했던 것은, 내가 비슷한 유형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실 카리스마는커녕 우유부단하기 그지없는 나는, 늘 이게 맞나 저게 맞나 고민하느라 앞으로 쭉쭉 나아가지 못한다. 1년에 1권도 아니고, 2년에 1권을 내는 출판사라니- 출판사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인 어 그루브'를 타는 편집자의 고민


그것은 포지션 문제이기도 하다. 내가 꾸린 1인출판사 딸세포는, 페미니즘을 기반으로 하지만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 반대하는 사람도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2019년에 출간한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가 그렇다. 누구에게나 엄마는 있고, 엄마의 노동을 생각하면 자식으로서 빚진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우리는 안다. 전업주부든 맞벌이를 하든 엄마는 늘 자식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 고단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이 사회적으로는 노동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부드럽게 다가가고자 했다. 개인의 역사에 대한 공감에서 공적인 논의로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여성노동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사회과학서인가, 에세이인가? 교보문고 담당자는 말했다. "이건 에세이인데요?" 사회과학서를 편집해온 선배는 말했다. "이 정도면 사회과학서 매대로 가야 하는데." 여기서 내가 택한 것은? 에세이 코너였다. 사회과학서 매대는 왠지 다가가기도 어려우니까 사람들이 편하게 집어서 읽어주기를 바랐다. 누가 읽어도 쉽게 읽히게 만들려 하기도 했고 말이다. 별것 아닌 결정 같지만, 분야 정하는 데만 6개월 이상 걸렸더랬다.(물론 다른 업무도 하면서 고민했다.) 늘 이런 식이다. 딸세포의 지향성은 명확하다. 하지만 위치는 애매하다. 왼쪽이지만 아주 왼쪽은 아니고, 새롭게 들리지만 아주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대중적인 이야기 같기도 한데, 끝까지 읽어보면 불편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여기서는 출판사의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대중적인 방향으로 반발짝만 움직여야 한다.


이번 책은 한 발, 아니 두 발 정도 움직인 모양이다. 내가 타깃으로 생각한 핵심 독자들의 반응이 별로다. 1인, 비혼 가구, 책을 많이 읽는 여성 독자 그룹은 표지가 예쁘기는 한데 자기 스타일은 아니라고 답했다. 그들은 제목인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보다도 카피인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나로 살기 위하여'가 더 끌린다고 했다.


반면 엄마를 비롯해 남편, 친구 등등은 경쾌한 표지와 제목을 보고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다. 위험하다. 실제로는 이 사람들에게 어필할 만한 내용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헛다리를 짚은 게 틀림없다. 너무 오른쪽으로 왔다. 다시 왼쪽으로 가야 하는데 얼마나 움직여야 하는 것일까. 일러스트를 발주했고, 굿즈까지 주문해놓은 마당에 수정할 여지가 얼마나 있는 것일까?


컨셉을 바꾸고 시안을 바꾸자는 말을, 북디자이너에게 어렵게 어렵게 꺼냈다. 이미 완성된 시안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새 시안을 시도해보자고 하려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갈팡질팡하는 편집자 때문에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가 고생한 걸 떠올려보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이런 고민까지 털어놓고나니 디자이너 는 이렇게 말했다.


"인쇄하기 전까지는 계속 수정해봐야죠. 지금 수정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하실 걸요? 인쇄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은 거잖아요."


그래, 여기서 멈추면 분명 땅을 치고 후회할 게 뻔하다. 허니제이가 무대 위에 오르기 전날까지 안무를 수정하던 것처럼, 나도 인쇄 들어가기 직전까지 고민해보련다. 디자이너, 저자, 예비독자와 소통해가며 말이다. 그래도 중심을 잡고 책임지는 건 나의 몫이겠지. 계속해보겠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무사히 할머니가 되고 싶은 1인 생활자의 모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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