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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화 May 09. 2022

부모는 아니지만 나를 돌봐준 어른들에게

학교 밖 청소년을 품어준 도서관의 거인들

열여덟, 모부는 이혼했고 나는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엄마, 오빠, 나 세 식구는 파주를 떠나 강화도로 이주했다. 혹여 아빠가 찾아올까 봐 우리는 섬으로 꽁꽁 숨어들었다. 우리는 강화 경찰서 뒤에 있는 어느 슬레이트 지붕 집에 세 들어 살았다. 그 무렵 엄마는 장어집에서 12시간씩 설거지를 하며 돈을 벌었고, 나는 도서관을 다니며 홀로 수능시험을 준비했다. 얼굴을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은 인강 강사였다. 살면서 가장 외롭고 가장 보호받지 못했던 그 시기에, 나는 낯선 어른들로부터 대가 없는 선의를 받았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강화도 도서관이 있었다. 2층 건물에 기와를 올린 그 건물은 서가도 열람실도 아담해서, 나처럼 매일 얼굴 도장을 찍는 사람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오가며 책상을 흘끗 쳐다만 봐도 누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지, 공인중개사 시험을 치는지 다 알 수 있었다. 이 도서관에서 단연 튀는 사람은 나였다. 여드름투성이에 누가 봐도 학생인데, 학교를 가지 않고 혼자 수학의 정석을 펴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매일 혼자 도시락을 먹고, 여덟 시간씩 공부하다가 해가 저물면 집에 가는 애. 가끔 서가 구석에서 책을 읽고, 화분 보고 한숨 쉬고, 하늘 보고 한숨 쉬는 애. 도서관 직원들은 그런 나를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도서관에 출근 도장을 찍은 지 몇 개월쯤 지났을까, 어느 날 시설 관리하는 아저씨가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던가? 모르겠다. 왜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보고 관심을 가져주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웠다. 그날부터 나는 1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도서관 숙직실에서 다섯 명의 직원들과 함께 도시락을 펼쳐놓는 그 시간이 하루 중 유일하게 누군가와 밥을 먹는 시간이었다. 


그들 얼굴 하나하나가 기억난다. 퉁퉁한 체구를 지닌 40대 중반의 아주머니는, 아마도 청소를 담당했던 것 같다. 자기도 일찍 결혼했는데, 딸도 사고를 치는 바람에 벌써 할머니가 되었다는 그녀는 유독 나를 챙겨주었다. 고기 반찬 좀 싸오라고 타박하면서도, 자기가 가져온 맛난 반찬은 내 밥통에 듬뿍듬뿍 얹어주었다. 


30대 후반의 도서관 사서 겸 관장은 좀처럼 말이 없었다. 열람실보다 좁은 서가가 불만이었던 그는, 사람보다는 책을 더 사랑하는 것 같았다. 낮에 유일하게 서가를 드나들며 책을 열심히 읽는 나를 보며 ‘너도 책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동질감 섞인 눈빛을 던지던 기억이 난다. 


40대 후반의 시설관리인은, 내 롤모델이었다. 나도 크면 저렇게 살고 싶었다. 그 자그마한 도서관은 어디 수리할 데도 없어서, 때 되면 화분에 물주고 볕 좋으면 산책하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처럼 보였다. 가을이면 도서관 뒷동산의 밤나무에 올라가는 게 그의 주 특기였다. 나도 같이 따라 가서 떨어진 밤을 줍곤 했다. 눈썰미 좋고 오지랖 넓은 그 아저씨는 그 동네의 온갖 소문을 다 알고 있었는데, 내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반년 정도, 그렇게 밥을 먹으며 지내는 동안 그 누구도 내게 강화도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학교는 왜 그만뒀는지 묻지 않았다. 그 어른들은 그냥 옆에 있어줬다. 그러다가 해가 바뀌고 도서관에 아는 언니들이 생기고, 재수생 오빠들을 알고 밥 메이트가 생기면서 도서관 직원들과의 점심 자리는 자연스레 졸업하게 되었다. 


지금은 사라진 그 강화도 도서관에는 들어서면 이 문구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로 나는 다양한 어른을 만났다. 사회에서 만난 이들 중에는 좋은 어른도 있었지만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취약한 위치에 있는 젊은이를 정서적으로 착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 때문에 상처 입고 괴로워했지만, 그들을 닮아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대가 없이 선의를 베푸는 어른을 먼저 만났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이나마 따뜻한 어른이 되었다면, 그것은 낯선 어른들의 보살핌 속에서 가장 취약한 시절을 견뎌냈기 때문이리라. 대낮에 돌아다니는 사복 차림의 학생을 의아하게 여기는 어른들의 시선, 교복 입은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 속에서도 강화도 도서관만큼은 내가 머물러도 좋은 안전한 장소가 되어주었다. 도서관 직원들이 내게는 거인이었다. 쉴 그늘을 만들어주는 거인들.   


돌이켜보면 수많은 어른들이 나를 지켜주었다. 간식을 챙겨주던 친구네 엄마, 비 오는 날이면 자기 자식과 함께 차를 태워다주던 동네 아저씨, 엄마 직장에 놀러가서 책을 읽고 있으면 기특하다며 용돈을 주었던 사장 아저씨...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누가 나를 환대하는지, 적대하는지, 관심이 있는지, 여기서 나가주었으면 하는지.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 <코타로는 1인 가구>를 보고, 부모는 아니지만 나를 돌봐준 어른들이 떠올라 주절거려봤다. 원룸 맨션에 혼자 사는 다섯 살 난 아이를, 이웃 주민들이 티 안 나게 돌봐주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 세상의 선의를 믿고 싶어진다. 노키즈존이 횡행하고, 자기 자식만 좋은 대학, 좋은 직업 갖게 해주겠다며 ‘아빠 찬스’를 남발하는 이들이 뉴스를 채울지라도 말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러나 사랑이 꼭 가족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작은 인간이었던 시절, 온기를 나눠준 이름 모를 어른들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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